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6) 일본을 보는 두 개의 눈-엇갈리는 진단과 평가

(6) 일본을 보는 두 개의 눈-엇갈리는 진단과 평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더구나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인간이 사물을 보는 인식의 폭과 깊이는 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과 그가 견문한 세상의 크기에 비례한다. 조사들도 자신이 알고 있던 기존의 지식을 바탕으로 일본의 서구화된 근대제도와 문물을 이해했으며, 자신들이 느낀 만큼 조선의 개혁에 응용하려 하였다.

일본의 유명한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1860년경에 유럽을 둘러보았는데 그 때 이미 蘭學者로서 서구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 근대의 산물인 민주주의의 기본제도들은, 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던 그에겐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었을 뿐이다.

정치상의 선거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선거법이란 것이 어떠한 법률이고 의회라는 것은 어떠한 관청이냐고 질문하면, 저 쪽 사람은 단지 웃기만 하고 있다. 무엇을 묻는지 잘 알고 있다는 태도이다. 그런데 이 쪽에서는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해도 始末을 알 수가 없다. 또한 당파로는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徒黨같은 것이 있어 쌍방이 지지 않고 밀리지 않으려고 맹렬하게 싸우고 있다고 한다. 무슨 일인가. 태평무사한 천하에 정치상의 다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이거야 대단한 일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조금도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없다. 저 사람과 이 사람이 적이라고 하면서 한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있다.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福澤諭吉,<福翁自伝>,≪福澤諭吉全集≫7, 岩波書店, 1970, 107∼108쪽).

조사 이헌영에게서도 후쿠자와와 비슷한 경험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일본을 시찰하는 중에 미국 해군의 의전행사를 목격하게 되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군함의 돛대 상하좌우에는 군기가 펄럭이고, ‘돛대에는 5층의 사다리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사람들이 매우 위태롭게 죽 늘어서 있는’ 모습에서 그 용맹과 민첩함이 절로 풍겨났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의식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그로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240)李金憲永,<日槎輯略>(≪(국역)해행총재≫11,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77), 22쪽.

그러나 후쿠자와는 서구제국에 대한 시찰에서 보고 들은 새로운 견문을 바탕으로 근대적 계몽사상가로 거듭났다. 서구의 근대문물을 접하면서 습득한 지식과 정보가 그 당장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장기적으로 후쿠자와의 세계관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확실하다.

우리의 조사들도 일본시찰에서 후쿠자와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 일본시찰에 임한 조사들은 어떠한 잣대로 일본의 근대문물을 이해하려 하였으며, 이를 통해 사상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을까.

조사들 가운데 어윤중과 홍영식의 경우 개항 이후에 학문적으로 초기 개화사상가라 할 수 있는 朴珪壽와 劉大致의 영향을 받고, 또 김홍집이나 박영효, 김옥균과 교류하면서 초기 개화파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이들이 조사로 임명되었을 즈음에는 화이론적 세계관과 소중화의식에서 벗어나 일본의 근대문물제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조사들은 학식과 문장이 뛰어난 유교적 지식인으로서 실학적 사고성향을 갖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유교적 가치를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 점은 당시 조사시찰단의 동정을 취재해 보도한≪朝野新聞≫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조사들은 ‘모두 다 開進黨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 당은 수구 한 당은 개진의 양파로서 京城에 있을 때는 서로 持論을 고집하면서 마치 얼음과 숯불이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형세이니, 이번에 함께 일본시찰의 內命을 받고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고는 해도 은연중에 양당이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은 여전했던 것이다. 또 이 기사에는 당시의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있는데, 부산의 일본영사가 이들을 방문했을 때, 참의 심상학이 손으로 눈을 가리기에 영사는 “어디 아픈 것 아니냐”며 의사한테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개진당의 어윤중이 심참의의 병은 “일본 물로 씻고 일본 바람을 쐬면 금방 나을 것”이라고 참견했다. 이 소리를 듣고 심상학은 크게 화를 냈으나, 어윤중은 비록 눈은 뜨고 있다고 해도 눈뜬 장님이나 진배없어서 ‘아직은 사물을 보는 눈이 없다’면서 이제 일본에 건너가 ‘그 개화를 눈으로 직접 보고 가슴속에 갇혀 있는’ 수구사상을 한번 씻어버리면 되니까 별로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대꾸했다. 그래서 어윤중과 심상학은 한바탕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241)≪朝野新聞≫, 1881년 5월 20일.

이 일화에서 우리는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어윤중이 보기에 눈뜬장님인 심상학과 같은 이들은 일본을 시찰하면서 사고를 혁신시킬 교육대상이었으며, 자신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잣대를 갖추고 있음을 자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조선정부가 조사들에게 일본의 근대문물을 돌아보게 한 주요한 이유는 일본의 경험을 조선개혁의 모델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런 정부의 의도는 이동인이 조사시찰단의 파견을 위한 사전 교섭과정에서 하나부사공사를 만나 “조선의 고귀하고 저명한 소장 지사들이 일본에 갔다 오면 나랏일을 결정하는 사람의 방향이 정해질 수 있고 그 방향이 정해지면 개혁의 목적도 따라서 정해진다”고 해 조선개혁의 목적을 정하기 위해 일본을 모범으로 삼고자 하니 조사시찰단의 파견을 도와 달라고 부탁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242)≪日本外交文書≫14, 문서번호 143, 仁川開港談判振幷=朝鮮國內近況內報ノ件, 344쪽.

이처럼 조사들은 나름대로 뚜렷한 목적을 갖고 일본을 배우러 갔지만, 무릇 인간은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세상을 인식하게 마련이다. 개화사상이라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인식 틀을 가지고 일본을 둘러본 어윤중·홍영식 두 사람과 유학적 세계관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접한 심상학과 같은 조사들은 일본을 보는 잣대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본의 근대제도와 문물을 이해하고 진단함에 있어 그 폭과 깊이에서나 일본을 시찰하면서 얻은 조선개혁에 관한 구상 면에서 매우 큰 차이가 났다.243)許東賢,<1881년 朝鮮 朝士 日本視察團에 관한 一硏究>(≪韓國史硏究≫52, 1986), 135∼146쪽.
―――,<1881년 朝士視察團의 明治日本 政治制度 理解>(≪韓國史硏究≫86, 1994), 136∼137쪽.
―――,<1881년 朝士視察團의 明治日本 司法制度 理解>(≪震檀學報≫84, 1997), 146∼148쪽.
―――,<1881년 朝士視察團의 明治日本 軍制觀 硏究>(≪아태연구≫5, 1998), 483∼487쪽.
―――,≪일본이 진실로 강하더냐:근대의 길목에 선 조선의 선택≫(당대, 1999), 95∼109쪽.

이미 유교적 가치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던 어윤중과 홍영식에게 일본 시찰은 자신들이 꿈꾸는 새로운 국가의 밑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어윤중은 이 때 새로운 근대국가에 관한 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유학 숭상의 폐단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폐단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해외유학과 신식 교육을 통해 국민정신을 개혁할 것을 주창했다. 그리고 조선의 경제가 빈한한 것은 유교의 안빈낙도식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 그 전까지의 절용을 바탕으로 한 경제관에서 벗어나 상공업진흥을 주장하는 사상적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어윤중과 홍영식은 당시 국권론자로 이름이 높았던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고 또 일본정부가 실현한 문명개화정책을 직접 눈으로 봄으로써, 집권적 정부 주도하의 개혁론, 다시 말해 계몽을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구상하게 되었다.244) 許東賢,<1881년 朝士 魚允中의 日本 經濟政策 認識>(≪韓國史硏究≫93, 1996), 124∼129쪽. 다음과 같이 이들은 일본이 이룩한 발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부국강병정책을 당시 실정에 맞는 합리적인 방안으로 보았던 것이다.

고 종:일본의 제도가 장대하고 정치가 부강하다고 하는데 살펴보니 이와 같더냐.

홍영식:일본의 제도가 비록 장대하나 모두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재력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매우 많으므로 항상 부족함을 근심합니다. 그 軍政은 강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이룩한 것입니다. 일본이 노력한 바를 갖고 현재 이룩된 것을 보면 진실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承政院日記≫, 1881년 9월 1일).

 

고 종:오로지 부강만을 도모하던 戰國시대와 동일하더냐.

어윤중:진실로 그러합니다. 春秋戰國은 바로 小戰國이며 오늘날은 바로 大戰國이라 모든 나라가 다만 智力으로 경쟁할 뿐입니다…현재 局勢를 돌아볼 때 부강함이 아니면 국가를 지키지 못하므로 상하가 한 뜻으로 노력할 것이 바로 이 한 가지 일일뿐입니다.

    (魚允中,≪從政年表≫권 2, 고종 18년 12월 14일, 國史編纂委員會 編, 1958, 122쪽).

여기서 우리는 어윤중과 홍영식은 일본에서 보고 듣고 익히는 과정에서 일본과 같은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꿈꾸는 사상적 전회를 경험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어윤중의 국가 구상은 그가 명치 일본의 參議 중심 집단지도체제, 중앙집권적 재정·조세·예산제도, 근대산업의 진흥과 교통·통신시설의 확충 및 국력 창출을 위한 여러 조치를 높이 평가한 데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근대 국민국가의 이상에 접근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이상은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들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 때에 천명된 방안의 원형이다. 즉 어윤중이 귀국 직후인 1881년 12월 20일자로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김옥균·박영효·서광범의 일본방문을 알리며 편의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한 소개서한에서 이들을 ‘절친한 친구’로 표현한 바 있고, 이후 김옥균이 1882년 일본시찰 때 어윤중이 지은≪中東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일화와 1882년에 수신사행으로 방일한 것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요 계기가 되었다고 한 박영효의 회고담에서 알 수 있듯이, 어윤중의 김옥균 등에 미친 사상적 영향력은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245) 許東賢,<1881년 朝士視察團의 明治日本 社會·風俗觀>(≪韓國史硏究≫101, 1998), 136∼137쪽.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조사들에게 불과 4개월 남짓한 일본경험은 수십 년 동안 몸에 밴 유교의 가치와 세계관을 한꺼번에 떨쳐 버리기에는 너무나 짧았다. 조사들은 일본을 둘러보면서 공자를 모신 文廟의 제향을 폐지한 것을 개탄했는가 하면 유학이 쇠잔해 가는 것을 몹시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유교적 가치기준으로 일본의 근대문물을 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의 서구화와 발전 모습에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외양적으로 부강해진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로 인해 나라 재정이 나빠지고 생활풍습이 서구화된 것을 비난했던 것이다.246) 許東賢, 위의 글, 167∼168쪽. 박정양은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에게 이런 자신의 소감을 세세하게 고했다.

고 종:일본의 강약이 어떠하더냐.

박정양:일본은 겉모습을 보면 자못 부강한 듯합니다. 영토가 넓지 않은 것이 아니고 군대가 굳세지 않은 것이 아니며, 건물과 기계가 눈에 화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살피면 실은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일단 서양과 통교한 이후로는 단지 교묘한 것을 좇을 줄만 알고 재정이 고갈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기계를 설치할 때마다 각국에 진 부채의 액수가 심히 많습니다. 기계에서 이익이 남는 것을 국채의 이자와 계산해 보면 간혹 부족하다고 걱정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서양인에게 제재를 받아 감히 기운을 떨치지 못하고 한결같이 그 제도를 좇아 위로는 政法과 풍속에서부터 아래로는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절차가 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고 종:왜인들이 다른 나라의 법을 다 좋아하여 필시 절충하지 않았으므로 의복까지도 그와 같이 되었구나. 이는 그 나라의 잃은 바이다.

    (朴定陽,<東萊暗行御史復命入侍時筵說>,≪朴定陽全集≫4, 亞細亞文化社 編, 1984, 332쪽).

비단 박정양만이 아니었다. 조준영도 일본이 무조건 서양 것을 본받아 그 나라 땅과 백성말고는 전통적인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라고 했는가 하면, 강문형은 일본이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서양을 모방하려 들기만 하니 결국 잃는 것이 더 많은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헌영과 조준영처럼 “모든 후생의 방법과 부강의 술책에서 본받을 만한 것은 본받고 바꿀 만한 것은 바꿀 수 있다”거나, “그 군제·무기·배·기계·농법 등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 백성들을 넉넉하게 할 만한 것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대부분의 조사들은 전통적 가치를 보존하는 범위 내에서 국가의 생존과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산업기술과 영농방식 같은 것은 선별적으로 배워서 익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유교적 가치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일본의 제도에 대해서도 개방적 자세를 취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위정척사론자들보다는 외국의 문물을 수용하는데 유연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근대문물과 제도에 대한 지식은 후쿠자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기적으로 이들의 유교적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 근대사상이 명치유신 후 명치정부가 적극 추진하고 있는 문명개화의 원동력임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서구 근대기술의 우월성만을 인정하고 그 기술문명을 꽃피운 토대의 중요성은 인식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247) 許東賢, 앞의 글, 168∼170쪽.

그렇지만 이들의 선별적 서구문화 수용론은 1881년 말부터 전개된 郭基洛·池錫永·朴淇鍾·趙汶 등 개화유생들의 개화상소운동을 촉발시킴으로써 이른바 동도서기론의 대두에 공헌하였으며, 특히 임오군란 이후에는 조선정부 개화정책의 중심논리로 천명되어 1880년대 초반의 개화정국을 주도하였다.248) 權五榮,<東道西器論의 구조와 그 전개>(≪韓國史市民講座≫7, 1990), 84∼96쪽. 이 점은 1882년 8월 5일 金允植이 지은 다음과 같은 고종의 교서에 잘 나타난다.

논의하는 자들은 또 서양과 수교를 하면 장차 邪敎에 전염된다고 말하니 이것은 실로 斯文을 위하고 世敎를 위하여 깊이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수호는 수호대로 행하고 禁敎는 금교대로 할 수 있으며, 조약을 맺어 통상을 하는 것은 다만 公法에 의거할 뿐이다. 처음부터 內地에 사교를 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대 백성들은 본래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익숙하고 오래도록 예의의 풍속에 젖어 있으니 어찌 하루아침에 바른 것을 버리고 사악한 것을 좇을 것인가…저들의 종교는 사악하니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치장한 여자를 멀리하듯이 해야 하지만, 저들의 기기는 이로우니 진실로 이용후생할 수 있다면 농업·양잠·의약·병기·배·수레의 제도는 무엇을 꺼려서 피하겠는가. 그 종교는 배척하되 그 기기는 본받는 것은 진실로 병행할 수 있으며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강약의 형세가 이미 현격한 격차가 벌어졌는데, 만일 저들의 기술을 본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들의 모욕을 받고 저들의 엿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高宗實錄≫, 1882년 8월 5일).

이렇게 볼 때 조사들이 일본시찰 후 입안한 국민국가수립론과 동도서기론의 상이한 서구문물 수용론은 1880∼1890년대 조선정부가 추진했던 개화·자강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자 이를 추동한 쌍두마차였다. 그러나 현재적 입장에서 돌이켜 볼 때 서양기술의 우월성만을 인정하고 그 기술문명을 꽃피운 토대인 서구 근대사상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었던 동도서기론보다는 국민국가수립론이 훨씬 더 바람직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추진하려는 세력의 수적 열세는 이후 전개된 조선정부의 근대화정책의 앞길이 험난함을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許東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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