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 조미조약의 체결
  • 1) 조·청·미 3국의 조미조약 체결 교섭과 속방조관

1) 조·청·미 3국의 조미조약 체결 교섭과 속방조관

 조선국왕이 譯官 李容肅(1818∼?)을 天津으로 보내어 청국 北洋大臣 李鴻章(1823∼1901)에게 대미수교 방침을 통고한 것은 고종 18년(1881) 1월 하순이었다. 이 1월 하순을 전후하여 청국 정부는 조미조약체결과 관련된 몇 가지 주목할만한 조처를 취하였다. ① 北洋衙門 津海關道 鄭藻如가 1월 초순 北京에 와 있는 朝鮮冬至使 任應準(1816∼1883)에게 密函을 보내어, 유학생들의 인솔을 빙자, 大員을 천진으로 파견하여 조약체결에 관하여 협의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 ② 1월 하순부터 조약 체결 등 조선에 관계되는 洋務事宜를 북양대신과 주일공사로 하여금 담당하도록 한 것, ③ 이홍장이 2월초(양 3월초)에 주천진미국부영사 피셔(Fisher, C.L.)를 통하여 그동안 조미수교 교섭을 벌여 온 미국 해군제독 슈펠트(Shufeldt, R.W., 1822∼1895)를 초청하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한 것이다. 이 가운데 ①과 ②는 주일청국공사관을 방문한(고종 17년 말) 조선국왕의 밀사 卓挺埴으로부터 미국과 수교할 수 있도록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은 주일공사 何如璋(1838∼1891)이 總理衙門에 건의한 바에 따르거나, 관계되는 것이었다.320)宋炳基,≪近代韓中關係史硏究≫(檀國大 出版部, 1985), 84·194∼197쪽.

 정조여의 서함이 서울에 전달된 시기는 1월 하순, 늦더라도 2월초였던 것 같다. 서함을 접한 국왕은 곧 사절의 파견을 지시하였고, 統理機務衙門의 건의에 따라 使號를 領選使로 결정하고, 吏曹叅議 趙龍鎬(?∼1881)를 이에 임명하였다(2월 26일). 이어 영선사 파견을 통보하기 위하여 3월 하순 역관 李應浚을 청국으로 파견하였다. 영선사의 파견 결정은 정조여의 서함과 관련된 것이며, 그 중요한 사명이 유학생의 영솔이 아니라 조미조약체결에 관하여 청국측과 협의하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321)宋炳基, 위의 책, 197∼199쪽.

 또 이홍장과 회담을 가진 피셔는 그 내용을 2월 4일(양 3월 3일)자로 슈펠트에게 연락하였다. 이 피셔의 연락과 슈펠트의 중국 來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슈펠트는 5월(1881)말 (양 6월 하순) 천진으로 이홍장을 방문하여 회담을 갖고 미국의 조약 체결의사를 조선에 전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홍장으로부터 미국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322)Chales O.Paulin, "The Opening of Korea by Commordore Shufeldt"(Political Science Quarterly 25:3, 1910), pp.483∼485.
李普衍,<韓美修好通商條約締結>(≪한미수교100년사≫, 국제역사학회 한국위원회, 1982), 49∼50쪽.
宋炳基, 위의 책, 199∼201쪽.

 이응준이 천진에 도착한 것은 6월초였다. 이홍장은 정조여로 하여금 다시 밀함을 작성하여 바로 이응준 편에 조선정부로 보내었다. 이 정조여의 제2차 밀함의 내용은 官員을 천진으로 파견하여 슈펠트와 협상할 것을 권고하고, 그 결과를 기다려 중국이 奏請 파견하는 대원과 함께 돌아가 조약을 체결하라는 것이었다. 천진에서 이홍장의 중재하에 협상하고, 조선에서 중국관원이 참여한 가운데 조인하라는 것으로, 그의 이런 구상은 주일공사 하여장의 대조선정책 건의(1880년 10월 하순), 즉<主持朝鮮外交義>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외교의>의 요지는 조선이 미국 등과 조약을 체결할 경우 독립국가로 간주될 위험이 있으므로 중국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의 조약체결을 주관하고 조약문 머리에 “중국정부의 명을 받들어 結約한다”고 성명함으로써 조선이 청국의 ‘屬國’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다.323)宋炳基, 위의 책, 201∼203쪽.

 슈펠트가 다시 이홍장과 회담을 가진 것은 이응준이 북양아문을 다녀 간 뒤인 6월 하순(양 7월 중순)이었다. 이홍장은 조선정부에 서함을 보낸 사실을 알려주고, 천진에 머무르면서 조선으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리도록 권고하였다. 슈펠트는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0월 하순(양 12월 중순)에 가서 이홍장의 막료 羅豊錄을 통하여 조선 관원이,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려 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천진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조선 관원은 魚允中(1848∼1896)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324)Paulin, ibid, pp.485∼486.
李普衍, 앞의 글, 53쪽.
宋炳基, 위의 책, 203∼204쪽.

 조선정부는 영선사의 파견을 결정하고 이 사실을 청국에 통보까지 하였지만 그 출발은 계속 지연되었다. 그 까닭은 유학생 모집의 차질 등 준비 불충분이나 영선사를 金允植(1835∼1922)으로 改差한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주로 이 무렵에 격렬하게 전개된 斥邪運動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이응준을 다시 청국에 파견하여 영선사의 출발 지연을 알리는(9월 1일) 한편, 朝士視察團(紳士遊覽團)員으로 일본에 가 있던 어윤중에게 천진(북양아문) 방문을 지시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325)權錫奉,<領選使行에 對한 一考察-軍械學造事를 중심으로->(≪歷史學報≫17·18, 1962), 293∼295쪽.
宋炳基, 위의 책, 204∼207쪽.

 어윤중은 지시에 따라 천진으로 가 이홍장과 두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갖고(10월), 천진으로의 유학생 파견, 조청간 海禁의 해제와 통상, 조선 사절의 북경 상주, 미국과의 조약체결 등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특히 조약체결에 관한 협의는 구체적이어서 ‘另款’(제1관)에 조선이 중국의‘屬邦’이라고 밝히는데 합의하였고, 정조여의 밀함대로 조선측이 관원을 파견, 천진에서 협상한다는 데도 동의하였던 것 같다.326)宋炳基, 위의 책, 207∼208쪽.

 영선사 김윤식 일행은 예정보다 거의 한 달을 더 늦춘 9월 26일에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것은 8월 말에 발각된 大院君 계열의 쿠데타모의〔安驥泳事件〕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김윤식 등이 북경에 도착한 것은 11월 17일이었고, 禮部에서 정해 준 行期에 따라 22일 이홍장이 留駐하고 있는 保定으로 떠났다. 그와 조약체결에 관하여 협의하기 위해서였다.327)宋炳基, 위의 책, 208∼210쪽.

 김윤식은, 游智開의 주선으로, 11월 28일 保定府(直隷總督署)에서 이홍장과 제1차 회담을 가졌다. 역관 卞元圭도 참석한 이 회담에서 이홍장은 어윤중을 만나보았는지, 즉 속방조관에 대한 조선의 반응이 어떠한 것이며, 김윤식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표시하였다. 김윤식은 어윤중과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다만 자신의 사명이 조약체결 협의에 있다는 것만 밝혔다. 그리고 국왕이 정조여의 제2차 밀함에 찬동하고 있으나 國論이 한결같지 않아 조정하기가 어렵다하고, 조약 체결에 대한 淸帝의 宣諭를 요청하였다.328)宋炳基, 위의 책, 210∼211쪽.

 회담을 마친 뒤 김윤식은 辭陛할 때 국왕이 지시한 내용을 담은 밀함을 작성하여 이홍장에게 보내었다. 그 요지는 청제인 德宗이 다음 해(고종 19, 1882) 봄 朝鮮年貢使〔동지사〕가 돌아가는 편에 詔書를 내려 曉諭하고, 그 뒤를 이어 중국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美使와 같이 議約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약체결에 대한 국왕의 방침은 고종 19년 봄에 청제의 위엄을 빌리고 중국 관원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에서 미사와 협상, 조인한다는 것이었다.329)宋炳基, 위의 책, 211∼212쪽.

 그러나 그것은 천진에서 자신의 중재하에 협상하고 조선에서 중국 관원이 참여하는 가운데 조인한다는 이홍장의 구상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11월 30일 보정부에서 속개된 제2차 회담에서는 協商地 문제가 주로 거론되었다. 이홍장은 천진에서 협상하는 쪽으로 김윤식을 종용, 설득하였으며, 마침내 조서를 내려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였다. 천진에서의 협상이 부득이하다는 판단을 내린 김윤식은 곧 귀국하는 변원규 편에 이를 국왕에게 품의하게 하였다.330)宋炳基, 위의 책, 212∼213쪽.

 김윤식은 12월 1일에도 이홍장과 회동하였다. 제3차 회담인 셈이지만, 이홍장이 김윤식 등 영선사절에게 오찬을 베푸는 자리였으므로, 조약체결에 관한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회담을 마치자 김윤식 등은 유학생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천진으로 떠났고, 변원규는 12월 11일 천진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바로 변원규가 천진을 떠나던 날 김윤식은 10월 24일자로 된 국왕의 封書를 받았다. 그리고 뒤에 이홍장과 검토하게 되는 3종의 條約草稿도 이때 같이 받았던 것 같다.331)宋炳基, 위의 책, 213∼214쪽.

 봉서의 내용은 정조여의 밀함대로 천진에서 협상하고, 중국관원이 美使와 함께 서울 近港으로 와서 조인하도록 할 것이며, 동봉하는 조약초고를 이홍장과 협의하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왕이 갑작스럽게 이런 봉서를 보내 온 것은, 미사가 천진에 체류하고 있다는, 아마도 영선사 파견의 지체를 알리기 위하여 북양아문을 재방문했던(9월 1일) 이응준의 보고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綸音까지 내려 斥邪를 다짐한 국왕으로서는 미사가 갑자기 도래할 경우 국왕이 그를 불러 들였다는 비난을 받게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천진에서의 협상, 다시 말하면 이홍장의 중재하의 협상을 지시하게 되었던 것이다.332)宋炳基, 위의 책, 214∼215쪽.

 김윤식은 다시 保定으로 가 12월 19일 이홍장과 제4차 회담을 갖고, 국왕의 봉서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협상지 문제는 천진으로 정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 김윤식은 자신이 직접 슈펠트와 협상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영선사에게 전권이 부여되지 않았음을 들어 이를 거절하고, 조선의 국내 여건, 즉 척사운동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전권 파견을 고집하였다. 그 자신이 슈펠트와 직접 협상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결국 김윤식은 국왕에게 서함을 보내어 전권 파견을 요청한다는데 동의하였다. 그 대신 이홍장으로부터 슈펠트가 보정에 오는대로 한 번쯤 면담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김윤식은 슈펠트를 만나, 그의 갑작스런 조선행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333)宋炳基, 위의 책, 215∼218쪽.

 김윤식은 회담을 마치자 곧(12월 20일) 전권 파견을 요청하는 서함을 국왕에게 보내었다. 그리고 보정에 머무르면서 슈펠트의 도착을 기다렸다. 12월 26일에 이르러 김윤식은 이홍장의 요청에 따라 그와 제5차 회담을 가졌다. 이홍장은 봄에 천진에서 회담을 갖자는 슈펠트의 서함이 있었음을 밝히고, 천진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김윤식으로서도 슈펠트가 오지 않는 이상 보정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슈펠트와 조만간 협상을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예정된 사실이었으므로, 국왕이 보내 온 3종의 조약초고. 즉 탁정식이 일본에서 가지고 온 黃遵憲草稿 등을 참작한 李東仁草稿, 이용숙이 천진에서 가지고 온 이홍장초고(<朝鮮與各國通商約章>)를 이홍장에게 제시하고 검토를 요청하였다.334)宋炳基, 위의 책, 218∼219쪽.

 이홍장은 황준헌초고 제4관 영사관할권의 잠정적 인정, 제10관 歐美公例에 준한 關稅規則의 제정을 시세에 따른 착실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그리고 이동인초고를 검토하면서 조약내에 “조선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속방이지만 외교·내치는 자주하여 왔다”는 條文, 즉 屬邦條款을 넣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동인초고에는 ‘속방’에 관한 조문이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국왕이 조약체결에 관하여 그(이홍장)의 중재를 요청하는 봉서까지 보내오게 되자, 이홍장은 하여장이<주지조선외교의>에서 건의한바 속방조관의 명문화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335)宋炳基, 위의 책, 219∼221쪽.

 김윤식은 속방조관에 찬의를 표하였고, 이홍장이 거론한 여타의 조관에도 동의하였다. 그가 문제점으로 제시한 것이 있다면 敎堂 설립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국내의 척사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회담에서 슈펠트에게 제시할 중요 조약문 내용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中堂(이홍장)이 가르친바 1조의 大意(속방조관)를 頭腦로, 황준헌이 商量한바 兩款(황준헌초고 제4·10관)을 肯綮(요점)으로 삼되, 교당을 세우지 않는다는 1관(이동인초고 제10관)을 目下의 要務로 삼는다”는 것이었다.336)金允植,≪陰晴史≫(國史編纂委員會, 1958), 58쪽.
宋炳基 위의 책, 221∼222쪽.

 이홍장이 천진으로 돌아와 슈펠트와 협상을 시작한 것은 고종 19년 2월초순(양 3월 하순)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3월초(양 4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이홍장은 북양아문에서 슈펠트와 5차례에 걸쳐 회담하였다. 그리고 회담은, 이홍장이 김윤식에게 그처럼 고집하였던 것과는 달리, 피차간에 조약을 협의할 전권이 있다는 어떤 證憑文書도 제시함이 없이 진행되었다. 혹 있었다고 한다면 제2차 회담(2월 18일, 양 4월 5일) 때 이홍장이 김윤식과 제6차 회담(2월 17일)을 하면서 받아낸 국왕의 봉서(11월 25일자)를 제시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짐작될 뿐이다.337)Paulin, op.cit., pp.487∼490.
奧平武彦, 앞의 책, 93∼95쪽.
李普衍, 앞의 글, 59쪽.
宋炳基, 위의 책, 222∼224쪽.

 이홍장이 회담에 임하면서 크게 관심을 두었던 것은 김윤식과 합의한 속방조관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따라서 다른 나라들이 그대로 본받게 되면 조선이 중국의 ‘屬土’라는 사실은 결국 잊혀지고 말 것이라고 그는 우려하였다. 그가 회담을 앞두고 막료 周馥(1837∼1921)을 슈펠트에게 보내어 조약문에 반드시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지만 정치는 자주하여 왔다”고 밝힐 것을 요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회담을 갖기 직전에 슈펠트가 보내 온 조약초고에는 속방조관이 들어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조선의 자주 독립을 규정한 강화도조약을 저본으로 삼고 있었다.338)奧平武彦, 앞의 책, 87쪽.
李普衍, 위의 글, 51쪽.
宋炳基, 위의 책, 224∼225쪽.

 그리하여 2월 7일(양 3월 25일)에 열린 슈펠트와의 제1차 회담에서 이홍장은 조선은 고래로 중국의 ‘속방’이지만 내정·외교를 자주하여 왔다고 설명하고, 조미조약은 조선측이 후회하고 있는 강화도조약에 의거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이 회담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천진에서의 협상을 종용하였고 슈펠트가 조선으로 갈 때 중국 관원과 병선을 같이 파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시사도 하였다.339)宋炳基, 위의 책, 225∼226쪽.

 회담을 마치자 이홍장은 조약 초고를 작성하여 슈펠트에게 보내었다. 그 내용은 대체로 김윤식과 합의한 바를 반영시킨 것이었다. 물론 제1관에는 예의 속방조관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제10관에 국왕이 조약을 비준할 때 조약문을 청국 禮部에 移咨할 것도 규정하였다. 또 제1관 후반에 유사시 미국의 원조와 중재(居中調停)를 규정하고 있는 것도 특이한 것이었다.340)宋炳基, 위의 책, 226∼228쪽.

 슈펠트는 제1관을 제외한다면 이홍장초고와 큰 차이가 없는 조약안을 준비하여 북양아문으로 보내고, 이어 2월 18일(양 4월 5일)에 이홍장과 제2차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이홍장은 제1관, 즉 속방조관을 고집하였다. 그는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중국은 협상에 관여할 필요도, 관원을 동행시킬 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슈펠트의 뜻도 ‘決絶’하여 결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341)Paulin, op.cit., pp.491∼492.
奧平武彦, 앞의 책, 108∼109쪽.
李普衍, 앞의 글, 61∼62쪽.
宋炳基, 위의 책, 228쪽.

 이홍장은 2월 22·23일(양 4월 9·10일)경에 슈펠트와 제3차 회담을 갖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즉 조약을 체결한 뒤 조선측에서 예의 속방조관 내용을 미국무성에 조회하는데 동의한다면 제1관 중 속방조관을 철회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제의에 슈펠트도 일단 동의하였으므로 협상의 장애는 극복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마침 총리아문을 방문했던 미국대리공사 홀콤(Holcombe, Chester)이 속방조관에 동의함으로써 다시 논란이 일게 되었다.342)Paulin, ibid., pp.492∼493.
奧平武彦, 위의 책, 112∼113쪽.
李普衍, 앞의 글, 61∼62쪽.
宋炳基, 위의 책, 228∼230쪽.

 이홍장은 천진에 온(2월 24일) 홀콤과 회담을 갖고 속방조관의 삽입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홀콤은 조약체결에 관하여 전권을 띠고 있는 슈펠트가 반대하고 있음을 들어 총리아문과 합의한 바를 철회하였다. 이홍장은 본국 정부에 請訓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슈펠트는 국무성에 타전하였지만, 回信은 여러 날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343)Paulin, ibid., p.493.
李普衍, 위의 글, 62쪽
宋炳基, 위의 책, 230쪽.

 회신이 없는 것은 필경 미국 정부가 속방조관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이홍장은 2월 27일(양 4월 14일)과 3월 1일(양 4월 18일) 홀콤이 참석한 가운데 슈펠트와 제4·5차 회담을 갖고, 여타 조관에 대한 토의를 계속하여 전문 15관으로 된 조약문에 날인·서명하였다. 가조인한 것이지만 조선측이 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수정할 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조약은 이미 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344)위와 같음.

 15관 중 제1관은 공란으로 남겨 두었다. 혹 있을지도 모를 미국의 回電을 기다려 속방조관을 싣거나 삭제하기 위해서였다. 자연 원호·중재조관은 제2관으로 옮겨 졌다. 또 이홍장초고 제10관 조약문의 禮部 移咨 규정도 삭제되었다. 속방조관이나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조항을 배제하려는 슈펠트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345)宋炳基, 위의 책, 231쪽.

 결국 이홍장은 조약문에 조선이 중국의 ‘屬邦’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데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조약문 말미에 漢·英文 각 3통의 조약문(1통은 이홍장초고 제10관의 취지를 살여 청국에 보내는 것으로 생각된다)작성을 규정하고, 그 밑에 중국 연호인 光緖를 명기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그 대신 이홍장은 미진한 바를 屬邦照會를 통하여 보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슈펠트에 의하여 양해되었다. 그가 조선으로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다.346)Paulin, op.cit., pp.493∼494.
宋炳基, 위의 책, 231∼232·257·263쪽.

 속방조관을 예외로 한다면, 가조약문에는 이홍장의 견해가 존중되어 크게 반영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슈펠트의 양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속방관계를 제외한 여타의 조문에 대하여는 국무성 훈령에 저촉되지 않는 한 애써 반대하려 하지 않았다. 고종 18년 5월 하순 천진에 도착하여 1년 가까이 체류하고 있던 그로서는 본국 정부에 대한 입장이나 중국에 와 있는 외국인에 대한 체면상 조약을 꼭 성취시켜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347)奧平武彦, 앞의 책, 94∼96·116∼119쪽.
宋炳基, 위의 책, 232쪽.

 우선 가조약문에는 이홍장초고의 내용이 상당수 반영되어 있다. 중요한 것을 든다면 ① 치외법권〔領事裁判權〕의 잠정적 인정(이홍장 초고 4관:가조약본 5관), ② 미국인에 관계된 조선인 범죄의 조선 관원·법률에 의한 처단과 미국측의 조선범죄인 은닉·비호 금단(7·8관:5·11관), ③ 조약상 미진한 내용은 5년 뒤 다시 의정하되 통상에 관한 상세한 章程은 만국통례에 의한다(9관:13관), ④ 영사는 관원이어야 하고 상업에 종사할 수 없으며, 辦事가 공정하지 않을 때 미국공사와 협의하여 그 비준을 철회할 수 있다(2관:3관), ⑤ 수입세율은 생필품 100의 10, 사치품 100의 30으로 한다(5관:6관), ⑥ 租地는 조선 영토의 일부이며 鴉片〔洋藥〕을 엄금한다는 것(6관:7·8관) 등이 있다.348)宋炳基, 위의 책, 232쪽.

 또 가조약본에는 이홍장초고에 없는 새로운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가령 ⑦ 관세자주권의 인정(6관), ⑧ 흉년에 한해 미곡 수출의 금지(9관), ⑨ 미국에 대한 최혜국대우를 인정하되 타국에 대한 우대가 專條〔協約〕에 의한 것이라면 미국과도 협약을 맺은 뒤 우대할 수 있다는 것(15관) 등이 그러한 것이다. ⑦은 이홍장의 견해를 반영시킨 것이었다고 생각되며, ⑧은 김윤식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홍장이 요청한 것이었다. 또 ⑨의 전반은 슈펠트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지만, 후반은 최혜국대우를 가급적 억제하려는 이홍장의 견해를 반영시킨 것이었다.349)宋炳基, 위의 책, 232∼233쪽.

 이와 같이 볼 때, 이홍장은 가조약을 체결함에 있어 되도록 불평등성을 배제하고(②·⑤·⑨), 또 장차 배제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는 한편(①·③) 조약에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불이익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노력한 것(④·⑤·⑥)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중국이, 일본도 그러하였지만, 서양 여러 나라에 대하여 문호를 개방하는 과정에서 겪은 쓰라린 체험을 통하여 얻은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장차 이 조약을 토대로 중국이 서양 여러 나라와 체결한 불평등·불이익한 조약을 개정하려는 의지도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350)奧平武彦, 앞의 책, 117∼119쪽.
李普衍, 앞의 글, 68∼69쪽.
宋炳基, 위의 책, 233쪽.

 이홍장은 또 비록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긴 하지만, 제2관에 원호·중재조관을 반영시킴으로써 조선에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비교적 공평한 나라로 알려진 미국의 원조와 중재를 기대하였으며, 제12관(이홍장초고 제7관)에서 조선이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파견하는 유학생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배려하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은 앞에서 언급한 불평등성·불이익성의 배제와 함께 이 가조약본이 갖고 있는 긍정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351)奧平武彦, 위의 책, 117∼118쪽.
宋炳基, 위의 책, 233쪽.

 김윤식이 이홍장과 합의한 교당 설립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항은 가조약본에 반영되지 않았다. 교당은 미국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이홍장은 조약체결 협상을 깨뜨릴까 우려하여 처음부터 거론하지 않았다. 그리고 뒷날 미국측이 교당 설립을 요청할 경우 조약상에 규정이 없음을 들어 거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는 것이 청국측의 설명이었다.352)金允植,≪陰晴史≫, 112쪽.
宋炳基, 위의 책, 254쪽.

 이홍장은 회담을 마치면서, 슈펠트에게 그가 조선으로 갈 때 중국 관원을 동행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그가 그런 약속을 하게 된 것은 朝·美 양측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의도하는 바는 조약체결을 중국이 계속 ‘主持’하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관원으로 ‘精明幹練’하고, ‘交涉公法’에 밝은 馬建忠(1845∼1899)이 발탁되었다. 하여장이<주지조선외교의>에서 건의한 바를 받아들여 취한 조처였다.353)宋炳基, 위의 책, 233∼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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