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3. 대원군의 대외정책
  • 1) 러시아의 남하 방어책

1) 러시아의 남하 방어책

 19세기 후반기 제정 러시아는 이른바 동방정책을 적극 추진, 마침내 北京條約(1860)에 의해 沿海州를 획득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러시아는 연해주를 남진정책의 군사적 근거지로하여 한반도에로의 진출을 기도하였다.

 러시아인이 한반도에 처음으로 나타나기는 1864년 3월 20일(음 2. 13)이었다. 이날 러시아인 5명이 두만강을 무단으로 건너 慶興府에 와서 서신을 전했는데, 경흥부사 尹日夾이 서함을 열어보니, “아라사인으로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이에 대한 회답을 바란다”라는 내용이었다.168)≪各司謄錄≫권 42(國史編纂委員會, 1990), 갑자 2월, 55쪽. 이에 경흥부사는 외국과의 통상여부는 일개 지방관이 마음대로 허락할 수 없는 중대사라는 이유로 그들을 타일러 돌려보냈다. 함경감사 李裕元은 경흥부사로부터 러시아인의 통상요구사실을 보고받고, 즉각 서신원본을 정부에 보고하면서 러시아 침략에 대한 대응책 강구를 촉구했다.169)≪高宗實錄≫권 1, 고종 원년 2월 28일.
≪承政院日記≫고종 1, 고종 원년 3월 2일.
李能和,≪朝鮮基督敎及外交史≫(朝鮮基督敎彰文社, 1928) 하, 169∼170쪽.

 이에 정부는 ‘아라사’라는 나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연행사절편에 러시아에 관한 정세탐문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수역 李尙迪의<首譯別單>(1864. 5. 23)에 의하면, “양이(영·불)들이 황성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아라사인과 聲氣가 서로 통하더니 거리낌없이 왕래하고 있다. 아라사 오랑캐들은 그 세력을 빙자하면서 점차 중국을 능멸하고 모욕하고 있다. 요사이 아라사 오랑캐는 그들의 관사를 넓히고자 민가를 강제로 매입함에 백성들은 이를 보다못해 議政王에게 공소하였으나 왕은 그 어떤 흔단(전쟁)이 발생할까 염려되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결단을 내리지 못한채 주저하고 있다”170)≪同文彙考≫(國史編纂委員會, 1978) 권 4, 3822쪽, 「告訃請諡兼承襲奏請行首譯李象迪聞見事件」.라고 북경에서의 러시아인의 동정에 대하여 자세히 전하고 있다.

 연행사절편으로 입수한 아라사의 정세를 분석해보면, 러시아인들은 皇城에서 조차 방약무인하게 침략적 활동을 자행하고 있으며, 러시아와의 접경지대는 러시아의 침략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원군은 섭정 첫해를 맞이하여 그 자신의 위엄을 내외에 선양하는 길은 외세침략에 대한 강경한 대응책수립이 급선무라 판단, 마침내 러시아 남침을 억지하겠다는 防俄策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대원군은 이유원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러시아인이 방자하게도 국경을 함부로 넘나들면서 통상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은 필시 내국인중 和應者가 있다고 보고, 내응자 색출을 긴급 지시하면서 러시아와의 통상관계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71)≪高宗實錄≫권 1, 고종 원년 3월 2일.
≪日省錄(고종편)≫권 1(서울대출판부, 1972), 고종 1년 3월 2일.
이에 함경도 관찰사 이유원은 러시아인 서신 투척시 화응 연루인 金鴻順·崔壽學 등 2명을 색출하여 국경침범을 내조한 ‘犯越罪人’으로 단죄, 6월 18일 두만강가로 끌어내어 처형하고 이를 강두에 효수했다.172)위의 책, 152쪽, 고종 1년 5월 15일.
李能和, 앞의 책, 하, 170쪽.

 1865년에 이르러 러시아인의 국경침범은 한층 빈번해졌다. 이해 10월 31일 러시아인 수십 명이 작당하여 두만강을 건너옴에 일행중 청국인 한 사람이 ‘아라사 공문서’를 내보이면서 이 문서를 경흥부사에게 전달하러 왔다고 언명했다. 이에 경흥부 관리는 외국인이 함부로 국경을 침범하는 것은 범죄행위라고 설명하면서 이들을 되돌려보냈다.

 12월 18일에는 러시아인 3명이 같은 목적으로 경흥부에 들어왔으나 이들을 달래어 보냈다. 12월 28일에는 말을 탄 러시아인이 보졸을 거느리고 각기 장총으로 무장하고 들어옴에 국경을 넘어온 연유를 물어보니 역시 통상을 요구하는 공문서를 전달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경흥부 관리는 러시아공문서를 대신 경흥부사에게 전달하겠다고 말하면서 한사코 출입을 저지하자, 그들은 이 공문서에 대한 조선정부의 회답을 받으러 15일 이내로 다시 방문하겠다 하므로 90일 이내로 재방문할 것을 통고하자, 그들은 난색을 표하면서 되돌아갔다.173)≪龍湖閒錄≫(國史編纂委員會, 1979) 권 3, 480∼481쪽, 925:北伯狀啓. 경흥부사 윤협은 러시아의 통상요청사실을 함경감사 金有淵에게 보고했고, 김유연은 이를 정부에 보고하면서 대책수립을 촉구했다. 이와 같이 1864∼1865년 두 해 사이에 러시아는 네 차례나 국경을 함부로 넘나들면서 통상을 요청하는 등 豆滿江 변경지방의 국방 방위가 불안해짐에 따라 러시아의 한반도 침략위협에 대한 방아책수립이 당면과제로 대두되었다.

 1783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간 李承薰이 이듬해(1784)에 북경 천주교당에서 프랑스 예수회 그랑몽(Jean-Joseph de Grammont) 신부에게 영세를 받음으로써 로마 가톨릭교(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었다. 朱子學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전통질서를 고수하는 衛正斥邪派는 천주교를 邪敎로 단죄하면서 포교를 전면 거부했고(斥邪), 조선정부는 대금압령을 내려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辛亥珍山事件(1791)·辛酉邪獄(1801)·己亥邪獄(1839) 등 세 차례의 대금압령에 의해 천주교는 거의 발본색원되었다. 그러나 1845년 다블뤼 주교가 金大建의 안내로 해로를 통해 밀입국한 것을 시작으로 1866년까지 프랑스 예수회 소속 선교사는 주교 2명, 신부 10명 등 총 12명이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로써 천주교 신자수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왕실에까지 전도되어 府大夫人 閔氏(대원군 부인)·국왕의 유모 朴氏 등도 독실한 천주교신자가 되었고, 전국적으로 신자수는 대략 2만 3천 명에 이르고 있다.174)≪高宗時代史≫권 1(國史編纂委員會, 1967), 고종 3년 1월 21일∼2월 7일, 182∼189쪽.
샤를르 달레 저, 安應烈·崔奭祐 역주,≪韓國天主敎會史≫하(분도출판사, 1980) 385∼485쪽.
朴齊炯저, 李翼成역,≪近世朝鮮政鑑≫(탐구당, 1981), 56, 153쪽.
≪근세조선정감≫에는 “信者數十萬人”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과장된 숫자이기에 신빙성이 없다. 병인사옥 당시 조선에서 선교활동중인 프랑스 선교사는 다음과 같다. 괄호안 숫자는 입국연도이다. 주교 2명:다블뤼(Daveluy, 1845)·베르뇌(Berneux, 1855), 신부 10명:뿌르띠에(Pourthié, 1856)·쁘띠니꼴라(Petinicolas, 1856)·오매트르(Aumaître, 1863)·위앵(Huin, 1865)·브르뜨니애르(de Bretenières, 1866)·볼리외(Beaulieu, 1866)·도리(Dorie, 1866)·리델(Ridel)·페롱(Féron)·깔래(Calais).

 원래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해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집정초기에 두만강 변경지방에로의 러시아의 남침기도, 그리고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 선교사의 배후에는 일찍이 애로호사건(1856)으로 청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프랑스제국의 군사적 위력, 가능한한 러시아의 남침기도를 프랑스 세력을 이용, 以夷制夷策으로 견제하는 것이 현명한 방아책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원군은 함경감사로부터 러시아의 통상요청 사실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만약 프랑스 선교사들이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낼수만 있다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175)Charles Dallet,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Paris, 1874), vol. 1, p.502.
≪한국천주교회사≫, 앞의 책, 하, 360쪽.
라고 언명했다.

 이제 천주교 지도자 洪鳳周·金勉浩(季浩)·李惟一 등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치개입으로 러시아세력을 막아줌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최선책이라 결론을 내리면서 방아책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현재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 선교사를 이용, 대원군이 고민하고 있는 러시아의 남침기도를 봉쇄하는 방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방안이 채택된다면 조선으로서는 프랑스 세력에 의해 러시아의 한반도침략을 막을 수 있겠고, 프랑스와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러시아 남침저지의 대가로 ‘천주교 포교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호혜적인 조치라고 판단, 드디어 대원군에게<방아책 건의문>제출방안을 교섭하게 되었다. 홍봉주 등은 교섭통로의 인물로 부대부인 민씨·유모 박씨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홍봉주·김면호 등은<방아책 건의문>이 채택된다면 프랑스선교사로서는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호기일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의 ‘신앙의 자유’가 실현된다는 일석이조의 정치적 효과를 거둘수 있다고 낙관하였다. 이들은 당초에는 프랑스 세력만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애로호사건 때 영·불 연합군이 북경침공을 벌인 사실을 감안, 방아책을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하여 영국 세력까지 끌어들이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리하여 홍봉주 등은 러시아 남침세력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조선이 영·불 양국과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마침내<한·영·불 3국동맹안>을 바탕으로한<방아책 건의문>을 작성, 대원군에게 전달하기로 결의하였다. 홍봉주는 이 건의문을 趙基晉(대원군 사돈)을 통해 대원군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같은 방아책에 대해 처음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홍봉주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 승지 南鐘三은 유모 박씨에게 부대부인으로 하여금 국면전환의 전기를 마련할 것을 당부했다. 이에 부대부인은 남종삼에게 “왜 가만히 있는거요. 러시아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나라를 빼앗으려 하는데, 이 불행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주교뿐인데도 그가 지방순회길에 떠나는구려. 내 남편에 올리는 편지를 쓰시오. 성공할 것이오”라고 격려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남종삼은 격식을 갖춘<새 건의문>을 작성, 직접 대원군을 면알하여 바쳤다. 의외로 대원군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천주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점을 제외하고는 敎理가 진실하다고 전제하면서, “과연 베르뇌 주교가 러시아의 조선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느냐”라고 다짐하자, 남종삼은 “확신한다”라고 단언했다. 이에 대원군은 하루 속히 지방순회중인 주교를 상경시켜 자기와 방아책을 협의하자고 제언했다. 이제 조선의 천주교 지도자들은 대원군의 긍정적인 반응에 고무되어 신앙의 자유를 누릴 미래가 도래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심지어 성급한 신도들은 서울에 굉장히 큰 성당을 건설할 계획을 구상하기도 했다.176)Dallet, ibid., vol. 1, p.522.
≪한국천주교회사≫, 앞의 책, 하, 387쪽.
李能和, 앞의 책, 하, 3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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