•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2. 대원군의 내정 개혁
  • 1) 대원군의 인재등용

1) 대원군의 인재등용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한 뒤 맨먼저 착수한 일은 권력체제의 근간인 중앙정치기구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는 안동 김씨 가문의 영향력 하에 중앙관직에 진출해 있던 구관료를 퇴임시키고 신관료의 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대원군은 중앙 정치기구의 개편을 조선왕조 초기의 중앙관제를 복구하는 형태로 추진하였다.

 조선왕조 초기의 중앙관제로는 법전상 최고의 권력기관으로서 국왕 아래 議政府가 있었고, 그 밑에 六曹를 설치하여 행정을 분장하였다. 군사기관으로는 三軍府와 五衛都摠府가 있었다.

 하지만 대원군 집권 당초에는 모든 국가권력이 備邊司에 집중되어 있었다. 비변사는 원래 명종 때 창설된 군령기관이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권한이 확대되었으며, 결국 의정부와 육조의 업무까지 흡수하여 일국의 정권과 병권을 통합한 최고 국가기관으로 성장하였다. 조정의 모든 政令은 비변사에서 재단하게 되었다. 의정부는 기능의 대부분을 비변사에 넘겨주고 儀禮만을 담당하였으며, 육조도 정책 입안 기능은 상실한 채 비변사에서 결정된 사안을 집행하는 기구로 변모되었다.

 비변사의 고위 당국자로 취임할 수 있는 직책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전직, 현직 三議政은 都提調가 되고, 工曹를 제외한 五曹 판서와 大提學, 4都 유수, 군영 대장 등이 당연직 제조가 되었으며 이 밖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제조가 되었다.

 세도정치 시기의 척족 문벌세력은 비변사를 통하여 모든 국정사무를 처리하였다. 이들은 비변사 提調堂上에 취임하여 군사력을 통제함과 동시에 국가재정과 중요 관직 인사권도 통할하였다. 또한 八道 句管堂上을 통하여 지방행정을 제도적으로 총괄하였다. 게다가 비변사 당상은 相避규정의 제한도 받지 않았으므로, 몇몇 유력 가문이 비변사를 장기간 과점할 수 있었다.

 보기를 들면 순조대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자인 김조순은 순조 즉위년(1799)에 대왕대비의 특지로 비변사제조가 되었고, 순조 2년 국왕과 김조순 집안의 정혼이 결정되자 같은 해 10월부터 죽기 직전인 순조 32년 3월까지 영돈녕부사의 지위로 비변사 고위당상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세도정치를 실행하였다. 또 철종대 안동 김씨 가문의 김좌근과 김흥근은 영의정, 좌의정, 중추부사의 직책을 가지고 비변사 고위당상 및 비변사 대신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세도정권 시기를 통해 비변사 제조당상 직위를 차지한 약 300명의 고위 당국자들은 핵심적 지배집단을 형성하여 국가운영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 집단은 安東金氏를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大邱徐氏·豊讓趙氏·延安李氏·豊山洪氏·潘南朴氏 등 6대 가문이 가세한 강력한 혈연 연합적 집단이었다.

 집권 초창기의 대원군은 자체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유력 가문의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대원군이 채택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비변사를 비롯한 기존의 주요한 행정관서를 자신의 정치세력이 장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종래 세도정치 시기에 안동 김씨 세력과 풍양 조씨 사이의 권력교체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원군에게는 문반 관료층내에 자신의 지지기반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원군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였다. 대원군은 외척 김씨 세력의 근거인 비변사의 기능을 중지시키고 왕조 초기의 정치기구인 의정부와 육조, 그리고 삼군부를 부활시키는 방안을 채택하였다.

 비변사의 약화는 대원군이 집정한 직후인 고종 원년(1864) 정월부터 실행에 옮겨졌다. 그 첫단계 조치는 종래 국무 전반을 관할하던 비변사의 업무를 의정부와 비변사의 두 곳으로 분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과도적인 시책이 채택된 것은 김좌근 계열의 안동 김씨 세력이 비변사를 거점으로 대원군 정권에 소극적이나마 대항세력으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변사를 축소·폐지하는 것은 김좌근 계열의 안동 김씨에 대한 정치적 도전이었으며 그들을 중앙정계에서 축출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러므로 비변사의 축소문제가 최초로 거론되었을 때 당시 영의정이던 김좌근은 명분론에 입각하여 의정부와 비변사를 양립시키는 선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잔존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종 원년 4월 그가 영의정에서 물러나고, 안동 김씨 문벌세력이 차츰 중앙정계에서 후퇴하면서, 비변사 폐지는 실행에 옮겨졌다. 비변사 기능 축소에 관련해 획기적인 조치가 취해진 시기는 고종 2년(1865) 3월이었다. 의정부와 비변사를 하나로 통합하되 비변사는 의정부의 조회 때 朝臣들이 임시 거처하는 대기실로 삼는다는 결정이 반포된 것이다. 비변사에 내렸던 ‘廟堂’이라는 현판은 의정부의 대청으로 옮겨 걸게 하였으며, 비변사의 印章을 영원히 녹여 없애고, 공문서 작성은 의정부를 頭辭로 삼을 것 등의 결정이 채택되었다.151)≪高宗實錄≫권 2, 고종 2년 3월 28일. 이것은 약 1년간 끌어온 비변사와 의정부의 양립상태를 없애고, 의정부를 명실상부한 국정 최고기관으로 확립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근거였던 비변사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중앙관제 개편과 함께 대원군이 취하였던 또 하나의 지지기반 강화책은 구 관료층을 퇴진시키고 신 관료층을 등용하는 것이었다. 먼저 안동 김씨 가문의 추종자로 간주된 관료들을 축출하였다. 고종 원년 초에 沈宜冕·沈履澤 부자가 탄핵을 받고 축출된 것은 그 사례였다. 이어서 김좌근 계열의 안동 김씨 세력이 퇴진하였다. 영의정의 직위에 있던 김좌근 자신이 이미 고종 원년 4월에 사직하였으며, 다음해 정월에는 영돈녕부사 김흥근도 은퇴하였고, 각조 판서를 역임하며 외척세도의 실질적인 대표자로 지목되던 金炳冀(김좌근의 아들)도 고종 원년 3월에 광주유수로 좌천되었다가 결국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대원군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널리 발탁하여 중앙 정계의 요직에 배치하였다. 대원군의 관료 등용정책은 세도정치 시기의 그것과 비교해 볼때 일정한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원군의 인사정책이 비록 세도정치 시기에 볼수 없었던 몇몇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인 현상일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종래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대원군이 등용한 신관료층의 사회적 구성을 세도정권 시기에 임용된 고위관료층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드러난다.

 먼저 대원군 집정기에 임용된 고위 관료층의 당파별 구성을 살펴보자. 순조·헌종·철종기(1800∼1863)는 주로 노론 출신의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행해지던 시기인데, 이 시기의 의정, 판서 취임자 총수는 256명이었다. 그 당파별 구성을 보면 노론은 162명(61.1%), 소론 81명(30.6%), 남인 14명(5.3%), 북인 8인(3%)이었다.

 이에 반해 대원군 집정기(1864∼1873)에는 의정, 판서의 취임자 총수가 139명이었는데, 그중에서 노론 78명(56.1%), 소론 34명(24.5%), 남인 12명(8.6%), 북인 13명(9.4%)이었다.152)糟谷憲一,<大院君政權の權力構造-政權上層部の構成に關する分析>(≪東洋史硏究≫49-2, 1990), 143·157쪽.

 양자를 비교해 보면 세도정치 시기에 비해 대원군 집정기에는 고위 관료층 속에서 남인과 북인의 비중이 다소 증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의 관계진출이 정국의 향방을 좌우하는 영향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전히 노론과 소론의 비중이 압도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원군 집정기에도 노·소론을 합한 숫자가 전체 고위 관료 가운데 80.6%를 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내 중요 직위에는 예외없이 노론이 취임하였다. 보기를 들어 재정의 중추를 쥐고 있는 호조판서와 선혜청 당상의 직위에는 거의 노론에 속하는 인사들만이 취임하였다. 게다가 여타 직위는 평균 재임 기간이 몇 달에 미치지 못하는 짧은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안동 김씨의 대표자 김병학은 고종 4년에서 9년까지 장기간 동안 영의정에 재임하였으며, 그의 동생 김병국도 1866년에서 1872년까지 6년 반 이상의 장기간에 걸쳐 호조판서 직위에 재임하였다.

 또한 대원군이 남인의 명분이나 의리론을 회복해준 사실도 없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원군은 그 동안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남인 및 북인을 등용하였으나 이들의 정치적 참여명분을 제공해주지는 않았다. 대원군 정권에 남인이 점차로 많이 등용되는 가운데 영남의 남인들이 남인 의리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직접 나서서 이를 저지하였다. 그는 남인에 속하는 관료층의 의리론 회복 움직임을 우호적인 설득이 아니라 강제력을 동원하는 위협적인 언사를 사용하여 진압하였다. 이것만 보아도 대원군 정권이 남인적인 성격이거나 사색당파를 고루 안배한 정권이라는 느낌을 받기는 어렵다.153)연갑수,<대원군 집정의 성격과 권력구조의 변화>(≪한국사론≫27, 서울大, 1992), 273쪽.

 대원군이 전 시기에 비해 남인과 북인을 어느 정도 더 많이 등용한 것은 사색당파를 고루 섞어서 조정에 세워놓아야 특정 관료집단의 일당 전제를 방지하고 왕권의 강화를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이 노론의 강인한 세력을 끝내 제거치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훗날 노론세력의 견제를 받고 정권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오히려 남인·북인을 고루 등용치 못하였던 것에 한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대원군 집정기에 임용된 고위관료들의 성씨별 구성을 살펴보자. 대원군 집정기인 1863년 12월에서 1873년 11월 시기에 재임하였던 3의정, 좌우찬성, 좌우참찬, 육조판서는 모두 141명이었다. 이들은 42개 본관, 24개 성씨의 출신자들이었다. 이 중에서 최대의 숫자를 점하는 성씨는 전주 이씨로서 전체의 12.4%를 차지하였고, 그에 뒤이어 안동 김씨가 10.1%를 점한다. 이밖에 대구 서씨, 남양 홍씨, 여흥 민씨, 진주 강씨, 평산 신씨, 기계 유씨, 해평 윤씨 등을 포함한 40개 姓貫이 이들 고위직을 점하고 있었다.154)안외순,<대원군집정기 인사정책과 지배세력의 성격>(≪동양고전연구≫1, 동양고전학회, 1993), 141∼143쪽.

 전주 이씨가 최대 다수를 점하는 현상은 대원군이 종친 선파인을 대동단결시켜서 이것으로 이씨 왕조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쌓으려 하였음을 말해준다. 안동 김씨 세도정권 시기에 전주 이씨는 고위 관료층 속에서 점하는 비중이 높지 못하였다. 보기를 들어 철종연간에 비변사 당상에 취임하였던 68명 가운데 전주이씨는 3명으로서 전체의 4%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로 미루어 볼때 대원군 집정기에 종친 선파 세력의 비중은 급격히 증대되었음이 명백하다.

 전주 이씨에 뒤이어 안동 김씨 문중 세력이 몰락하기는 커녕 제2위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철종연간에 비변사 당상에 취임하였던 고위관리 가운데 안동 김씨는 18%를 차지하였다. 대원군 집정기에 안동 김씨 세력이 고위 관료층 내에서 점하는 비중은 그 이전에 비교하면 다소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강력한 지배집단의 일원으로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대원군이 김좌근 계열의 안동 김씨 세력을 축출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안동 김씨 문중을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김병학 계열의 안동김씨 문중 세력은 대원군의 집권과정에 협력하였을 뿐 아니라 대원군 집정기의 전 시기에 걸쳐 그와 정치적으로 제휴하였던 것이다.

 결국 대원군은 종친 선파세력과 김병학 계열의 안동 김씨 세력을 양대 기둥으로 삼고, 전통적인 명문 거족인 40여 개의 여타 성관들을 대부분 그대로 온존시켜, 그들을 자체 정권의 지지 기반으로 만들었다고 볼수 있다. 몇몇 명문 거족의 고위 관리직 진출현상은 다소간의 등차 변화를 수반하기는 하였으나, 대원군 집정기에 와서도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변한 것이라고는 안동 김씨 대신 종친 선파인이 고위 관료층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대원군 집정하의 새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60여년간 정권을 독점해 온 외척 안동 김씨 세력까지를 포함한 종래 조선왕조의 명문 양반의 모든 씨족을 구태의연하게 재조직한 것이었다.155)成大慶,≪大院君政權性格硏究≫(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84), 36쪽.

 대원군의 인사정책에서 종래 세도정치 시기에 비교할 때 가장 이채로운 것은 종친 선파세력으로 하여금 고위 관료층 사회에서 주도권을 장악케 하였다는 점이다. 대원군은 집권 직후 세도정권 시기에 위축되어 있던 종친 선파세력의 지위를 강화하는 일련의 시책에 착수하였다. 그는 집정하자 곧 안동 김씨 정권에 의해 유배되어 있던 경평군 이세보를 방면하고, 종친부의 직제를 개혁하였다. 즉 宗簿寺와 宗親府를 통합하여 규모를 확대하고, 종친부 건물을 개축하였다. 또한 璿派 102派의 璿源譜 총 350권을 간행하고, 항렬을 통일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게다가 종친은 4대(嫡) 또는 3대(庶)가 지나야 관료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종래의 법규를 무시하고, 璿派儒生應製 또는 종친부 宗科라는 과거제도의 변칙적 운용을 통해 종친과 선파인을 집중적으로 발탁하여 단시일내에 그의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하였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의 후손인 璿派人들의 결속을 토대로 이씨왕조 체제의 재건을 도모하려는 대원군의 권력강화책의 일환이었다.156)成大慶,<대원군정권의 과거운영>(≪대동문화연구≫19, 1985).

 또한 중앙관서 중에서 군사 및 경찰권에 관련된 중요한 직위에 선파출신의 무관을 대거 등용하였다. 선파중에서 무관 집안으로 이름난 茂林君派에서 李圭徹·李鍾承 부자를, 孝寧大君派에서 李景純·李鳳儀 부자를, 桂成君派에서 李南軾·李章濂 부자를, 德陽君派에서 李周喆을, 廣平大君派에서 李景夏를 발탁기용하였다. 이것은 조선왕조 후기의 역대 세도정권이 각기 병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문중에서 중요 직위에 부임케 하였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보기를 들면 철종년간 안동 김씨 세도정권 하에서 총융사·어영대장·훈련대장·금위대장 등의 직위에 오른 자들은 김좌근·金汶根·김병기·김병국 등 김씨 일족이었다. 또한 대원군 실각 후 도통사·총융사·금위대장·친군통위영사 등 병권을 쥘 수 있는 직위에 오른 자들은 민겸호·민태호·민영익·민영휘 등의 민씨 일족이었다.

 이와 같이 고위 관료층에 대한 인사권을 통해 중앙정계에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히 포치한 대원군은 일선 각 행정기관의 실무자층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추진한 각종 시책을 실무차원에서 보조하였다.

 운현궁의 家令과 京外 胥吏 등이 그에 속하였다. 운현궁의 가령으로는 소위 ‘천하장안’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패거리(千喜然·河靖一·張淳奎·安弼周)가 유명하였다. 이들은 정계의 동정을 비롯하여 궁중내의 동태, 시정인의 민심동향 등을 소상하게 조사하여 대원군에게 보고하는 정보망의 역할을 하였다. 이에 덧붙혀 公事廳 內侍인 李敏化도 대원군의 수족이 되어 활약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행정실무에는 밝으나 신분이 미천한 사람들로서 이전에는 주로 유력가문의 영향 아래 있었다. 대원군이 집권 초기부터 각 지방의 세세한 정보까지 정확하게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원군 집정기에 이들이 직접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대원군은 노련한 전문행정가인 중인신분 가운데서 명민한 자를 골라 의정부와 육조를 비롯한 중앙관서에 배속시켰다. 보기를 들면 형조집리에는 吳道榮을, 호조집리에는 金完祖와 金錫準을, 병조집리에는 朴鳳來를, 이조집리에는 李繼煥을, 예조집리에는 張信永을, 그리고 의정부 八道都執吏에는 尹光錫을 배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吏胥 집안의 후손으로 각 방면의 행정을 잘 아는 중인층으로서 대원군 정권의 지지기반이 되었다.157)朴齋炯,≪近世朝鮮政鑑≫上(1886), 18∼19쪽.

 대원군은 지방 행정관서의 서리층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포섭하였다. 대원군은 8도의 監營과 四都의 留守營門의 서리들과 기맥을 통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름있는 지방 아전으로는 전라감영의 아전 白樂瑞·白樂弼 형제, 경상 감영의 아전 徐殷老 등이 있었다.

 대원군은 중인서리층을 지배권력 강화에 활용하고 있을 뿐, 신분제도를 타파하여 능력에 따라 양반관료와 차별없이 고관현직에 발탁하는 제도적 변혁을 꾀한 적은 없었다. 이들 서리층 또한 행정대리인으로서 실리를 도모할 뿐 그들의 신분적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종래와 마찬가지로 행정실무자로서의 특권을 이용하여 중간착취적 기능을 발휘해서 막대한 부를 축재하는 일에 몰두하였을 뿐이다. 중인계급 또는 향리를 포함한 하급 이속층에서 근대시민적 성격을 갖는 새로운 지식계층이 대두하는 것은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였다. 대원군의 집정 초기에는 아직도 선진적 지식인 계층으로서 민족사적 과제를 담당해 낼 힘은 그들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한편 대원군은 지방차별을 없애는 인재등용을 하였다고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대원군 집정 10년간에 송도인으로 실직에 등용한 사람은 王庭楊, 王性協 부자 뿐이었다. 평안도의 경우에는 과거에서 지역별로는 가장 많은 인원수의 급제자를 배출하고 있으면서도 이들 등과자를 실직에는 임용하지 않는 ‘收用法’을 적용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대원군이 인재등용의 문을 개방하여 지역적 차별을 철폐하였다는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 즉 고려왕실의 잔존 후예를 우대한다는 명분을 걸어 개성지방의 민심을 수렴하려 하였을 뿐 이밖에 따로 서북인을 고위관료로 기용한 사실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지배자의 자의로 몇몇 인물이 특별히 발탁되었다 하더라도 계급적·지역적 차별을 철폐하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상의 개혁이 수행되지 않은 이상, 이것으로 대원군의 인사정책을 높이 평가할 것은 못되는 것이다.

 결국 대원군 집정기의 인사정책의 본질은 외척 벌열의 세도정치 시기의 그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농민층의 저항으로 인해 쇠잔해진 봉건지배층을 재조직하고, 이와 함께 그들의 실무자인 하급 관리 및 중인서리층을 포섭하였다. 특히 조선왕조의 흥망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종친 선파인을 단시일내에 육성, 재편성하여 이들에게 중앙과 지방의 군사력과 경찰력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정권의 중추세력으로 만들었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포함한 기존 세력을 제거하기는 커녕 이들과 연합하여 왕조체제를 재건하려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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