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2. 개화사상의 발전
  • 1) 동도서기론의 대두

1) 동도서기론의 대두

1880년대 초에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가 분기되기 전부터 개명지식인들은 이미 자기의 도를 지키면서 다른 나라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의 경향을 띠고 있었다. 사실 동도서기론의 연원은 조선에 처음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등을 포괄하는 ‘西法’이 수용된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대두한 동도서기론의 직접적인 연원은 개항 이전에 박규수·최한기 등의 주장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러다가 1876년 개항 후 서양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되자 1880년대 초부터 동도서기론은 申箕善·郭基洛을 선두로 하여 제창되었다.

박규수는 1861년(철종 12)과 1872년(고종 9)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두 차례 중국을 다녀온 후 중국이 서양의 기술을 배워 무기와 선박을 자립적으로 생산하여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제 정부가 서양물품을 배척만 할 것이 아니라 서양대포와 화륜선 등을 수용하여 그 제조법을 익힘으로써 부국강병의 방법을 모색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특히 해양세력의 군사적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의 방어를 강화하고, 군사력의 증강과 군사무기의 개발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열강 속에서 고립을 면하기 위하여 미국 등 각국과 수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082) 孫炯富,≪朴珪壽의 開化思想硏究≫(一潮閣, 1997).

그런데 박규수의 이러한 주장이 있기 오래 전에 이미 최한기는 백성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계를 제조하는 자가 있으면 높은 벼슬을 주어 앞날의 기술의 발달을 권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서양의 기계에 관심을 갖고≪心器圖說≫·≪陸海法≫등을 저술하여 서양의 기계를 적극 수용하여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서양의 이로운 기계인 선박·대포·풍차·직조기 등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서양의 종교가 천하에 퍼지는 것은 근심할 필요가 없고 오직 실용적인 기계를 다 수용하여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일 뿐이라고 하였다.083) 崔漢綺,≪推測錄≫권 6, 推物測事, 東西取捨. 최한기는 서구 과학기술의 수용에 대해서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五倫과 仁義禮智는 천하에 보편적인 人道로서 바뀔 수 없는 도라고 하면서 서양인에게도 윤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의 정치·법제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따라서 최한기는 이미 동도서기론에서 일보 나아가 西道의 수용론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면 동도서기론의 논리구조는 어떤 것인가. 우선 동도서기론은 중국의 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和魂洋才論과 마찬가지로 19세기에 서양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조선 지식인들이 제창한 논리였다. 즉 우리의 전통윤리와 도덕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것이 그 주요 목적이었다. 이 동도서기론의 논리구조는 유교의 전통적 개념인 도와 기의 관계에 의해 설명된다. 즉≪周易≫ 繫辭傳의 “形而上을 道라고 이르고 形而下를 器라고 이른다”는 말이 송대의 학자 程顥에 이르러 道器合一로 이해되고, 朱熹 역시 정호의 논리를 받아들여 도와 기의 합일을 부연 설명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도와 기에 대한 인식은 李珥에 이르러 도와 기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후 기호학계에서는 이이의 도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이러한 논리가 지배적인 主氣論的 학풍이 지속되었다. 동도서기론자인 신기선과 김윤식은 둘 다 기호의 대표적 유학자인 任憲晦와 유신환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따라서 이들 역시 도와 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논리에 근거하여 도와 기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또 기를 떠나서는 도를 구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084)그러나 동도서기론의 논리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도와 기는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일면이 있지만,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경우이든 서양의 도와 서양의 기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섞이지 않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서양의 기를 받아들이면 자연히 그 기 속에는 서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신기선이 동도서기론의 논리적 약점을 인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金漢燮에 의하여 그 약점은 날카롭게 지적되었다(金漢燮,≪吾南文集≫권 13, 雜著, 農政新書序條辨). 특히 신기선은 도와 기에 의거하여 논리적으로 동도서기론을 제기한 인물이었다.085) 申箕善,≪農政新編≫序.

그런데 1881년 동도서기론이 상소의 형태로 공식적으로 표현된 것은 곽기락에 의해서였다. 그는 기계의 제조법이나 농업·임업에 관한 책으로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가려서 사용하기를 주장하였다. 그는 서양사람이 싫다고 하여 서양의 좋은 기술까지도 아울러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086)≪承政院日記≫, 고종 18년 6월 8일. 이와 같이 곽기락은 우리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하여 서양의 도덕과 기술을 분리하여 서양도덕은 배제하고 기술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동양의 도덕과 서양기술이 서로 방해되지 않고 병존하는 관계가 설정되었다.

1876년 개항이 이루어진 후 정부에서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파악하고 일본과 중국의 새로운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그들의 선진 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1880년 김홍집은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 黃遵憲으로부터≪易言≫을 얻어 왔다. 그리고 황준헌이 지은 조선의 외교방략을 적은≪朝鮮策略≫도 받아 왔다. 이 두 책은 1880년대의 개화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조선책략≫에서는 ‘自强’이 특히 강조되었고,≪이언≫의 내용에는 부국강병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었다. 1840∼50년대에 조선에 들어온≪해국도지≫나≪영환지략≫이 해외지식을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반면,≪이언≫의 핵심사상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어 산업을 개발하고 통상을 장려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만국공법을 실시하여 외국과 대등한 외교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087) 李光麟,<「易言」과 韓國의 開化思想>(앞의 책, 1985) 참조.

1881년에 조선정부는 紳士遊覽團(朝士視察團)과 領選使를 각각 일본과 청국에 파견하였다. 신사유람단은 일본에 건너가 정치·군사·교육·교통·농업·과학기술 등 다양한 선진문물을 자세히 탐지하고 돌아왔다. 또한 이 신사유람단의 파견과 함께 추진하였던 영선사의 일행에는 38명의 기술유학생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9월 26일 조선을 출발하여 12월 6일 天津에 도착하여 機器廠의 南局 및 東局, 水師學堂, 水雷學堂에 배속되어 기술을 배웠다. 영선사 김윤식은 당시 국제관계 속에서 국방력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서구열강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사를 훈련하고, 군사를 훈련하기 위해서는 무기를 예리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088)≪高宗實錄≫, 고종 18년 11월 4일. 따라서 영선사 일행의 주요 목적은 앞으로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하여 화약·탄약의 제조법과 이와 관련되는 전기·화학·제련·기초기계학 등의 기술습득과 무기를 사오는 일이었다.

영선사 일행이 천진에서 기술교육을 받고 있던 도중에 이들은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김윤식은 1882년 7월에 일시 귀국하여 8월 5일 자신이 대신 지은 국왕 고종의 교서에서 정부가 동도서기론을 앞장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저들(서양)의 敎는 사특하니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치장한 여자를 멀리하듯이 해야 하지만, 저들의 器는 이로우니 진실로 이용후생을 할 수 있다면 농업·양잠·의약·병기·배·수레의 제도는 무엇을 꺼려서 피하겠는가. 그 교는 배척하되 그 기는 본받는 것이 진실로 병행하여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강약의 형세가 이미 크게 차이가 벌어졌는데, 만약 저들의 기를 본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들에게 모욕당하고 저들이 욕보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高宗實錄≫, 고종 19년 8월 5일 및 金允植,≪雲養集≫권 5, 綸音布諭, 曉諭國內大小民人 壬午).

고종의 교서는 그 뒤 동도서기론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18세기 말 정조 때부터 순조·헌종을 거쳐 흥선대원군 집권기까지 조선조정이 줄곧 견지해 오던 위정척사정책의 변화가 공식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상징적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이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직후에 전국 고을에 세웠던 斥和碑가 뽑혀졌다. 그러자 전현직 관료는 물론 재야유생층에서도 동도서기론의 주장이 우후죽순처럼 대두되었다.

1882년 8월 23일 충주 幼學 池錫永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그것을 연구하고 교육시키는 연구기관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그는≪萬國公法≫·≪朝鮮策略≫·≪普法戰紀≫·≪博物新編≫·≪格物入門≫·≪格致彙編≫등의 외국서적과 金玉均의≪箕和近事≫, 朴泳敎의≪地球圖經≫, 安宗洙의≪農政新編≫, 金景遂의≪公報抄略≫등은 개화에 필요한 서적들로서 시무를 위하여 필요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열람하게 하자고 하였다. 또 각국의 수차·농기구·직조기·화륜기·무기 등을 사들일 것을 주장한 다음, 각 도의 모든 고을에 공문을 발송하여 그 고을의 뛰어난 유생과 관리를 각각 1명씩 선출하여 개화관계 서적과 기계를 연구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지석영의 주장은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고 이용후생을 기하려는 목적에서 제기된 것이었다.089)≪承政院日記≫, 고종 19년 8월 23일.

또한 直講 朴淇鍾도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소를 올리었다. 1882년 9월 5일에 올린 소에서 그는 서양의 교는 멀리하되 그 기는 이로운 것으로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며, 따라서 농업·양잠·의약·무기·선박 등의 기술을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090)≪日省錄≫, 고종 19년 9월 5일.
朴淇鍾,≪竹圃集≫권 2, 疏 壬午封疏.

한편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高穎聞은 보다 진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모두 7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서양의 여러 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그 나라의 풍속과 경제를 살펴보고 우의를 두텁게 한 뒤, 숙련된 여러 분야의 기술교사를 초빙하여 우리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서양의 기예를 학습시킬 것, 둘째 정부 외의 기관으로 公議堂을 따로 설립하고 時務를 아는 인사를 특별 채용하여 시무에 전념케 할 것, 셋째 광산을 개발할 것, 넷째 50호를 1區로 편제하여 1구에 區長 1명을 뽑아 정하고, 구장 휘하에 매 구마다 4명씩 두어 구내의 도적·수재·화재·음주의 폐단을 순찰하여 조사하게 할 것, 다섯째 商會所와 국립은행을 서울에 설립할 것, 여섯째 인천항은 부산이나 원산항과 달라 삼남지방에서 들어오는 漕運의 요충지이고 서울의 인후부에 해당되니 해군기지를 창설하여 그 지역을 튼튼하게 할 것과 마지막으로 불필요한 관직과 雜貢의 혁파를 주장하였다.091)≪承政院日記≫, 고종 19년 9월 22일.

동도서기론자들의 일차적 목표는 과학기술서적을 통하거나 서양의 기술교사를 초청하여 그들의 과학기술을 배워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고영문의 상소에서 보듯 이제 동도서기론은 종래의 과학기술이나 농업·의약의 수용에 그치지 않고 행정·경제제도 등의 개혁이 미약하게나마 제시되고 있었다.

이처럼 지석영·박기종·고영문 등은 한결같이 서양의 과학기술과 농업·상업·광업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보다 외국이 우수한 측면이 있다면 수용해야 된다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2년 10월 14일 민간인도 火輪船·風帆船을 구매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국왕의 분부가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이제 서양의 과학기술 수용이 민간에까지 확산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재야유생층의 상소에서는 그들이 동도에 대해서보다는 서기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것은 바로 1880년대 초 조선의 현실이 무엇보다도 동도를 지키는 문제보다도 서기를 하루빨리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측면이 더 강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들이 결코 동도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기선·김윤식 등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동도서기론의 논리를 1882년 12월 22일에 尹善學이 올린 소에서 살필 수 있다.

아! 西法이 나오게 되자 그 기계의 정밀함과 부국의 방법에 있어서는 비록 周를 일으킨 呂尙이나 蜀을 다스린 諸葛亮이라 할지라도 그 사이에 간여하여 논의할 수 없게 되었다. 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道가 된 것이다. 수레·배·군사·농업·기계는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器가 되는 것이니, 제가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기이지 도가 아닙니다(≪承政院日記≫, 고종 19년 12월 22일).

윤선학은 도를 군신·부자·부부·장유·붕우의 윤리라고 보고, 대신 기는 수레·배·군사·농업·기계 등 백성과 국가에 편리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서 그는 동양의 도를 유지시켜 나가는 것을 여전히 강조하는 한편, 서양의 과학기술의 측면을 조속히 배워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들기를 바랐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소는 趙汶·卞鋈·趙聲敎·鄭暎朝·柳完秀·卞應洙·金源濟 등에 의해서도 올려졌다. 이들은 주로 무기에 관심을 표명하고 외국의 선진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소에 대해 당시 정부로서도 시무로 인정하여 정책에 반영시키겠다는 의지를 국왕의 批答을 통하여 밝히었다.

그런데 동도서기론을 주장한 인물들은 그 계층이 현직관료를 비롯하여 전직관료·재야유생·무과급제자 등 매우 다양하였다. 김윤식·신기선·곽기락·박기종·변옥·변응수·김원제 등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그 후 관료를 역임했거나 관료로서 동도서기론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들 가운데 김윤식·신기선·박기종 등은 소년시절에 성리학에 깊이 전념하였다가 그 뒤 官界에 진출하여 서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도서기론으로 사상적 전환을 하였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은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목표에 있어서는 김옥균·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의 사상과도 공조체제를 유지하였다. 다시 말해 1880년대 초부터 갑신정변 직전까지 동도서기론자와 급진개화파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개화정책의 추진에 함께 참여하였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 반면 동도서기론자들이 동도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주장하자, 오히려 재야의 위정척사론자와 심한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동도서기론자라 하여 그 사상과 행동노선이 반드시 일치한 것만은 아니었다. 신기선과 김윤식의 정치적·사상적 차이는 이미 1880년대부터인데, 김윤식이 친청파인데 비하여 신기선은 적어도 갑신정변 직전까지는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신기선은 갑신정변 직후 급진개화파와 결별을 선언하고 보수노선을 확실히 정하였던 반면, 김윤식은 갑신정변 뒤에도 급진개화파가 못다 이룬 정책을 일부나마 이루어 나가면서 아울러 서양과의 외교관계나 서양의 종교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렇지만 김윤식이나 신기선의 경우 變法의 성향을 띤 개화사상으로의 전환 가능성을 찾기는 어려우며 끝가지 동도의 우월성을 지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동도서기론은 유교가 지배하는 당시 조선사회에 서양의 사상과 과학기술이 들어오자, 과도기적으로 서양 과학기술을 수용하기 위하여 제기되었던 하나의 사조였다. 따라서 동도서기론이란 개화파 내부에서 동도를 강조하는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부류와 위정척사파 내부에서 일탈하여 서양 과학기술을 인정하는 진보적 성향을 띤 인사들의 자기보존 논리를 가리키는 다소 모호한 성격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온건개화파나 급진개화파 모두의 내면에 내재된 논리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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