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5) 일본견문 보고서

(5) 일본견문 보고서

조사들에게는 일본의 실정 전반을 관찰·보고할 임무 외에 일본정부의 각 성과 세관의 운영상황 그리고 육군의 조련 등에 관한 것 중 한 가지를 각자 전문적으로 연구·조사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귀국하여 한양으로 올라오는 약 두 달 사이에 자신들의 임무 수행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그것을 고종에게 올렸다. 이들의 보고서는 크게 두 종류 ‘聞見事件’과 ‘視察記’로 나눌 수 있다.

‘문견사건’ 방식의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조사들의 공식 직함이 동래암행어사이자, 일종의 외국파견 사절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암행어사나 통신사와 연행사가 복명할 때와 똑같은 절차로, 이들은 封書에서 탐지하도록 지시된 일본의 실정 전반에 관해 조사한 결과를 ‘문견사건’이라는 제목의 書啓로 보고했다. ‘문견사건’식 보고서는 강문형·이헌영·민종묵·엄세영·박정양·조준영·심상학·어윤중의 것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어윤중의 보고서≪재정견문≫은 여느 조사들과 형식을 달리해서 근대적인 서술방식을 취해 주로 일본 경제문제를 다루고 있다.

나머지 조사들이 남긴 ‘문견사건’들에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정부가 이룩한 정치·경제·군사·사회·교육 등 여러 방면의 제도개혁을 비롯해 자유민권운동과 정계 내부의 갈등 등 정계의 동향, 통상·외교관계와 대외팽창, 관세자주권 확보를 위한 서구와의 교섭 등 대외사무, 물가·재정상황과 산업시설·물산 등 경제의 동향, 우편·전신·철도의 보급과 가로망의 확충 등 교통·통신시설의 발달, 의식주의 서구화와 풍속·종교·신분제도상의 변화상, 그리고 역사 및 지리적 환경 등을 포함한 일본의 실정 전반에 관한 정보와 평가가 담겨 있다.

‘시찰기’ 방식의 보고서 가운데는 특히 박정양의 보고서가 돋보인다. 그는 일본의 근대 행정체계를 구체적으로 조사한≪日本國內務省職掌事務≫와≪日本國內務省各局規則≫(전 3권), 농상무성과 관련한≪日本農商務省各局規則≫(전 2권)을 비롯해≪일본국내무성직장사무≫의 부록으로 실은≪農商務省職掌事務≫도 남겼다. 이 보고서들은 일본의 내무성과 농상무성 및 산하 부서의 소관업무, 직제, 각종 행정실무에 관한 각종 규칙을 망라하고 있지만, 단순히 제도나 규칙만을 등재해 놓은 것은 아니다. 내무행정 관계보고서에는 호적관리·국토측량·보건위생 등 일반 행정업무와 3府 37縣의 지방행정 및 경찰업무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모든 행정사무를 통일적으로 관리·감독하는 내무성 중심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와 府·縣會 의원의 선출방법과 투표제도 그리고 메이지시대의 경찰의 역할과 활동범위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런 메이지 일본의 행정체계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1881년 이후 조선이 행정제도를 개편하고 정치적 변혁을 이루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어윤중의 보고서≪日本大藏省職制事務章程≫이 있는데, 대장성의 직제와 사무장정, 조세국·관세국·국채국·은행국·회계국 등 예하 13국의 직제와 사무장정이 소개되고 있다. 중앙집권적 재정기구의 운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보고서는 개화기 조선의 경제제도를 개혁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엄세영의≪日本司法省視察記≫(전 7권)는 메이지 일본의 사법체계와<民法草案>을 제외한 법전 전부를 채록한 보고서이다. 자신의 보고서에 관해 엄세영은 “대개 형법·치죄법·헌법·소송법·민법·상법이 프랑스사람이 말하는 육법이다. 일본이 이를 다 본뜨지 못했고, 갖추기는 했더라도 소송법과 같이 시행하기에 이르지 못한 것도 있으므로, 사무장정·형법·치죄법·소송법·監獄則·新律綱領·改定律例撮要·改定律例 등 7권을 한문으로 옮겨 엮었다”고 말했다.≪일본사법성시찰기≫제1권에는 사법성과 최고재판소인 大審院을 비롯한 각급 재판소의 사무장정과 직제가, 제2권에는 1882년 시행 예정인 ‘형법’이, 제3권과 제4권에는 오늘날의 형사소송법에 해당하는 ‘치죄법’과 ‘소송법’이 실려 있다. 제5권에는 ‘감옥칙’이, 제6권에는 메이지유신 직후에 만들어진 형법전 ‘신률강령’과 ‘개정율례촬요’가, 제7권에는 ‘개정율례’가 수록되어 있다. 개화기에는 자주적인 법제정비가 부국강병의 근대국가로 성장하는데 초석이었을 뿐 아니라, 당시 개화·자강운동을 주도한 개화파 인사들의 법의식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드물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엄세영이 남긴 이 문헌들은 개화파의 근대법에 대한 인식 수준과 조선의 서구 근대법 수용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강문형이 남긴≪工部省≫에는 공부성의 연혁·직제·소관업무·사무장정을 비롯해 산하 기관들의 직능과 업무에 이르기까지 역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정비한 산업진흥정책의 추진체계를 파악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공·광·농업에 사용되는 각종 근대 기계류, 예를 들어 증기기관·수차·풍차·기중기·착암기·자동성형기계·선풍기·정미기·파종기의 성능과 특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유리제조법과 정전기의 발생원리, 충전지의 원리, 발전기의 원리 및 지상·지중·해저에 이르는 전신가설법과 원거리 전신할 때의 전신신호 보강법에 이르기까지 전신가설에 따르는 과학기술 정보도 실려 있다. 여기에 소개된 각종 제도와 기계류는 1881년 이후 조선에 이와 유사한 기구를 설립·운영하고 또 기계류를 도입하는 데 많은 참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준영의≪文部省≫에는 문부성의 연혁·직제·사무장정, 대학·사범학교·여자사범학교·외국어학교·체조전습소의 교과과정과 규칙, 그리고 도서관·교육박물관의 규칙 등 일본의 근대 교육제도에 관한 정보가 망라되어 있다.

홍영식은 일본 육군의 군사행정 및 관리체계를≪日本陸軍總制≫(전 2권)로 보고했다. 근위병 선발방법, 신병 훈련과정, 사관학교 등 각종 군사학교의 교과과정과 교과목, 군사운영 전반에 대한 검열제도, 군제운영을 비롯하여, 각 단위부대별 병력배치 현황과 병종별 병력편제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전시체제하에서의 각 병대별 병력증원, 여단과 사단편제, 군단장 이하 참모부·포병부·공병부 등 군단 산하기구들의 직무, 육군 운영비의 회계·경리방법, 육군의 계급별·군종별 봉급액까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원회는 주로 군사훈련 방법 및 육군의 전술·전법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日本陸軍操典≫(전 4권)으로 남겼다. 이 책에는 기병·포병·공병·輜重兵(수송병) 등 병종별 단위부대 편성방법, 부대전술, 전투대형, 신병훈련, 그리고 체조교련법 등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군사훈련 방법과 전법, 전술에 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심상학의 보고서≪外務省≫(전 4권)에는 외무성의 소관사무, 외교실무와 관행에 관한 규칙과 서식, 미국·영국·독일·중국·프랑스·러시아·포르투갈·네덜란드·스위스·벨기에·이탈리아·덴마크·스페인·스웨덴·오스트리아·페루·하와이 등 17개국과 체결한 각종 조약의 원문이 실려 있다. 또 이 책에는<만국우편연합파리조약>이나<만국전신조약서>와 같은 국제조약과 일본내 외국인 거류 및 활동에 관한 규정과 관계서식 등 일본이 수용한 서구적 외교제도와 조약문을 비롯해 공사·영사의 임무, 조약체결, 외교관행, 공사관 개설절차, 일본의 해외공사관 운영비 지급방법, 외국인 거류지에서 나오는 수익금의 규모와 사용방법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다.

민종묵은 자신이 작성한 시찰기의 목차와 이에 대한 해설을 담은≪日本國際條例目錄≫을 포함하여≪各國條約≫·≪居留條例≫·≪貿易則類≫·≪六開港場≫·≪稅關規例≫·≪各國稅則≫을 남겼다. 그리고 이헌영의 보고서로는≪貿易章程≫·≪稅關事務≫·≪各港稅關職制≫가 있다. 이 보고서들에서는 세관의 직제, 실무와 관행 등에 관한 규칙과 서식, 17개국과 체결한 조약과 무역장정, 무역실무에 관한 각종 서식, 청국과 일본의 세칙, 일본의 ‘개정세액안’과 이를 구미 각국의 세액과 비교한 ‘세칙비교표’ 같은 당시 일본의 통상관계 제도 및 관행과 조약, 그리고 부산항의 수출입 동향 등 일본에서 입수 가능한 통상과 세관운영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광범위하게 파악되고 있다. 이 문건들은 이들이 귀국한 뒤 곧 파견된 제3차 수신사 趙秉鎬가 세칙안을 작성할 때와 1881년 이후에 세관을 창설할 때 활용되기도 했다.

이상의 일본 견문보고서들을 살펴볼 때, 조사시찰단은 일본이 근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경제·군사·산업·사회·문화·교육부문에서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온몸으로 느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이 같은 성과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또 때로는 매우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메이지 일본의 국력의 실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평가했다는 점에서, 조사시찰단은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에 주요한 계기로 작용했던 이와쿠라(岩倉)사절단에 비견되는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와쿠라사절단을 동행했던 쿠메 쿠니타케(久米邦武)가 1876년에≪米歐回覽實記≫(전 5권)를 펴냄으로써 이 사절단이 거둔 성과는 일본정부와 국민들이 서구문물을 폭넓게 수용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조사시찰단이 남긴 보고서들은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알려지지 못함으로 해서, 그 당장은 쿠메의≪미구회람실기≫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보고서가 당시 조선의 개화와 자강을 열망하던 개화파를 비롯하여 식자층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틀림없다. 예컨대 이들의 책을 접한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을 둘러보기로 결심했는가 하면, 정부는 이를 계기로 일본유학생 파견에 적극성을 보였다. 또 池錫永 같은 일부 유생들은 이 책을 보고 각성하여 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촉구하는 일련의 개화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이 보고서들에 소개되어 있는 일본 근대문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과 정보는 당시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위정척사론에 입각한 부정적 일본관 나아가 서구문물관을 허무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보고서들의 역사학적 가치는 지금까지 ‘급진·온건개화파’ 관료들의 개혁사상을 대표하는 문헌으로 주목받아 온 김옥균의<治道略論>(1882)과 박영효의<建白書>(1888) 및 유길준의≪西遊見聞≫(1895)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 또한 이들 기록에 보이는 일본에 대한 인식은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日東記遊≫(1876)나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修信使日記≫(1880), 그리고 박영효의≪使和記略≫(1882)보다 훨씬 뛰어난 폭과 깊이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소개한 조사들의 보고서는 조사시찰단연구만이 아니라 1880년대 개화·자강을 추진하려던 조선왕조 위정자들이 일본과 서구문물에 대해 가졌던 인식태도 및 그 심도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자료일뿐 아니라, 조선의 근대 서구문물 수용과 개화·자강운동의 역사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급 사료라 할 수 있다.239) 許東賢,<朝士視察團(1881)의 日本見聞記錄 總覽>(≪史叢≫48, 1998), 26∼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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