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2. 대원군의 내정 개혁
  • 3) 재정, 군사제도의 개혁

3) 재정, 군사제도의 개혁

 대원군은 철종 말년에 전국적 규모로 발발한 임술민란에 의해 야기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집권자의 자리에 올라선 정치가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민란을 수습해서 종식시키는 것이 요구되었다. 또한 그는 집권과 동시에 텅빈 국가재정을 떠안게 되었다.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향촌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그에게 부과된 임무였다.

 이 때문에 대원군은 재정·경제정책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는 집정 직후 호조판서로 재직하고 있던 안동 김씨의 중심 인물인 김병기를 물러나게 하고 종친 선파인 李敦榮과 李䆃重으로 하여금 호조판서와 참의에 임관 기용하여 이를 장악하였다. 다른 各司의 장관은 빈번하게 교체하면서도 호조판서만은 2년 이상이나 교체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1862년 임술민란 당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세제도에 대해서 그 운영을 개선하고 제도를 일부 개혁하였다. 대원군 정권의 부세정책은 1862년에 설치된 三政釐正廳의 대책을 대체로 따르는 것이었다.161)김용섭,<조선후기 부세제도 이정책>(≪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상, 일조각, 1982).

 대원군 정권은 田政의 정비를 위해 전국적인 査結作業을 시행하였다. 그를 통해 토호, 지방 서리들의 隱漏結을 대대적으로 적발하여 收稅結로 편입하였다. 이 작업은 운현궁에서 직접 개입하여 추진하였는데, 전 시기에 비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사결 작업의 성과를 토대로 일부 지역에 量田을 시행하였다. 양전이 시행된 곳은 강릉·동래·언양·영산·안악·평산·문화·영광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신 양안에 기초한 田政이 운영되기도 하였다. 세도정권기에도 일부 지역에서 양전이 행해진 바 있으나, 구양안보다 신양안의 수세량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아, 결국 양전사업이 별 효과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반해 대원군 집권기에는 양전 결과 수세결이 크게 늘어나, 정부에서도 양전사업의 결과를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원군은 吏胥輩의 作奸을 징치하는데 힘썼다. 예를 들면 집권 직후 그는 황해도 지방 궁장토의 결세를 수납하던 중간관리자인 都捧色과 導掌을 혁파하고, 그 대신 지방관청에서 직접 수봉하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그는 각도에서 전곡을 상납할 때 경사차인으로 하여금 수송하게 하던 것을 지방장관이 직접 주관하도록 함으로써 중간 작폐를 막고자 의도하였다.

 대원군 정권은 還政의 정상화를 위해 전국적인 虛留 환곡의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20여 만 석에 달하는 포흠곡을 탕감하고 각 도별로 환곡 총수를 지정하며, 평안도와 충청도 지역에서는 환곡을 폐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조치는 재정운영의 변화를 초래할 만큼 큰 변화였다.

 그러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국방비 부담이 격증하는 상황이 빚어지자 부득이 환곡제도를 부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66년 내탕금 30만냥을 기초로 삼남과 해서·호서지역에 분급된 丙寅別備穀, 그 이듬해 당백전 150만 냥을 기초로 전국에 분급된 戶曹別備穀이 그것이다.

 호조별비곡이 마련됨과 동시에 새로운 운영방식으로서 社倉制가 도입되었다. 고종 4년에 실시된 사창제는 삼정 가운데 가장 문란한 것으로 지목되던 還穀制 대신 시행된 것이었다. 이때 의정부에서 정한<社倉節目>에 따르면 다음 두가지 점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 첫째 향촌민들이 면단위로 社首를 뽑아 사창을 스스로 운영·관리케 함으로써 이속의 간여를 배제시켰다. 둘째 동리의 대소빈부를 헤아려 환곡을 차등 분배하되 반상을 가리지 않고 헤아려 등분케 함으로써 편중되거나 불공정한 폐단이 없도록 한 점이다.

 이는 환곡의 운영을 민간에 맡기는 것으로 胥吏의 중간수탈을 예방하고자 한 조처였다. 이처럼 복구된 환곡제도는 그전과 달리 중앙에서 일률적으로 원곡을 관리하고, 민간에 그 운영을 맡기게 됨으로써 그전에 비해 수탈적 성격이 크게 완화된 것이었다.

 다음으로 軍政의 정비를 위해 대원군 정권이 취한 정책에 대해 살펴보자. 대원군 집정 당초에는 洞布制라고 불리는 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다. 동포제란 한 동리의 민인이 귀천의 구별없이 軍布契를 조직하여 모두 出錢하고 利殖하여서 이것으로 자기 동리에 부과된 군포를 납부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군정이 문란해지자 백성들이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로 고안해 낸 자위적 대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동포제는 관청에서 강제하지 않아도 쉽사리 향촌사회에 수용되었다. 그래서 이미 철종 말년, 고종 초년에 널리 시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 정권은 1871년에 동포제를 발전시켜 이를 호포라고 개칭하고 과세균등을 내세워 계급여하를 불문하고 매호당 2냥씩 균일하게 부담시켰다.

 戶布制는 양반호와 상민호의 구별없이 군포를 받자는 것으로 조선왕조 후기에 이르러 그 채택 여부가 정부 당국자에 의해 계속 논의되어 왔었다. 조선 봉건왕조의 軍役制의 구조적 특질은 신분제를 고수하여 常民에게만 군역을 지도록 하는데 있었고, 또한 일정 군액수를 공동 부과하여 책임 상납토록 하는데 있었다. 왕조 후기에 이르면 두 차례의 참혹한 전란과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봉건사회의 신분제가 동요·해체되고, 따라서 군역민의 신분 변동이 피역 또는 농민저항의 현상을 야기시켰다. 공동체가 부담해야 할 군액은 일정한데 신분의 상승이라든가 가렴주구에 못이겨 도주자가 발생하면 이 피역자의 세액까지 공동체의 다른 농민이 부담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소위 白骨徵布·黃口簽丁·隣族侵徵의 군역 폐단이 생기고 이것이 민란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조 역대의 관료와 지식인들이 군역의 개혁 문제에 대해서 많은 논란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호포법 실시에 대한 찬반 양론은 끊이지 않았다. 호포론자들의 입장은 국가경비와 군국지용의 부족에 관계되는 일이니 양반에게 수포하여 농촌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요, 호포 불가론자의 입장은 봉건사회의 상하귀천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분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호포법은 대원군이 양반과 양민을 평등하게 하려는 유토피아적 생각으로 실시한 것이 아니라,162)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Mass, 1975), p.86. 단지 구래의 군역제도를 개편하여 조세납부자층을 양반층까지 확대시킨 세원확장정책이었다. 대원군이 실시한 호포법은 구래의 군역법을 타파하고 새로운 제도로서 신설한 것이 아니라 향촌사회를 봉건적 수취단위로 한 구래의 동포징수의 방법을 그대로 온존시켰으며 양반과 양민간의 세액의 차등까지 둔 불완전한 세제였다. 대원군은 다만 양반지주층의 특권적 면세를 철회시킴으로써 불만에 찬 농민층에게 구원자로서의 환상을 심어서 민란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포법은 민란을 통한 농민층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정책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농민들이 민란을 통해 쟁취한 전리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시행된 호포제는 신분에 따라 군포 부담량의 차이가 현저한 것이 아니어서 하층 농민의 부담은 양반층에 비해 과중한 것이었다.

 대원군 정권의 부세 운영 개선노력은 이전 시기의 삼정운영의 문란상을 다소나마 수습한 것이었으나, 당시의 수취관계의 모순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운영상의 개선에 불과한 조처였다. 당시의 향촌사회에서는 부세운영의 금납화, 부세의 토지집중, 공동납세의 강화라는 현상이 강화되면서, 부세 수탈의 토대가 자연경제와 신분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상품화폐경제에 기초하는 것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대원군 정권이 취한 조치만으로는 부세수취와 상납을 장악한 수령과 서리의 중간수탈을 완전히 제어할 수 없었다.

 더 근본적으로는 당시 수취관계의 모순이 단지 국가의 농민지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봉건적 소유관계의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봉건적 수취관계 모순의 완전한 해결이란 결국 봉건적 토지소유의 철폐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세운영의 개선책은 일시적인 효과만을 거두었을 뿐, 향촌사회의 지속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해결책은 결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대원군 집권기의 재정 개혁은 두 차례의 양요로 인한 군사비용의 증가와 경복궁 중건사업에 따른 재정수요 증대로 인해 점차 그 내실을 잃어갔다.

 대원군이 집권 이후 힘써 추진하였던 시책 가운데 하나는 군사제도의 개혁이었다. 집권 초기 대원군이 군사제도 개혁에 착수한 동기는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나왔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이러한 목표는 대원군의 중앙관제 개혁을 통해 실현되었다. 즉 비변사를 해체하고 의정부를 최고 권력기관으로 복원하였던 것이다.

 비변사의 해체는 군사기관의 새로운 정비를 필요로 하였다. 중앙 군사기구의 정비는 비변사를 대신하여 군국기무를 전담할 군령기관인 三軍府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다.

 원래 ‘삼군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의 ‘義興三軍府’에서 유래하였다. 의흥삼군부는 고려 말의 삼군통제부가 개편된 것으로서 태조 2년(1393)에 성립되었다. 삼군부의 부활은 고종 5년에 이루어졌다. 그 해에 대원군은 삼군부를 부활하고 그것을 정일품 아문으로 승격시켰다.

 삼군부가 관장한 군국사무는 이전에 비변사가 행사하던 기능들과 거의 동일하였다. 삼군부는 실질적인 최고의 군령기관으로 군국사무를 전담하였다. 왕의 陪扈와 궁성의 호위, 국경의 수비, 군사비 마련과 군수지원에 관한 사무, 수도의 치안도 삼군부가 총괄하였다.

 삼군부는 치안 및 군사에 관련된 屬司를 두고 있었다. 병기제조를 주관하는 軍器寺, 왕의 행차시 한강의 浮橋를 담당하고 호남·호서의 조운을 맡아보는 舟橋司, 도성의 하천을 관리하는 濬川司, 훈련원, 좌·우포청, 左·右巡廳 등의 기관이 그것이다.

 대원군 집권기 삼군부의 제조 및 유사당상으로 임명된 인사들은 무과 출신의 전문군인과 종친, 그리고 친대원군 계열의 무신들로 구성되었다. 척족 문벌세력은 거기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삼군부의 유사당상으로서 중앙군영을 지휘하였던 고위 무관직은 훈련대장·금위대장·어영대장·총융사 등 4군영의 대장들이었다. 대원군 집정기에 중앙군영의 대장으로 등용되었던 인물은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무과 출신의 무반이었다. 자신의 본가뿐만 아니라 외가나 처가까지도 무반 가문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들은 대부분 대원군 집권기에 발생한 두번의 양요에 참전하였다. 병인양요 당시 훈련대장이던 李景夏, 어영중군 李容熙, 총융중군 李元熙, 순무천총 梁憲洙, 총융사 申觀浩[申櫶], 강화유수 李章濂은 대원군 집권기에 중앙군영의 대장직에 등용되었다. 또 이들은 경복궁 중건사업에도 참가하였다. 훈련대장 任泰瑛, 금위대장 이경하, 어영대장 許棨, 총융사 李顯稷, 우포장 李周喆 등이 영건도감제조로 임명되어 경복궁 중건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들은 경복궁 중건사업에 대한 공로로 특별히 加資되었다. 이들 가운데 4명(이경하·이주철·이규철·이장렴)은 종친이었다.

 삼군부는 의정부에 비견되어 ‘武府’라고 일컬어졌다. 대원군은 이 ‘무부’를 통하여 자신이 의도하는 정책을 추진하였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굳혔다. 대원군 집권기 ‘무부’ 확립에 내포되었던 이같은 정치적 의도는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고 대원군이 실각한 뒤로는 무위로 돌아갔다. 고종 친정 후 대원군 집권기에 활약하였던 무신들은 각 중앙군영의 대장직에서 후퇴하였으며, 외척들이 그 자리에 진출하여 삼군부 운영에 참여하였다.

 대원군은 자신의 집권기간 동안 무신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이들을 자신의 주요한 정치적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대원군 집정기 동안 모든 군영의 대장은 모두 무신으로만 임명되었으며, 종래 문신들이 독점하던 병조판서 직도 문·무신이 번갈아 임명되었다.

 고종 3년(1866) 4월에는 종2품이던 군영의 대장들을 판서와 같은 격인 정2품으로 높였다. 같은해 8월에는 무신의 체통을 높여줄 목적으로≪三班禮式≫을 편찬하였는데, 그 서문은 대원군 자신이 직접 썼다.

 고위 무신으로 하여금 이권과 연관된 중요 직위에 진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보기를 들면 호남과 호서의 조운권을 장악하고 있던 舟橋司 당상직은 종래 세도정권 시기에는 척족 계열의 인사들이 임용되었는데, 대원군 집권 기간동안에는 무신들이 독점하였던 것이다. 주교사 당상은 유력한 경강상인과 결탁할 수 있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조선 후기에 각 군영은 무장부대를 지휘할 뿐만 아니라 군포를 수납하거나 화폐를 주조하는 등의 권한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권력자들은 각 군영을 자신의 세력 아래에 두기 위해 힘썼다. 대원군도 수도 방위와 정권 보위의 임무를 띠고 있던 친위군영을 정비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세도정치 하에서 국가방위 기능을 상실하고 척족 문벌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던 훈련도감은 병인양요를 계기로 수도방위를 위한 주요 군영으로 전환되었다. 훈련도감 군대에 부여되었던 국왕 경호 임무를 면제한 대신에 포병과 보병에 대해 엄격한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배려되었다. 또한 장비와 군수지원이 강화되었다. 그 대장직에서 척족세력들이 철저히 배제되고 무과출신 무신들이 등용된 것은 이같은 개혁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조치였다. 대원군 집권기 훈련도감의 정비는 군사적인 측면과 정치적 측면의 두가지 목적이 있는 조치였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도성에 상주하는 군사력인 훈련도감 군대를 정예화하려는 것이었고, 정치적으로는 훈련대장 직에 대한 세도문벌 출신들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왕권약화와 더불어 허실화되었던 龍虎營도 대원군 집권기에 그 권한과 지위가 보장되었다. 용호영은 국왕 친위의 禁軍이었다. 용호영 군대의 임무는 국왕의 侍衛와 陪扈 및 궁궐호위를 위한 入直과 儀仗이었다. 용호영의 책임자인 禁軍別將의 지위와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병조판서의 지휘만을 받았다. 병조판서의 권한도 강화되었다. 임기가 2년으로 보장되었고, 수하 친병인 牙兵이 설치되었다. 대원군 집권기에 병조판서 직위에는 친대원군 계열의 인물만이 임명되었다. 용호영의 강화 조처는 결국 대원군이 의도하는 왕권강화를 이룩하고, 동시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163)金世恩,<대원군집권기 군사제도의 정비>(≪한국사론≫23, 서울대, 1990), 293∼303쪽.

 대원군 정권 시기에 군비가 본격적으로 확충된 것은 1866년 병인양요를 거친 뒤부터였다. 군비조달을 명분으로 새로운 특별세가 부과되고, 거기서 염출된 재정은 각 군영을 비롯하여 무장이 장악하는 군사기관에 할당되고 있었다.

 보기를 들면 고종 8년(1871) 황해도 수영의 포군 설치를 위해 각 포구의 수세권을 황해수영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경복궁 중건을 위해 거두기 시작한 원납전을 그 이후에도 계속 징수하였는데, 이는 군비조달이라는 명분하에서 이루어졌다. 실제로 고종 6년에 지방 주둔 군대내에 砲軍을 설치하였는데 그 재원은 원납전에 의해 충당되었다.

 또한 서울 도성내에 반입되는 물품에 대해 통행세를 징수하였다. 대원군은 고종 4년 2월 서울의 각 군영으로 하여금 도성 문에서 수세하여, 그 稅錢으로 군영의 비용에 보태게 하였다. 정확하게 수세된 내용을 알수는 없으나 어영청이 관할하던 흥인문과 혜화문을 합친 수세액은 연평균 8,500냥 가량이었다. 이로 미루어 추정한다면 당시 4군영에서 수세하였으므로 수세액은 연간 약 3만 냥 가량이었을 것으로 보인다.164)연갑수, 앞의 글, 243쪽. 당시 한성 5部의 호구수는 4만 5,646호, 약 20만 명이었는데, 이 성중 인구의 생활은 도성문을 통과하는 물자에 의존해서 이루어졌다. 도성인과 성외 농민, 상인들에게 다같이 불편과 고통을 주었던 이 특별세는 대원군이 실각하는 고종 10년(1873) 10월까지 계속 존속하다가 대원국 실각 후 혁파되었다.

 이 시기 군비확장을 위한 재원 확대정책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강화도 포군을 위한 포량미였다.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직후에는 강화도에 약 3,000∼4,000명의 병력을 항상 주둔시키기 위해 새로운 특별세가 결정되었다. 沁都砲糧米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전국의 出稅結 총 70만 결에 각 결당 1두씩을 첨부해서 총 5만 석 가량을 매년 수세하는 것이었다. 그외에도 송도의 수삼세전 6만 냥 및 선혜청 등의 재정을 강화도의 군비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대원군 집정기의 군비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실질적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대원군은 집권하면서부터 서구열강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방체제를 정비한 적도 없었으며 심지어 봄가을의 군사 조련마저도 시행하지 않았다. 보기를 들면 고종 5년(1868)에서 고종 10년까지 6년 동안 군사훈련은 한 차례도 실시되지 않았다. 훈련 정지 사유로는 오랫동안 정지하였던 군사훈련을 실시하려고 장정을 징발하게 되면 백성들이 불만을 품게 된다든가, 농번기이므로 농사에 지장이 있다든가, 무기가 부족하다는 점 등이 거론되었다.165)崔炳鈺,<고종대의 삼군부 연구>(≪군사≫19, 1989), 65쪽.

 게다가 대원군에 의해 장려된 신무기 개발 노력도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서양식 모형을 본뜬 대포를 제작하였으나 거기에는 운반시설이 결여되어 있었고, 통나무 위에 고정되어 있거나 포대위에 부착되어 있었다. 또한 申櫶이 제작하여 상을 받기까지 한 水雷砲 역시 이후 다시 그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효과는 별로 뚜렷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서양식 기선을 본떠 鐵船을 제작하였으나, 선체는 무거운데 증기력이 약해 움직이지 않았다. 배를 물에 띄우고 불을 당겼으나 배의 속도가 극히 더뎌서 한 시간 동안에 겨우 십여 보 정도를 떠갔을 뿐이었다.

 결국 대원군 정권의 군사적 기능의 강화는 외래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정치적 반대파 세력을 억누르고 정권의 무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당시 반봉건 농민세력이 점차 폭력적인 양상을 띄고 신장되고 있는 사실에 대응하기 위한 의미가 더 컸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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