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1. 강화도조약과 개항
  • 1) 조약체결 전의 국내외정세
  • (2) 고종친정과 대외정책

(2) 고종친정과 대외정책

 정한론을 둘러싼 메이지정부의 분열이 있은 지 약 한 달 후, 조선에서도 집권세력이 교체되는 큰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 고종은 1873년 10월 崔益鉉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익현은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현재 나라 일이 폐단 없는 곳이 없으니, 명분이 바르지 못한 것과 말의 순하지 못한 것을 글쓰는 사람을 번갈아 기록하더라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대원군의 치세 전반에 대해 총체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대표적인 실정의 사례로 만동묘철거, 서원폐쇄, 國賊의 伸寃, 청전의 사용 등을 들었다. 최익현은 상소의 끝에서 “친친의 열에 속한 사람은 다만 그 지위를 높히고, 나라 정사에는 간여하지 말도록 할 것”을 되풀이 하여 주장함으로써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였다.247)李瑄根, 앞의 책, 338∼340쪽. 고종은 최익현의 동부승지 사직상소를 물리침과 동시에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키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최익현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11월 15일과 16일 좌의정 姜㳣와 우의정 韓啓源, 영돈영사 洪淳穆 등 고위관료들이, 17일에는 호조·예조·공조·병조판서들이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나아가 성균관의 유생들이 이른바 捲堂(맹휴)으로 고위관료들의 최익현 규탄에 가담하였다. 이어 12월 16일에는 승정원의 구성원과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대간들이 동시에 사임함으로써 최익현상소를 둘러싼 정치문제는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위관료들의 반발에 부딪쳐 고종은 최익현을 일시 관직에서 해임하였으나, 최익현을 비판하는 세력들은 상소가 인륜을 그르치는 내용이라며 강경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마침내 11월 24일 의정부와 비변사의 상층관료 57명이 연명한 賓啓를 접하여 고종은 최익현에 대한 심리를 집행하라고 명령하여 이들의 반대를 수용하였으나, 동시에 최익현을 반대한 세 명의 하위관리에 대해서도 유배를 명령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248)James B. Palais, 李勛相 譯,≪傳統韓國의 政治와 政策≫(신원문화사, 1993), 295∼332쪽.

 의금부는 최익현을 대역죄로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으나, 고종은 최익현이 단지 시골의 몰지각한 인물에 불과하며 섭정 조대비가 최익현을 가볍게 처벌하라고 지시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제주도 유배를 명하였다. 승정원에서는 이 결정에 항의했으나, 고종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11월 28일 의금부의 주요 관리 중 홍순목·강로·한계원·金世均·朴珪壽 등은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고종은 홍순목·강로·한계원 등을 해임함으로써 자신의 결정을 공식화하였다. 결과적으로 최익현의 상소 이후 한 달여 안에 조정내 대원군 지지세력이 축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대원군의 실각 소식을 접한 일본정부도 즉각 外務6等 出仕 모리야마를 재차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 정정의 변화를 파악하도록 지시하였던 사실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다. 이 시기 정치세력의 교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대원군파 홍순목의 축출과 李裕元·박규수의 중용, 그리고 군사권의 장악이었다. 고종은 이와 같이 조정내 집권세력을 교체하고 1874년에 접어들면서 각지방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249)한철호,<고종 친정초(1874) 암행어사 파견과 그 활동>(≪사학지≫31, 1998), 193∼244쪽.

 이 시기 암행어사 파견의 정치적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朴定陽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박정양의 주요 활동은 크게 경상도관찰사 金世鎬, 동래부사 鄭顯德, 왜학훈도 안동준 등 대일외교를 담당했던 관료들에 대한 조사와 다른 하나는 부산에 설치되어 있었던 왜관주재 일본관리와의 접촉이었다. 박정양 활동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신정권이 중앙과 지방에서 대원군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대외적으로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급속히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정부의 방침은 공식적인 접촉 또는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그리고 지방세력들 사이에서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정부가 이 시기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던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일본의 대만침공에 관한 소식과 대만사태에 뒤이은 청국 자문의 영향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조선정부는 신임 왜학훈도 玄昔運에게 일본과의 교섭을 지시하였다. 1874년 9월 3일 현석운과 모리야마는 국교재개 문제에 대해 회담하였다. 이것은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 관리간에 이뤄진 최초의 공식회담이었다. 회의에서는 국교 재개를 위해 조선국 예조판서에게 일본 외무성의 외무경이 예조참판 앞으로, 또한 舊쓰시마번주가 예조참판에게 각각 새로 서계를 보낼 것을 합의하였다.

 모리야마는 10월 하순 東京에 도착하여 조선에 관한 상세히 보고를 하였다. 그는 일본정부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조선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외무성은 그 건의를 채택하여 이미 결정되었던 舊쓰시마 번주의 파견을 철회하고, 12월에 가서 모리야마를 外務少丞으로 승진시킨 뒤 다시 부산에 파견하여 국교재개 교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대만문제를 성공적으로 종결지은 오쿠보 정권의 대외적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좀더 직접적인 요인은 상술한 바와 같이 대원군 실각 후 조선정부의 대일외교 변화를 틈탄 일본정부의 적극정책이라 할 것이다.250)金基赫, 앞의 글, 25∼26쪽.

 앞의 합의에 따라 모리야마는 1875년 2월 하순에 부산에 도착하여 서계를 제출하고 현지 조선 당국자들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동래부의 보고에 대해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의가 진행되었다.

상이 이르기를, ‘올라온 서계를 끝까지 받아 보지 않는다면 자못 誠信의 도리가 아닌 듯하다. 또한 저 왜인이 받아 본 뒤에 만일 따르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비록 백 번을 물리치더라도 마땅히 도로 받아서 가겠다고 약조를 하였으니, 이번에는 가져와 보게 해서 실로 격식을 어긴 점이 있으면 다시 물리치는 것이 불가하지 않을 듯하다. …’ 김병국이 아뢰기를, ‘倭情이 본래 교활하니, 전의 말을 準據해 믿거나 서계에 眞書와 諺書가 서로 섞여 있는 것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만, 한번 자세히 살펴본 뒤에 과연 격식에 어긋난 점이 있으면 사리에 의거해 물리치는 것이 실로 일의 체모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狀啓가 올라온 지 이미 여러 날 되었으니 즉시 품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인의 실정은 별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겠다’(≪承政院日記≫, 고종 12년 2월 5일).

이용우가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 ‘彼國의 官制가 변경되었다고 핑계대고는 있지만 도서를 만들어 주는 것은 서로 믿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바꿀 수 없는 법규가 되었는데, 당초 두 나라가 講定하지도 않고 이제 와서 새로 행하고자 한단 말입니까. 비록 노인으로 말한다 해도 정식을 고치는 것 또한 격식에 어긋나는 것이니 모두 좋은 말로 효유하여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말도록 하고 형세를 속히 馳聞하도록 알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承政院日記≫, 고종 12년 2월 9일).

 위의 기록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대략 두 가지 입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는 전통적인 조일외교의 형식을 주장하며 이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서계의 접수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1868년 서계접수 거부 시기의 논의와 다른 점은 외교문서를 일단은 접수하여 검토해보자는 입장이 새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와 같이 서계를 접수하여 적극적으로 대일외교를 풀어가자는 입장의 선두에 고종이 있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고종은 서계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서계접수 자체의 거부는 “誠信에 어긋난다”, “왜인의 실정은 별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겠다”, “이번의 서계는 개수한 곳이 있다”라고 함으로써 서계 접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의정부 대신 이용우와 시원임대신들은 고종의 태도와 달리 동래부 장계의 회답을 지연시키고 있었고, 여전히 ‘皇’·‘大’ 등의 용어와 新印의 사용 등을 들어 거부하고 있었다. 고종은 개인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분명히 하였으나, 조정대신들의 여론은 여전히 서계 접수를 거부하는 쪽이 다수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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