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1. 강화도조약과 개항
  • 2) 강화도조약의 체결
  • (2) 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성격

(2) 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성격

 일반적으로 강화도조약 또는 강화도조약체제라고 지칭하는 조약의 구체적인 문건은 다음의 것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즉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에서 조인하였던<조일수호조규>와 같은해 8월 24일 체결하였던<조일무역규칙(조일통상장정)>과<조일수호조규부록>및<왕복문서>등이 그것이다. 아래에서는 이른바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으로서 강화도조약이 가지는 의미와 영향 등을 파악하기 위해 조일수호조규의 내용을 제시하고, 이를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조일수호조규는 前文과 12개 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大朝鮮國과 大日本國은 元來 友誼 두텁게 歲月을 經過하였다. 至今 兩國의 情意 未恰함을 보게 되므로 舊好를 重修하여 親睦을 굳게 하고자 한다. 이를 爲하여 日本國政府는 特命全權辨理大臣 陸軍中將 兼 參議開拓長官 黑田淸隆, 特命副全權辨理大臣議官 井上馨을 簡拔하여 朝鮮國 江華府에 派遣하고 朝鮮國政府는 判中樞府事 申櫶, 都總府總管 尹滋承을 簡拔하여 各其 奉承한 論旨에 遵據하여 議決한 條款을 左에 開列한다.255)이 글에서 인용한<조일수호조규>의 원문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편≪구한국외교자료집≫을 이용하였다.

 전문의 첫머리에서 조약의 주체를 ‘대조선국’과 ‘대일본국’ 그리고 조선국정부와 일본국정부로 기술하고 있다. 일본측이 제시하였던 초안에서 이 부분은 ‘대일본국여조선국’으로, ‘대일본국황제폐하’와 ‘조선국왕전하’로 기술되어 있었는데, 조선측의 이의 제의로 대등한 표현으로 정정되었다고 한다.256)田保橋潔, 앞의 책, 482쪽. 한편 조약 전문의 표현 중 ‘素敦友誼’라는 기존의 관례에 대한 언급은 일본이 조선과 수교하기 전 청국과 체결하였던 청일수호조규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257)外務省 編,≪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上(原書房, 1966), 45쪽. 다만 신조약의 역사적 위상에 대해서는 조일수호조규의 경우 청일수호조규와 다르게 언급하고 있다. 즉 조일수호조규에서는 ‘과거의 우호적인 관계를 거듭 확인하고 발전시키기를 원한다’는 뜻의 ‘欲重修舊好’란 표현을 썼던 것이다. 즉 신조약은 ‘구호’를 ‘중수’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 표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주목한 바가 없었지만 조선측에 의해 요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와 같이 판단하는 근거는 조약 체결 이후 조선정부가 이에 근거하여, 그때까지 강력하게 개방을 반대하던 세력들의 반발을 회피하는 주요 명분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항반대론자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정부는 신조약이 새로운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과거의 교린관계의 연장에서 이를 개수한 것이라고 일관되게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조일수호조규 제1관을 검토하기로 한다. 1관의 첫구절은 조약 체결에 임하는 조선과 일본 양국의 관계 설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第1款 朝鮮國은 自主國이며 日本國과 平等한 權利를 保有한다. 今後 兩國이 和親의 誠意를 表하고자 할진대 모름지기 彼我 同等한 禮儀로써 相待할지며 추호도 侵越 猜嫌함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우선 종전에 交情阻害의 화근이던 諸法規를 革除하고 極力 寬裕弘通의 법규를 開擴하여서 쌍방의 영원한 안녕을 기한다.

 “朝鮮國은 自主之邦이며 與日本國으로 保有平等之權이라”고 조선을 ‘자주국’으로, 그리고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조약에 임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선의 위상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은 일반적으로 근대적인 조약체결의 당사자인 경우 당연히 전제되어 있는 규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관에서 이를 규정한 실질적인 이유는 일본이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이 운요호사건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조선과의 직접 교섭 이전에 해결해야 할 선결과제로 논의한 것은 조선문제에 대한 청국의 개입을 방지하는 방안이었다.

 청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대한 이와 같은 도전은 일찍이 베트남에 대해 개방을 강요하였던 프랑스가 대등관계를 조약문에 설정함으로써 청국의 개입을 배제한 적이 있었다. 일본은 이를 조일관계에 적용했던 것이었다.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한 제1관의 실질적인 의미와 목적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기존의 청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일본측이 변경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전제조항이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이후 조선 내외에서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추구하였던 세력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즉 그들은 조선의 자주권을 대외적으로 처음으로 인정한 문건이 조일수호조규라고 평가하였다.

 제2관은 종래의 외교관행 변경에 관한 조항이다. 종래 전근대 국가간의 외교관행은 특정의 목적을 가진 사행을 필요에 따라 파견하고, 파견 목적을 수행하면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일본은 2관에 의해 기존 외교관행의 전면적 전환을 시도하였다.

第2款 日本國政府는 지금부터 15개월 후 언제든지 사신을 朝鮮國 京城에 파견하여 禮曹判書와 親接하여 交際事務를 商議하도록 할 수 있다. 該使臣은 留滯하든지 즉시 귀국하든지 그것은 다 時宜에 의할 것이다. 朝鮮國政府는 언제든지 사신을 日本國 東京에 파견하여 外務卿과 親接하여 交際事務를 商議하도록 할 수 있다. 該使臣이 留滯하든지 즉시 귀국하든지 그것은 또한 時宜에 의할 것이다.

 2관의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정부와 조선정부가 사신을 상대국의 수도에 파견하면, 외교사무의 최고책임자가 이를 맞이하여 외교적인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으로 상호 호혜와 대등한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사신의 상대국 수도 체류기간과 파견시기 등에 대해서 대단히 포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수도에 외교사절의 상주와 나아가 상주외교공관 설치를 가능케하고 있다. 2관의 내용을 살펴보면 ‘該使臣駐留久暫共任時宜’, ‘隨時派使臣’ 등으로 표현하였다. 즉 사신의 체류일정을 ‘時宜’에 맡기며, 사신의 파견시기를 ‘隨時’로 규정함으로써 체류기간과 파견시기에 아무런 제한 규정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은 이 조항에 의해 실질적으로 개항장이 아닌 수도에 외교사절이 상주하여 외교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제3관은 외교문서에 사용하는 언어와 문자에 관한 규정이었다. 3관은 “今後 양국 왕래의 公用文은 일본은 그 國文을 사용하되 차후 10년간은 譯漢文 한 통을 첨부하며 조선국은 眞文을 사용할 수 있다”로 되어 있다. 일본은 일본어를 사용하며, 조선은 한문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자국의 이익과 상대국의 이익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외교문서의 작성에 일본이 비록 한문번역문을 첨부하기로 했으나, 일본이 자국어로 외교문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결정한 것은 문제의 소지를 남기는 것이었다. 표의문자인 한문 해석에 있어 조·일 양국의 해석이 상치되지 않을 경우 일본은 자국어의 해석에 근거하여 일을 추진하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제4관과 5관은 통상무역의 실질적인 근거가 되는 개항장의 선정과 설치 및 운영의 대강에 관한 조항이었다. 4관은 “조선국 부산의 草梁項에는 일본공관이 있고 다년간의 양국 인민의 通商地이다. 今後 종전의 慣例와 歲遣船等事를 개혁하고 今般 새로 의결되는 條款을 憑準으로 하여 무역사무를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 조선국정부는 第5款에 기재하는 二口를 개항하고 일본인의 왕래, 통상함을 허가한다. 右場所에서 地面을 賃借하여 가옥을 造營하며 또는 所在의 조선인민의 가옥을 賃借함은 각기 隨意에 맡긴다”라고 규정하였다.

 4관에서 일본은 “조선국 부산의 草梁項에는 日本公館이 있고 다년간의 양국 인민의 通商地이다”고 하여 종래 교린외교 체제 하 부산에 두었던 왜관을 ‘공관’으로 기술하고 있다. 종래 교린체제 하의 조일외교의 실질적인 공간이었던 왜관의 관리와 세견선의 규모 등은 조선측의 규제와 통제 하에 있었다. 반면 공관은 치외법권을 가진 외교사절의 거주지역으로 거주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인 것이다. 왜관은 조선 관리가 거주지역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관문을 설치하여 거주지역 내외의 통행을 엄격히 규제하고 거주 일인들에 대해 식량과 생필품 등을 조달해 주고, 소수의 허가받은 상인에 한해 지역내에서만 교역이 이루어졌던 영역이었다. 일본은 왜관 본래의 기능과 성격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이를 자국 영토의 연장선상에 편입시키기 위하여 일찍부터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쓰시마번주의 중개를 폐지하고 1871년 외무성 관리로 처음 조선에 파견되어 왜관에 도착하였던 모리야마도 왜관을 접수하여 공관으로 사용하게 되었음을 일방적으로 전달한 바 있었다.

 또한 제한된 공간에서 쓰시마도주의 허가를 받았던 쓰시마번 직속의 상인에 한해 주로 통상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항지 전 지역에서 오사카와 도쿄 등지의 대소 상인이 자유로이 무역에 참여하는 통상은 이전의 무역과 다른 것이었다. 나아가 개항지 내에서 임의로 토지를 빌릴 수 있고, 빌린 땅 위에 집을 짓거나 조선인 소유의 집을 빌려서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허용한 것은 종전의 관례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4관의 규정에 근거하여 일본은 향후 조선땅에서 그들만(외국인)의 전관 거류지 즉 조계를 설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제5관은 부산 이외에 추가로 2개 항구를 개항하기로 약속한 조항이다. 5관은 “경기·충청·전라·경상·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소를 택한 후 지명을 지정하고, 시기는 日本曆 明治 9년 2월 朝鮮曆 丙子 2월부터 기산하여 20개월 후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개항 시기를 수호조규 체결로부터 20개월 이내로 못박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에 근거한 원산과 인천이 실제로 개항되었던 것은 각기 1879년 7월과 1883년 8월이었다. 개항 시기가 조약체결 당시 규정했던 시기보다 상당 기간 지연되었던 것은 개항장 선정과정에서 일본이 이미 예상지로 꼽고 있었던 위의 2개 항구에 대해 조선측의 반발이 컸었기 때문이었다.

 제6관은 일본 선박이 조선연안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구조하고 송환하는 절차에 관한 규정이다. 6관은 “今後 日本國 船隻이 조선국 연해에서 혹은 大風에 遭遇하며 혹은 薪糧에 窮渴하여 지정 항구에 도달할 수 없을 때에는 어떤 항만에서든지 船隻을 寄泊하여 풍파의 위험을 피하고 所要品을 구입하며 船具를 수선하며 柴炭 등을 購得할 수 있다. 물론 그 공급 비용은 모두 선주가 변상할지라도 이러한 사항에 관하여서는 지방관민은 그 곤란을 體察하며 진실로 憐恤을 가하여 구원에 부족함이 없고 보급에 吝嗇함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또 양국의 船隻이 대양 중에서 파괴되어 승선원이 어떠한 지방에든지 표착하는 때에는 그 지방 인민은 즉시 救恤의 手續을 취하여 各人의 생명을 보전시키고 地方官에 屆出하여 該官이 각 본국에 호송하거나 또는 그 근방에 在留하는 본국관원에게 인도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조난 선원의 보호가 일차적인 목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6관의 경우에도 조난시 인명구조와 보호라는 표면적인 목적이 변질될 가능성도 다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조난에 포함되는 상황이 ‘대풍에 조우’·‘薪糧 窮渴’·‘선척 破壞’ 등으로 다양하게 규정되어 있고, 조선내 ‘어떤 항구’에든지 기항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6관은 다음 제7관과도 관련하여 일본의 선박이 개항장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유사시 조선의 어떤 항만에라도 상륙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었다.

 第7款은 “조선국의 연해·도서·암초는 종전에 審檢을 하지 않은 까닭에 지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로 연안을 측량함을 허가하여 그 位置·深淺을 명세히 하고 圖誌를 編製하여 양국 船客으로 하여금 위험을 피하고 평온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 연근해의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연해를 자유롭게 측량하고 측량자료를 가지고 지도작성에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었다. 7관 또한 제시하고 있는 이유와 달리 조·일간에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였을 뿐 아니라 청·일간의 문제와도 관련을 가지는 것이었다.

 먼저 이 시기 일본측이 제시한 연안측량과 해도작성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규는 ‘위험하므로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로 해안을 측량함을 허가’하고 있다. 이 때의 일본국 항해자는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당시 일본의 경우 민간측량회사나 민간인이 파견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일본이 조약체결 직후 5관의 2개 항구 개항지 선정과 관련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던 측량선은 일본군함이었다.

 일본은 1878년 4월부터 8월까지 개항장 선정문제로 조선에 대한 무력시위를 겸하여 군함을 파견하여 동해와 서해안 측량을 강행하였었다. 이 조항에 의하여 일본군은 측량을 핑계로 조선연안의 어떤 지점에라도 일시 상륙할 수 있게 되었으며, 수집된 측량자료는 군부의 주관 하에 지도를 작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경우의 지도란 향후 조선 연근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전투에 기여하는 해도작성이었음을 말할 필요도 없다.

 끝으로 8관 이하 9관과 10관은 위의 과정을 거쳐 선정된 개항장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본상인의 상업활동에 관한 규정이었다.

第8款 今後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의 지정 各港에 시의에 따라 일본상인을 관리하는 官員을 설치할 것이다. 만약 양국이 교섭할 안건이 있을 때에는 該官은 소재 지방장관에 會商하여 처리한다.

第9款 양국은 이미 通好를 하였다. 彼我 인민은 각자 임의로 무역한다. 양국 관리는 조금도 이에 간여하지 않을 것이며 제한을 설정하거나 禁沮하지 못한다. 만약 양국의 상민이 欺罔衒賣나 賃借不償을 하게 될 때는 양국 관원은 엄중히 該國常民을 취조하여 債缺을 追辨시킬 것이다. 단 양국 정부는 이를 代償할 이유가 없다.

第10款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各港에 在留중 만약 罪科를 범하고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審議할 것이다. 만약 조선국 인민이 罪科를 범하고 일본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조선국 관원이 査辨할 것이다. 단 쌍방이 다 각기 國律에 의거하여 재판하되 조금도 回護 袒庇함이 없이 극력 公平, 允當한 재판을 할 것이다.

 8관과 9관, 10관은 상호 내용상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조선측에 제시된 것이었다. 먼저 8관을 살펴보면 일본은 향후 개항장에서 ‘時宜에 따라 일본상인을 관리하는 관리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측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개항장에 언제든지 ‘영사관’을 설치하여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관계되는 사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개항장에서 양국인의 상업활동에 대해서 9관은 ‘양국은 통호’하였으므로, ‘피아의 인민은 임의로 무역’에 종사하며, 양국 관리는 이를 규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다만 상업 활동 중 정당하지 못한 거래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할 때에는 자국민에 대해서는 자국의 관리가 이를 조사하나 결과에 대해서는 국가가 배상의 의무 등은 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나아가 10관에서는 개항지에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범인에 대한 조사 처벌은 자국의 관리가 이를 담당하여 공평하고 타당한 재판을 진행한다고 규정하였다. 당시 조·일 양국의 상황은 조선인 상인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무역에 종사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8관 이하 10관의 조항은 조선에 건너와서 상업에 종사하는 일본인에 대한 규정이었다. 조선은 이들 조항에 의하여 개항지에서 활동하는 일본상인의 활동에 대하여 규제하거나 통제할 법적 근거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범죄행위를 저질렀을 경우에도 이들을 체포하거나 조사 또는 처벌하는 데 전혀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측은 개항장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영사관을 설치하여 자국인의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정부가 보호할 수 있게 되었고, 자국인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중대한 장애가 발생할 우려가 있을 경우 현지에 주재하는 관리의 판단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신속히 요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항 직후 조선무역에 종사하였던 일본상인들의 성격을 감안할 때 이들 조항에 의한 조선인의 피해는 다양하고 심대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에 건너 왔던 일본인들은 조선영토 내에서 자유로이 무역과 선교 등 각자의 생업에 종사할 수 있으나, 조선의 법질서 바깥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11관은 위와 같이 큰 틀에서 규정한 양국인의 상업활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항의 마련하기 위한 회담을 6개월 이내에 관리를 파견하여 시작한다는 것이었다.258)第11款 양국은 이미 通好를 하였으므로 따로 通商章程을 설정하여 양국 常民에게 편리를 줄 것이다. 이와 아울러 지금 의결한 각 조항 중 다시 세목을 補添하여 遵照하기에 편리한 조건으로 할 것이다. 이는 지금부터 6개월을 넘지 않아서 양국이 따로 위원을 임명하여 조선국 京城 또는 江華府에서 회견하고 商議決定을 하게 한다.

 끝으로 12款은 조약의 효력 발생과 유효기간에 관련된 것이었다. 12관은 “右에 議定된 11款의 조약은 本日부터 양국이 信守遵行한다. 양국 정부는 이를 다시 變革할 수 없으며 영원히 信遵하여 양국의 화친을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본 約書 2통을 작성하여 양국이 위임한 大臣이 각각 조인하고 互相交付함으로써 증거를 명확히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조항 또한 일반적인 조약의 관례에 비추어 조약의 효력발생과 존속 연한이 예외적인 것이었다. 즉 조약체결 즉시 비준 절차에 대한 규정없이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생하며, 또한 양국정부는 이를 변혁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영원히 이를 준수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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