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3. 대원군의 대외정책
  • 4) 신미양요와 대응책

4) 신미양요와 대응책

 1866년 8월 제너럴 셔먼호 소파사건은 미국이 한반도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된 일대 전기가 되었다. 셔먼호는 원래 미국선적으로서 중국 천진에 기항했다가 영국 메도우즈(Meadows)상사와 용선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셔먼호는 영국상사에 위탁되었다. 이리하여 메도우즈상사는 조선과 통상교역할 서양상품을 잔뜩 적재하고 1866년 8월초 芝罘를 출항 조선으로 항진했다. 셔먼호의 구성원을 보면, 선주 프레스턴(W. B. Preston)·선장 페이지(Page)·항해사 윌슨(Wilson)등 미국인 3명, 통역 및 개신교목사 토머스(R. J. Thomas)·화물관리인 호가스(Hogarth) 등 영국인 2명, 중국인·말레이 선원 19명, 총 24명이었다.

 셔먼호는 때마침 장마비로 불어난 大同江을 소항, 平壤에서 통상을 강요하면서 중군 李玄益을 납치하는 등 도발적 약탈행위를 자행함에 평양감사 朴珪壽의 火攻작전에 의해 선체는 소파되고 승무원 24명 전원이 몰살되는 참극이 발생했다. 셔먼호는 선주가 미국인이지만 메도우즈상사와 용선계약으로 계약기간에는 법률적으로 영국상사 소유라는 것, 시종일관 셔먼호의 실질적인 주역은 토머스 목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건발생 후 영국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미국은 선주가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적극적인 강경반응을 보였다. 셔먼호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조선개항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대한 입약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미국은 셔먼호소파사건 발생의 진상을 탐문하는 정찰원정을 즉각 단행했다. 1867년 1월 슈펠트(R. W. Shufeldt, 薛斐爾)는 와추세트(Wachusett)호로 서해안 甕津灣일대를 탐사하고 조선을 응징하는데는 무력행사에 근거한 해결책(a solution based on force)만이 최선책이라 강조하면서 대한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 실시를 강력히 촉구했다.202)Shufeldt Letters(1866∼1887), Library of Congress, Shufeldt to Bell, January 30, 1867.
F. C. Drake, The Empire of the Seas, A Biography of Rear Admiral Shufeldt(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4), pp.96∼98.
이어 1868년 4월에는 페비거(John C. Febiger, 費米日)가 셰난도어(Shenandoah)호로 제2차 탐사를 강행했다. 이때 조선 수비군은 內江航行을 영토침략으로 규탄, 포격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페비거는 성조기를 게양한 함정에 대한 포격은 국기모독죄로 단죄하면서 포함책략에 의한 응징보복원정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203)Febiger Letters, Library of Congress, Febiger to The King of Corea, April, 22, 1868.

 이와 같이 미국 해군부는 두 차례 탐문항행을 벌이는 가운데, 슈어드(William H. Seward)국무장관은 대한포함외교 책략에 의한 조선원정계획을 수립했다. 1867년 3월 슈어드는 프랑스는 병인사옥에서, 미국은 셔먼호사건에서 각각 피해를 보았으니 미불공동원정을 제안했지만, 프랑스는 조선원정(병인양요)으로 이미 응징보복을 했으므로 공동원정은 필요없다고 거부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슈어드 국무장관은 1868년 4월에는 슈어드(George F. Seward)상해 총영사에게 조난선원구휼협정 체결과 대조선 통상교섭의 전권을 부여하면서 보복응징원정계획을 수립했지만, 해군부의 함대동원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204)金源模,≪近代韓美關係史≫(철학과 현실사, 1992), 198∼255쪽.

 1869년 미국 그랜트(U. Grant)행정부가 발족되면서 피쉬(H. Fish)국무장관의 당면문제는 슈어드 전 국무장관이 입안한 조선원정을 결행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랜트 행정부는 셔먼호사건에 대한 응징보복원정을 단행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피쉬는 상해총영사 슈어드를 국무부로 초청, 조선원정계획 실행문제를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슈어드는 첫째, 셔먼호와 같은 비참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과 조난선원 구휼협정을 체결하되, 가능한한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 둘째, 조선과 교섭하기전에 먼저 청의 협조와 중재역을 구할 것. 셋째, 조선원정 임무의 전권을 아시아함대 사령관에게 부여할 것 등 세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피쉬는 이상 1안과 2안은 채택했지만, 원정임무의 전권을 아시아함대 사령관에게 부여하자는 3안은 거부하면서, 그 대신 조선과의 교섭을 성취하려면 무엇보다도 청의 중재와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 주청미국공사 로우(F. F. Low)를 조선파견 전권공사에 임명하면서 조선원정의 대임을 부여하는 한편 로저스(John Rodgers) 아시아함대 사령관에게 해군함대를 총동원 로우공사를 수행호위할 것을 명했다.205)Consular Despatches, vol. 2, Seward to Davis, February 28, 1870.
Asiatic Squadron Letters, Rodgers to Robeson, March 28, 1870.

 그랜트 대통령은 1870년 교서를 통해 “조선과 조난선원 구휼협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로우를 조선에 파견하는 바이다. 로우 공사의 경호를 위해 로저스제독에게 아시아함대의 충분한 병력을 인솔하고 로우를 호위할 것을 명한다”206)James D. Richardson, ed., A Compilation of the Messages and Papers of the Presidents, 1789∼1908(New York, 1908), vol. 8, p.145.라고 조선원정 결행을 발표했다. 로우공사는 1871년 3월 7일 조선원정의 목적을 천명한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친서에서 “조선과 화호를 맺고, 조난선원 구휼협정문제를 상의하고자 조선에 간다. 미국은 화목을 간망하고 있으며 우리의 친선우호관계 수립에 대한 교섭을 거절한다면 전쟁(不睦)이 발생하더라도, 어느 누구를 원망할 수 없다. 3, 4개월 안으로 조선에 갈 것인즉 조선은 전권위원을 파견, 본인과 협상에 응해주기 바란다”207)≪籌辦夷務始末≫(六) 권 80:14∼15, 1848∼1849쪽.
≪同文彙考≫권 3, 2489∼2490쪽, 「美國信函」.
라는 친서를 총리아문을 통하여 조선정부에 전달했다. 여기서 미국은 만약 조선이 조난선원 구휼협정을 위한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물리적 힘’ 즉 포함외교 책략에 따라 강제로 조약체결을 강행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같은 친서를 접수한 조선정부는 1871년 4월 14일자 회신문에서 로우의 친서는 곧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면서, 제너럴 셔먼호사건은 미국상선의 도발행위로 파멸을 자초했다는 것, 조선은 柔遠之義에 의해 국적여하를 불문하고 조난선원을 인도적으로 구제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조난선 원 구휼협정을 체결할 필요가 없다는 것,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할수 없다는 것, 조선은 생산업이 빈약해서 미국과 교역할만한 상품이 없다는 것, 따라서 교역을 허락한다면 경제적 파탄이 발생할 것이기에 미국과 통상관계를 수립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208)Cable, op. cit., pp.158∼162, Inclosure No. 5:King of Korea To Board of Rites.
≪淸季中日韓關係史料≫권 2, 173∼176쪽, 동치 10년 4월 17일.

 로우공사는 5월 초까지 전함대를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집결하라고 로저스제독에게 지시했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Colorado)호를 비롯하여 군함 5척,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고, 만약 조선에서의 전쟁발생에 대비, 나가사키에서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한 후 1871년 5월 16일 드디어 조선원정에 올랐다. 로저스는 조선원정의 실상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하여 나가사키 주재 이탈리아인 사진기사 비토(Felix Beato)를 대동하고 출정했다. 로저스는 일찍이 페리 제독의 포함책략에 의한 일본개항방식을 본받아 그 자신도 조선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적으로 立約을 성취시켜보겠다는 포함책략을 수립했다. 아시아함대가 제물포 앞바다에 도착, 무치섬(芍藥島)을 기함정박기지로 정하고, 로우공사는 5월 30일 조선관리에게 6월 1일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면서 그 자신의 조선사행임무를 밝힌 공한을 전달했다. 로우는 이 공한에서 조선과 협상을 위해 왔다는 것, 조선은 직위상 자신과 대등한 특사를 파견하여 교섭에 응할 것, 대형함정이 수도 서울 가까이로 이동항진하기 위한 예비작업으로 아시아함대 소속 소함정을 강화해협으로 파견 탐측활동을 전개한다는 것, 조선측이 탐측활동을 방해하거나 적대적 행동이 없는한 조선백성을 위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서울 정복을 위한 군사적 확대작전수행을 암시하고 있다.209)Stephen White, "Felix Beato and the First Korean War, 1871," The Photographic Collector, vol. 3(Spring 1982), pp.76∼85.
Cable, ibid., p.142, Inclosure No. 6:Note of May 30, 1871 to Corean Officials.

 이같은 로우의 공한을 접수한 조선은 미국이 조선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선언한 것으로 간주했다. “필요하다면 미국의 대형함정이 수도 서울까지 항진하기 위해 예비탐측을 실시한다”는 로우의 선언은 곧 아시아함대가 서울까지 침공 정복작전을 감행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방적 통고를 한후 6월 1일 미군함대는 강화해협 탐측활동을 전개했다. 포함 2척이 손돌목(孫乭項)에 이르렀을 때, 강화도 포대는 조선당국으로부터의 通航허가없이 해협진입은 곧 영토침략으로 간주, 자위권을 발동, 일제히 기습포격을 가해 한미간 무력충돌이 발생했다(손돌목 포격사건). 강화포대에 설치된 약 200문의 대포는 일제히 약 15분간 집중포격을 가했지만 전근대적 노후한 병기라 미군함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못했다. 이로써 미군은 조선의 병기는 아무 쓸모없는 노후한 무기임을 확인했다.210)Albert Castel and Andrew C. Nahm, "Our Little War With the Heathen," American Heritage, 19(1968), p.23.
W. M. Leary, "Our Other War in Korea," U. S. Naval Proceedings, 94(June 1968), p.49.
"Our Little Battle in Corean Waters:A Naval Officer's Story," Overland Monthly, 8(1886), p.127.

 손돌목포격사건이 발생한 후 조미간 교섭이 단절되었다. 그래서 조미 양측은 栗島 백사장에 긴 장대꼭대기에 편지를 매달아 꽂아놓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이른바 원시적 통신수단인 ‘장대 외교문서교환’이 전개되었다. 로우는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함대에 대한 기습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동이라고 비난하면서 즉각 조선은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에 응할 것, 기습포격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할 것, 만약 10일 이내로 이같은 요구조건을 거부하면 보복응징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단행하겠다는 편지를 장대에 매달아 전달했다.211)Castel and Nahm, ibid., p.72. 이에 대해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조선의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함대가 조선의 최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하는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미국의 요구조건을 단호히 거부했다.

 평화적 협상교섭이 결렬되자 로저스는 즉각 각군 지휘관회의를 주재, 마침내 6월 10일을 강화도 상륙작전의 ‘디 데이(D-day)'로 정하고 상륙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로저스는 상륙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으로 진용을 갖추고, 원정군 지휘관에 블레이크(H. C. Blake) 해군중령·상륙군 부대장에 킴벌리(L. A. Kimberly) 해군중령을 임명하면서 6월 10일 초지진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상륙작전에 644명, 해상지원작전에 190명이 동원되어 1시 45분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강화도 草芝鎭·德津鎭·廣城堡에는 조선 수비병 약 3천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조·미 양국의 병력을 대비해보면, 조선군은 숫적으로는 우세하지만 실전경험이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게다가 대포로는 大碗口·佛狼機가 있고, 소총으로는 火繩銃이 있을 뿐이다. 이것 모두가 노후한 병기로서 파괴력(火力), 사정거리, 명중률, 기동성 등에서 미군의 병기에 절대 열세였다. 조선군의 선박은 재래식 평저선뿐이다. 이에 반해 미군은 남북전쟁에서의 실전경험이 있고, 무기는 대포, 야포, 레밍턴소총, 연발권총 등 남북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한 병기뿐만 아니라 증기 동력선을 보유하고 있다. 조선군은 철두철미 籠城戰을 고수했고, 미군은 수륙 양면작전을 전개, 공격위주의 전투를 전개했다. 함재대포로 초지진 성채를 약 2시간 함포사격을 충분히 한 후 안전하게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미군은 22척의 보트를 타고 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을 조선군의 저항을 받지않고 무혈점령했다.212)Marine Amphibious Landing in Korea, 1871(Naval Historical Foundation Publication, 1966), pp.1∼24.
J. F. TerHorst, "Our First Korean War," Marine Corps Gazette, 37(1953), pp.37∼38.

 초지진에서 하룻밤을 야영한 후 6월 11일 새벽에 덕진진을 점령하고 진사·무기고 등 군사시설을 모두 불태운 뒤 마지막으로 광성보 점령작전에 돌입했다. 광성보에는 魚在淵 중군의 휘하 조선수비병 6백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해상에서 함포사격을 약 1시간 포격을 계속하여 초토화한 후 돌격작전을 전개했다. 어재연 중군은 손돌목돈대 札駐所(지휘본부)에 대형 ‘帥字旗’를 게양하고 폭우처럼 쏟아지는 탄우 속에 玉碎작전으로 용감하게 결사항전을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강도실기≫에 의하면 어재연의 옥쇄작전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전세가 위급해지자 어공은 말하기를 ‘내가 나라의 후은을 입었으니 죽음으로써 내 직책을 지킬뿐이다.’ 이에 몸을 일으켜 앞장서서 화포를 이끌고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다가 탄환이 다 떨어지자, 계속 군도를 휘둘러 적군을 格殺하였다. 시살한 지 한 시각이 지나서 세궁역진 난군중에 순사하니 이때가 4월 24일(양 6. 11)이었다.”213)魚在淵文書:≪雙忠集:江都實記≫·≪忠莊公遺事(乾·坤)≫.
C. F. Runyan, "Captain M. Tilton and the Korean Incident of 1871," Marine Corps Gazette, 42(1958), pt. Ⅱ, pp.47∼48.

 한편 미군측은 “조선군은 전근대적 노후한 병기를 가지고 미군의 현대적 총포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용감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214)W. S. Schley, Forty-Five Years Under The Flag(N. Y., 1904), p.95.라고 조선수비병의 용맹성을 찬탄하고 있다.

 미국 상륙군 부대는 돌격작전으로 광성보 손돌목돈대를 함락, ‘수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함으로써 육·해상의 장병들은 전승의 함성으로 환호했다.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의 피해는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조선측 공식기록에는 조선수비병 전사자는 53∼55명, 부상자 24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미군측 통계에 의하면 전투가 끝났을 때 광성보 일대에 널려있는 시체수는 243구, 해협에 뛰어내려 익사한 장병이 100여 명, 총 350명이라고 집계했다. 전투는 수백 명에 달하는 조선군의 전사자를 낸 가운데 모두 종식되고 1시 정각에 킴벌리 부대장이 연락장교를 기함으로 파견, 로저스에 전승소식을 보고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령하고 6월 12일 작약도 기함정박지로 철수하면서 수자기를 비롯하여 각종 군기 50개, 각종 대포 및 화승총 481문을 전리품으로 약탈해 갔다.215)≪高宗實錄≫, 권 4, 고종 8년 4월 28일.
<鎭撫中軍魚公在淵殉節碑>.
U. S. Department of the Navy, Annual Report of the Secretary of the Navy on the Operations of the Department for the Year 1871(Washington:Government Printing Office, 1871), p.287.
Cable, op. cit., pp.150∼153, No. 35:Low to Fish, June 20, 1871.

 상륙군부대가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모함기지로 귀환하자, 로저스는<전승축하훈령(Congratulatory Order)>을 발표하면서 전승을 자축하고 있다. “본 사령관은 잔인한 포격(손돌목 포격사건)에 대해 일언반구 사죄하지 아니해서 6월 10일 원정군을 파견,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작전결과 강화도 5개 요새지를 점령했다. 마침내 난공불락의 요새지 손돌목돈대를 함락하였으니 우리 장병의 용감성을 높이 찬양하는 바이다. 우리 장병들이 이룩한 빛나는 전승을 축하함에 있어서 본관은 우리 나라 성조기의 명예를 수호하다가 산화한 용감무쌍한 전몰장병들에게 충심으로 애도하는 바이다.”216)The New York Times, August 22, 1871.
김원모,<로저스함대의 來侵과 魚在淵의 抗戰>(≪東方學志≫, 29, 1981), 265∼307쪽.

 로저스 제독이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 조선군 수백 명을 학살한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을 군사적으로 압도 굴복시킴으로써 조선대표를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려는 포함외교적 책략이었다. 로저스는 무려 20일간 작약도 기함에서 조선대표가 파견되기를 고대했지만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에 부딪쳐 조선과의 입약교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고 말았다. 대원군은 이러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5개 요새지가 함락되는 참패에도 불구하고 미군함대의 철수는 곧 미군의 敗退로 간주, 오히려 조선군이 미군을 격퇴했다고 주장했다.

 조미전쟁 결과 排外感情은 더욱 고조되기에 이르렀다. 대원군을 비롯하여 조야의 당로자는 철저하게도 華夷論的 對美認識을 고수하고 있었다. 조선은 미군을 가리켜 洋賊·洋醜·兇賊·쑥대강이(short-hairs, 蓬頭)·黑鼓子 등 온갖 경멸적인 호칭으로 비하하면서 犬羊처럼 인간동물로 취급했다. 영의정 金炳學은 “彌利堅(미국)이라는 나라에는 단지 부락만 있을 뿐이다. 중간에 워싱톤(華盛頓)이 생겼다고 한다. 城址를 개척하고 기지를 얻어서 해외의 양이들과 통섭하고 있다. 이들이 海島를 왕래할 때 劫掠의 습성이 있으므로 海浪賊과 다를바 없다. 이들이 교역을 운운하는 것은 더욱 해괴한 말이다”217)≪日省錄(고종편)≫권 8, 고종 8년 4월 20일.고 했다. 이처럼 미군을 약탈을 일삼고 있는 해적시함으로써 미군에 대한 적개심은 절정에 다달았다.

 미군의 강화도 내침은 분명히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라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이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분할이나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이 아니고, 오로지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 조선개항을 실현시켜보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적 침략전쟁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겠다. 그러므로 미국은 한시적·국지적 전쟁을 통해 조선을 개항, 한반도에까지 통상무역의 범위를 확장시켜 보고자 포함외교책략에 의해 조선원정을 단행했지만 대실패로 끝난 것이다.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최대규모의 해군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원정을 단행하게된 궁극적 지상목표는 조선개항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압도적 전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약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미국의 조선개항 실패원인을 분석해보면, 첫째, 미국은 조선당국과의 입약교섭에서 화해적 교섭방법을 지양하고 시종일관 호전적 포함책략으로 대응했다. 물리적 함포의 힘에 의하여 무력적으로 조선을 굴복, 조선개항을 강요했다. 둘째, 문화적 배경에 대한 상호 이해가 부족했다. 양이에 대한 불신감이 강한 조선은 미군을 ‘인간동물, 해랑적’으로 비하 경멸한 반면, 미군은 백인 우월감을 가지고 조선군을 적개심이 강한 야만족으로 천대했다. 여기에서 상호 불신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화해적 교섭은 불가능하여 전쟁만이 유일한 해결방편이 되었다. 셋째, 조선은 철두철미 對美不交涉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셔먼호사건(1866)·병인양요(1866)·南延君墓盜掘事件(1868) 등 일련의 양요를 치르면서 양이에 대한 배외감정이 격화된 조선 지도층은 양이와는 일체 교섭을 않겠다고 불교섭정책을 확립했다. 넷째, 미국은 조선원정을 단행할 때, 처음부터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에 내침했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 선박의 출입항이 금지되어 있는 ‘군사적 제한지역’이다. 그러기에 병인양요 직후 대원군은<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항행금지 비석’을 세워 놓았다. 이처럼 국가안보상 중요한 수로에 정식 허가 없이 미군함대가 항행한 것은 엄연한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조선측은 이를 ‘闖入’ 또는 ‘內犯’ 등 영토침범으로 단죄하고 있다.

 다섯째, 1871년 조선은 아직도 개항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가운데 미군함대를 맞이했다. 로저스는 1854년 페리(M. C. Perry)의 일본개항 성공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조선에도 동일한 역사적 결과를 기대하면서 조선원정을 단행했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일본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개항을 성취했지만 조선은 엄청난 피의 대가를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이미 개항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은 1641년 나가사키(長崎)에 和蘭商館을 개설, 유럽 각국과 교역을 통해 민족자본을 축적해 왔고, 이를 통해 서구 선진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일본 토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이미 개항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나가사키같은 교역항구도 없었고, 양반 지도층 인사는 태서문물에 어두워 화이론적 대미인식을 바탕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개항은 곧 망국인양 閉關自守를 고수하고 있었다.218)≪高宗實錄≫권 4, 고종 8년 4월 16일.
金源模,≪近代韓美關係史≫, 551∼559쪽.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개항의 관건을 쥐고 있는 청나라가 조선개항을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조선이 개항해서 구미 각국과 통상교역을 하게 되면 조·청간의 전통적 유대관계(조공관계)가 단절되고, 이로 인해 對韓宗主權이 상실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청국은 조선이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전통적 宗·屬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219)China Despatches, vol. 30, August 3, 1871. 주자학을 지키고 邪學(천주교)을 배척한다는 이른바 衛正斥邪의 고루한 인습에 안주하고 있는 대원군은 7월 3일 미군함대가 철수하자마자 “서양 오랑캐와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라는 斥和碑를 경향각지에 세우면서 척사·척양으로서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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