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5. 개항의 역사적 의의
  • 1) 강화도조약과 자본주의 세계체제

1) 강화도조약과 자본주의 세계체제

 ‘西勢東漸’은 역사적으로 서구의 동양진출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서세의 동점현상은 16세기 이래 선교사를 비롯한 종교의 전파를 시작으로, 상인의 진출에 의한 시장권의 확보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서세의 동아시아 진출과 그 성격은 전근대사회의 그것과 판이한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진출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주체와 계기, 그리고 외압의 질적인 차이점이라 할 것이다.

 18세기 중반부터 산업혁명을 거쳐 면업 중심의 산업 근대화를 급속하게 추진하였던 영국은 19세기에 접어들어 중상주의 국가에 의한 독점무역의 폐지와 자유무역 등을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그 결과 세계무역시장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히 높아져 1800년 경에는 세계무역의 33%를 차지함으로써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830년대 이후 프랑스·독일을 비롯하여 미국과 러시아 등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의 산업화가 급속히 진척되면서 해외에서의 시장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제2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서구의 산업은 석탄과 철에 기초한 산업에서 철강·석유·화학·전기에 기초한 산업으로 재편되었고, 새로운 산업의 기초는 비서구지역으로부터 원료와 에너지원을 끊임없이 공급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문에 비서구지역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1873년 이후 세계경제가 대공황에 직면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무역정책 기조도 자유무역에서 보호주의 혹은 신중상주의 정책으로 변화하면서 경쟁과 갈등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같은 경제부문의 변화는 그 질과 양이 증폭되면서 이른바 신제국주의 현상이 등장하였다. 신제국주의는 19세기 전반기의 자유무역에 근거한 제국주의와는 현저하게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이었는데, 대부분의 국가들이 보호무역 정책으로 전환하였으며, 영토확장이 전 세계적 규모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강화되었으며, 자본주의 국가들내의 지배엘리트, 군부, 그리고 제국주의적 단체들 사이에 국가자원의 조직화 등을 강조하는 세계관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산업구조의 재편과 변동의 시기에 영국의 대응은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였고, 독일·미국 등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19세기 후반기에 들어 일본이 이들 국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448)김기정,<19세기 후반기제국주의와 동아시아>(≪1894년 농민전쟁연구 3≫, 역사비평사, 1993), 11∼15쪽. 19세기 중후반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서구의 진출은 이와 같은 서구자본주의 국가들간의 경쟁을 배경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19세기 중후반 서구세력의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개방 압력은 그 시기와 계기, 그리고 주체에 따라 상이하게 가해졌고, 이러한 차이는 결국 조선·청국·일본 3국이 각기 다른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우선 영국정부는 1757년 이래 朝貢貿易의 원칙과 방식에 입각한 제한무역의 형태로 실시되어 왔던 이른바 중국과의 廣東무역체제를 청산하기 위해 1832년 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 독점권을 폐지하고 중국시장의 개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영국은 압도적인 군사적 우세를 바탕으로 아편전쟁(1839∼42)에서 승리하였고, 그 결과 南京條約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내용에는 홍콩의 할양, 광동·上海 등 5항구 개항, 公行의 독점무역 폐지 등이 들어 있었고, 이어 협정관세제, 영사재판권, 최혜국조관, 개항장의 군함정박권 등이 추가되었다. 한마디로 이 조약은 중국의 관세자주권과 사법권을 박탈하고, 중국에 대한 특권을 균점할 뿐 아니라 군함을 임의로 파견할 수 있는 권리 등을 규정한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러한 불평등조약은 미국·프랑스·스웨덴·러시아 등과도 잇따라 체결되었다.

 그러나 남경조약 체결 이후에도 기대했던 것만큼 중국에 대한 수출이 증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시장을 지속적으로 개방·확대시키기 위해 또다시 砲艦外交를 강행하였다. 1856년에 애로우(Arrow)호사건을 빌미로 영·불 연합군은 廣州와 天津을 점령하고 천진조약을 맺었으며, 1860년에는 이 조약의 비준을 중국이 거절하자 급기야 北京을 침략하여 북경조약을 체결하였다. 두 조약을 통해 서구 열강은 개항장을 증가시켰고, 아편무역을 공인토록 하였으며, 九龍반도를 할양받는 등 그 이전에 미처 확보할 수 없었던 각종 특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중국의 주요 지역이 서구 열강에 개방됨으로써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급속하게 편입되었다.

 한편 일본에 대한 개방 압력은 1848년 스페인으로부터 캘리포니아를 할양받아 태평안 연안 국가로 등장하였던 미국에 의해 시도되었다. 특히 미국의 일본진출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개발되고, 아메리카 서해안으로부터 중국을 연결하는 태평양 정기항로 개척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미국은 1853년 페리(M. C. Perry)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개항을 요구하는 국서를 제시한 후, 다음해 1월 9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조약체결을 요구하였고 3월 조약체결에 성공하였다. 이 조약에는 시모다(下田)·하코다테(箱館) 2항구의 개항, 음식료·땔감 등의 공급, 조난선원의 구제 등이 규정되었고, 나아가 일방적인 최혜국조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거의 동일한 내용의 조약이 영국·러시아·네덜란드 등과도 체결되었다.

 1858년에는 양국간에 본격적인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미일통상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을 맺게 된 직접적인 배경에는 영·불 연합군의 천진 점령을 내세워 일본에게도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이 깔려 있었다. 이 조약은 요코하마(橫浜)·나가사키(長崎) 등 4개 항구의 추가 개항, 에도(江戶)·오사카(大坂)의 개시, 협정관세제, 영사재판권, 거류지 설치 등이 규정된 불평등조약이었으며, 관세율만 달랐을 뿐 같은 해 체결된 천진조약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로써 일본도 중국에 이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조선만이 유일하게 서구 열강에 의해 개방되지 않은 나라로 남게 되었다.

 영국의 상선 로드 앰허스트호가 조선에 대하여 통상을 요구하였던 1832년이라는 시점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영국정부가 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 독점권을 폐지하고 중국시장의 개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영국산업자본주의 세력이 동아시아지역에서 전개하였던 시장개방 압력의 대상에 조선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조선에 대한 자본주의 열강의 개방 요구는 중국 및 일본시장에 대한 개방 요구와 동일한 시기에 시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청국과 일본이 영국과 미국의 무력행사에 굴복하여 각기 1842년과 1854년 불평등조약을 체결,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었지만 조선은 이들 국가와 다른 경로를 밟았다. 인접국가인 청국·일본과는 달리 조선에 대한 서양의 개방 압력은 시기적으로 20여년이 지난 1866년(병인양요)과 1871년(신미양요)을 전후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가해졌다. 군사력을 앞세운 개방 요구는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이었던 미국과 프랑스의 무력도발로 나타났다.

 그러나 조선은 1860년대 이후 두 차례의 양요를 치르면서 서구 열강의 우월한 군사력을 직접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당시 서구 열강은 거대 시장인 중국의 개방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데다가 국내문제로 말미암아 조선의 개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국가권력의 집중화를 시도하던 일본이 서구 열강의 직간접적인 지지를 받아 조선의 개항에 앞장섰다. 쇄국을 견지했던 대원군정권이 붕괴하고 고종이 친정체제를 출범시킨 후 일본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치자 일본은 이른바 ‘征韓’으로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돌리는 동시에 국권 확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875년 운요호(雲揚號)사건을 일으킨 뒤 다음해 서구 열강의 포함외교를 모델로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조일수호조규에 뒤이어 조인된 각종 문서에는 부산·원산·인천 등 3항구의 개항, 영사재판권, 연안측량권, 일본화폐 유통, 미곡의 자유로운 수출, 최혜국조관, 그리고 무관세무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원료공급지, 상품판매시장, 그리고 자본투하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갈등을 연출하면서 전지구적으로 확대되었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조선의 개항에 의해 비로소 전지구적인 연결망 구축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은 강화도조약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체에 편입되었으나 실제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직접적으로 개방되었던 것은 강화도조약 이후 6년이 지난 뒤 시도되었던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과 1883년 조영수호조약을 통해서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청국·일본과 달리 조선이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편입되었던 19세기 후반은 1780년대에 이미 자국의 산업혁명을 일단락지었던 영국과 1830, 40년대에 산업혁명을 수행했던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이 동아시아지역에서 그들의 세력권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던 시기였다. 조선에 대해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였던 세력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로 이 지역에서 세계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영국이 아니라, 1830년대 내지 1840년대 국내 산업혁명을 경험하였던 후발자본주의 국가 프랑스와 미국이었으며, 실제로 조선을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강제적으로 편입시키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세력은 동일문명권내의 인접국 일본이었다.

 그 결과 1876년 당시 조선이 직면했던 외압의 규모와 성격은 1840, 50년대 초반 열강들간의 견제나 간섭이 없는 가운데 영국과 미국에 의해 개항된 청국·일본이 외부로부터 받았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특히 개항의 직접적 계기가 자본주의 열강과 불평등조약 체계 아래 있었던 같은 문명권의 일본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이 이후 조선이 새로운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데 커다란 장애를 초래하였다.

 개항 이후 조선의 국제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지역에서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華夷질서가 무력을 앞세운 서양열강의 침략으로 해체되어 서구 중심의 萬國公法的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가운데 조선과 청국, 조선과 일본의 관계와 역할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하는 점에 대해 다양하게 분석을 시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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