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2. 개화사상의 발전
  • 2)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2)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개항 이후 조선사회는 새로운 문물의 접촉으로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80년대 초에는 조선사회에 ‘開化’와 ‘自强’이라는 말이 풍미하고, 이에 대응하는 위정척사운동이 그 어느 시기보다 강하게 일어나 개화와 척사의 갈등은 격렬했으나, 1882년 임오군란을 고비로 척사는 고개를 숙이고 대신 정부정책은 개화로 급격히 전환하고 있었다

이 ‘개화’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兪吉濬이 “인간과 관련된 모든 사물이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경지에 다다름을 이르고, 모든 사물을 궁구하고 경영하여 날로 새롭기를 기약하는 것”이라 하여 개화를 문화가 날로 새로워짐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유길준의 개화에 대한 개념정의는 곧 개명화 혹은 문명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092) ‘개화’의 개념에 대해서는 李光麟,<開化思想 硏究>(앞의 책, 1985) 참조.

1880년대 개화파는 크게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임오군란 이전까지는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명하기는 어렵다. 아마 온건개화파든 급진개화파든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동도를 쉽게 포기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서기보다 서양의 정치, 사상이나 종교를 포괄하는 서도를 언제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의 여부가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구분에 주요한 준거가 될 것이다.

우선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분기의 싹은 1876년 겨울 박규수가 죽은 뒤로 시국인식과 개혁방법론을 놓고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박규수가 죽은 뒤에도 갑신정변 직전까지 유홍기의 지도를 계속 받았던 반면, 김윤식 등 온건개화파는 당시 실권을 쥔 정치세력과 결탁해 있었다. 또한 온건개화파는 국내 정치세력뿐만 아니라 청국과도 연결되어 있어 1884년 갑신정변이 수습된 뒤에도 그들은 당분간 정치적으로 살아 남아 정치·경제·교육·기술 등의 측면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온건개화파는 청국과의 전통적 국제관계를 중시하면서 청국의 양무운동을 점진적 개혁의 모델로 삼았다.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은 당시의 집권세력의 구성원이었고 이들은 조선사회의 점진적 개혁을 바랐다. 따라서, 급진개화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 성향이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종교와 사상은 우리 것을 고수하기를 바랐다.

갑신정변 1년 전에 간행된≪漢城旬報≫의 기사는 당시 개화파의 사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1850년대부터 1880년대 초까지만 해도≪해국도지≫와≪영환지략≫을 읽고 일부 지식인만이 세계 각국에 대한 신지식을 갖게 되었던 것을 이제 이 신문을 통하여 일반 백성들도 신지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한성순보≫의 간행취지는 일반 백성의 계몽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개화사상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한성순보≫서문에는 개화파의 개화에 대한 기본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즉 나라 안팎의 정세 변화와 세계 각국의 문물제도를 알리고 백성의 견문을 넓힌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093)≪한성순보≫의 주요내용은 각 대륙의 정치·지리에 관한 지식 보급을 위한 논문으로 論洲洋, 地球圖解, 地球論(창간호), 歐羅巴洲(제2호), 亞米利加洲(제3호), 亞非利駕洲(제4호), 阿西亞尼亞洲(제5호) 등이 있고 선진 각국의 제반 사정 및 제도에 관한 것(英國誌略, 法國誌略, 美國誌略, 德國誌略), 자연과학 분야의 새로운 지식에 관한 것(恒星動論, 電報說, 歲星圖說, 測天遠鏡), 그 밖에 각국의 군비(俄國海軍)나, 국제분쟁에 관한 것(深春信息), 청·러국경분쟁의 내용에 관한 것(安南事起源)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한성순보≫를 통해 백성을 계몽할 때에 가장 많이 거론한 구체적인 사물은 부국강병의 도구가 되는 선박과 전선 등이었다.094)≪漢城旬報≫창간호,<旬報序>(1883). 그리고 부강의 기초로 상업을 강조하고 통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인식하여 상업과 통신의 역할을 중시하였다.095)≪漢城旬報≫9호,<電報說>. 갑신정변 전까지≪한성순보≫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적어도 사상적 측면에서는 온건·급진개화파가 합심하여 국민을 계몽하는 데 앞장섰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 실패를 계기로 온건개화파의 개화에 대한 인식도 급속도로 달라졌다. 김윤식은 개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개화에 대하여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歐洲의 風을 듣고 그 俗을 변화하는 것을 개화라 말하는데 東土는 문명의 땅인데 다시 어찌 개명시켜 변화할 것이 있겠는가. 갑신 諸賊들이 구주를 매우 높이고 堯·舜을 박대하고 孔·孟을 폄하하여 彛倫의 도로써 野蠻이라 이르고 그 도로써 바꾸고자 하여 걸핏하면 개화라 하니 이는 天理가 끊어지고 갓과 신이 거꾸로 된 것이다(金允植,≪續陰晴史≫상, 國史編纂委員會, 1960, 156쪽).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야의 분위기는 썰렁하여 급진개화파는 성토의 대상이었고 당분간 ‘개화’라는 말을 입에 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온건개화파는 국민계몽이나 교육사업, 의료사업, 통신사업 등에 있어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민에게 개화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널리 계몽·홍보하기 위해 1886년 1월≪漢城周報≫를 창간하였고, 나아가 학교교육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체계적으로 수용·학습할 것을 주장하였다.096)한철호,<시무개화파의 개혁구상과 정치활동>(≪한국근대 개화사상과 개화운동≫, 신서원, 1998).

1886년과 1887년에는 어윤중과 김윤식 등이 정계에서 비록 실각하였으나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발전은 지속되고 있었다. 유길준은 갑신정변 실패 이후부터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와 관계를 끊었으나 전날의 급진개화파의 관계 때문에 1885년 말부터 1892년까지 연금생활을 하였다. 그는 갑신정변 전까지만 해도 급진개화파와 가까이 지내면서 급진적인 개화사상의 성향을 띠었으나 정변실패 후에는 점진적 개량에 의한 개화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연금생활 시기에 閔泳翊과 韓圭卨의 후원을 받고 김홍집·朴定陽·어윤중·金鶴羽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西遊見聞≫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온건개화파 인사들의 개혁사상을 대변하는 글이었다.097) 柳永益,<「西遊見聞」論>(≪韓國史市民講座≫7, 一潮閣, 1990). 그리고 유길준의 1892년 연금해제와 더불어 새로운 관료군들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바로 유길준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던 김학우·權瀅鎭·趙羲淵·金嘉鎭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갑오경장 때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과 함께 유대관계를 맺고 개혁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다.098)柳永益,<甲午開化派 官僚의 執權經緯·背景 및 改革構想>(≪甲午更張硏究≫, 一潮閣, 1990).

당시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은 유길준의≪서유견문≫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서유견문≫에 나타난 개화사상의 주된 내용은 유길준이 소년기에 접한 유학과 실학의 토대 위에서 일본과 미국유학에서 학습한 후쿠자와(福澤諭吉)의≪西洋事情≫에 보이는 문명개화론과 서구의 계몽사상의 천부인권설과 사회계약설이 들어 있다. 이러한 유길준의 개화사상은 중국의 양무론자들이 내걸었던 중체서용론 내지 동도서기론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099) 柳永益, 앞의 글(1990a), 156쪽.

유길준은 인간의 역사가 미개화·반개화·개화의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가 설정한 개화한 사회란 인간이 도덕적·정치적·학문적·물질적인 여러 측면에 있어서 최고로 완성된 사회인 것이다. 그는 인간의 완전한 평등을 강조하고, 그 당연한 귀결로서 여러 가지 신분적 특권을 부정하였다. 유길준은 원칙적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자유, 재산의 자유, 영업의 자유,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명예를 수호하는 자유 등이 보장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100) 兪吉濬,≪西遊見聞≫ 4편, 人民의 權利(≪兪吉濬全書≫1, 一潮閣, 1971, 116∼118쪽). 그러나 이러한 모든 자유는 국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안에서 행해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국가의 법은 인간의 천부권리에 우위하는 것이고, 따라서 법과 교육이 사회발전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유길준은 자주권과 국가평등을 주장함으로써 조선이 청국과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나 청국에 대한 평등한 관계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군주의 절대적 권력을 확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들 사이에 평등권을 확립함으로써 국민적 통합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국민적 통합의 구상은 政體論으로 결정되어 나타났다.

유길준은 먼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정체의 유형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① 君主의 擅斷하는 政體, ② 君主의 명령하는 정체(혹은 압제정체), ③ 貴族의 주장하는 정체, ④ 君民의 共治하는 정체(혹은 입헌정체), ⑤ 國人의 共和하는 정체(혹은 合衆政體)101) 兪吉濬,≪西遊見聞≫5편, 政府의 種類(위의 책, 143∼145쪽).로 나누었다. 이러한 정체 가운데 그가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긴 것은 군민이 공치하는 정체였다.102) 兪吉濬,≪西遊見聞≫5편, 政府의 種類(위의 책, 151쪽). 즉 유길준이 목표로 한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를 모델로 한 군민공치정체였고, 그 정체를 기반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이념으로 하고 있었다.

이처럼 유길준은 국가의 의사가 다수의 국민에 의해 결정되는 공화제보다는 군주와 국민이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군민공치의 정체를 이상적인 형태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입헌군주제를 이상적인 모델로 강조하였지만 그것은 인민주권론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인 정치관습과 군주권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나갈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그의 입헌군주제에 대한 견해는 철저한 신분제도의 타파나 민권의 확립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103) 尹炳喜,≪兪吉濬硏究≫(國學資料院, 1998).

유길준은 군주권을 인위적 현상에 의해 변개될 수 없는 별개의 천부권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부자가 서로 전하는 세습군주제는 만세토록 변개할 수 없는 법으로 인식하였다. 다만 군주권 속에 인위적 변개가 가능한 사항을 제시함으로써 군주의 지나친 독단을 방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군주권은 결코 민권의 신장을 위해 약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군주권은 자연스럽게 민권을 종속시킬 수 있는 논리적 정당성을 갖게 되며, 민권은 늘 군주권을 제한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인정되었다.

한편 유길준의 경제론에 있어서는 지주제에 입각한 地代徵收權에 대해서 재산권보호라는 차원에서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1891년에 저술한<地制議>에서 토지분배론이 토지를 빼앗긴 자의 원성을 초래하는 반면, 토지를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요행심을 조장하여 백성을 병들게 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하였다. 그는 토지분배론에 반대하면서 그 대신 농민경제를 안정시킬 방안을 주로 세제개혁론에서 찾았다. 이것은 사실 농민부담을 경감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국가재정의 안정적 확보에 있었다. 그는 당시 조세행정의 문제는 조세액의 과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적인 수탈에 있다고 보아 세액이 비록 과중하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그 세액을 국가의 보존과 올바른 정책의 추진에 사용하기만 한다면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104) 兪吉濬,≪西遊見聞≫7편, 收稅 法規(위의 책, 181∼196쪽) 및 人民의 納稅 分義(위의 책, 196∼204쪽).

온건개화파는 갑오경장을 거치고 독립협회의 활동 이후에 줄곧 儒學(舊學)과 新學의 절충을 주장하였다. 1898년(광무 2) 11월 5일자≪매일신문≫ 논설을 보면 천문학 등 서양의 학문과 과학은 나라를 부강시킬 수 있는 실학인데 우리 나라는 그것을 배우려 하고 있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皇城新聞≫의 주필인 張志淵·朴殷植·柳瑾 등도 대체로 신학과 구학을 절충하기를 주장하였다. 구학이나 신학 하나만으로는 성인의 도도 될 수 없고 학문의 진리도 될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신학편에 서서 절충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경향은 1890년대 새로운 온건개화파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105)李光麟,<開化期 知識人의 實學觀>(≪東方學志≫54·55·56, 延世大 國學硏究院, 1987).

한편 1908년(융희 2) 3월 김윤식은≪大東學會月報≫ 창간호 서문에서 인의도덕으로써 體를 삼고 이용후생으로 用을 삼아야 하며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폐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김윤식은 인의도덕을 세계 각국이 함께 우러러 받든다고 하면서 이제 인의도덕의 보편성에 입각하여 서양인도 인의도덕을 가진 것으로 인정하고 서학을 받아들일 자세는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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