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2) 사행준비와 출발

(2) 사행준비와 출발

변원규의 귀국을 계기로 유학생파견은 적극성을 띠어 1880년 11월 7일 이용숙을 동지사행에 수행시켜 北洋咨式·憑票·海道 등 사행에 따르는 문제를 자세히 묻게 하였다.257)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淸季中日韓關係史料≫2권, 光緖 7년 2월 3일 北洋大臣 李鴻章函, 附件(6) 酌覆朝鮮詢問各條, 475a∼480a쪽과 光緖 7년 2월 5일 軍機處交出 李鴻章抄摺, 附件(1) 酌覆朝鮮詢問各條照繕淸單, 484a∼490a쪽.
吳汝綸,≪李文忠公全集≫奏稿 권 40, 答覆朝鮮所問事宜摺, 附件 酌覆朝鮮詢問各條照繕淸單, 13a∼17b쪽.

그러나 한편 이 문제가 알려짐에 따라 반대의견이 대두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前정언 許元栻의<時弊再疏>와 장령 李駿善의<時弊疏>이다. 허원식은 12월 17일의 시폐재소에서 무예학습에 관한 소식이 러시아측에 알려지면 오히려 외적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고, 우리의 군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들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며, 특히 많은 군졸을 파견할 경우 그 재정지원의 어려움을 지적하여 중단할 것을 주장하였다.258)≪承政院日記≫, 고종 17년 12월 17일. 뒤이어 12월 28일에는 이준선도 시폐소에서 역시 재정지원의 어려움을 들고 기예학습을 위한 北學은 그 전례가 없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259)≪承政院日記≫, 고종 17년 12월 28일.

그러나 사행을 위한 준비는 진행되었다. 그 다음해인 1881년 2월 4일에 고종은 統理機務衙門에 명하여 領率사신의 칭호와 工士資送에 관한 것을 마련하게 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그 아문에서는 26일에 사신칭호는 領選使라 하고 기계는 工徒를 파견하여 학습하나 구기·연병은 중지할 것을 상계하여 결정되고, 동일자로 趙龍鎬가 영선사로 임명되었다.260)≪承政院日記≫, 고종 18년 2월 4일·26일.

영선사의 출발일자에 대하여 최초로 택일하명이 있었던 것은 3월 5일이었으며, 이에 따라 예조에서는 같은 날 상계를 올려 4월 11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5차에 걸쳐 출발일자가 변경되었으니 준비가 불충분한 때문이었으며, 더욱이 윤7월 15일에는 조용호가 병사함에 따라 順天부사 金允植이 영선사로 임명되었다.261)≪政治日記≫13권, 신사 윤7월 15일(서울大 中央圖書館所藏 筆寫本). 5차에 걸친 변경 끝에 최종적으로 결정이 내려진 것은 윤7월 29일로서 9월 26일에 출발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유학생의 선발과정에 대하여 김윤식은 공도 28명은 京中에서, 10명은 의주에서 선발하였다고 하였으며, 또한 경중에서 9월 23일에 6명, 9월 25일에 11명을 선발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밖에 11명은 그 이전에 선발되었을 것이다.262)金允植,≪陰晴史≫ 상, 신사 9월 23일·25일 및 10월 25일(韓國史料叢書 6, 國史編纂委員會 編, 1958).

선발된 유학생은 16·7세로부터 40여 세까지로 연령은 청측의 지시를 따르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출신성분은 군계학습의 성격으로 보아 중인 또는 그 이하 계층의 출신자로 구성되었으나 양반계층의 출신자도 선발되었으니 이들 38명의 유학생을 학도와 工匠으로 구분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들 유학생의 명단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263)이 명단은≪啓下咨文冊≫11책, 朝鮮國委員學徒通事隨從等名數別錄>(서울大 奎章閣圖書)에 의하였다(≪陰晴史≫상, 신사년 10월 25일조, 派員工匠通事隨從等名에는 학도 25명, 공장 13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학도명단 중 安應龍·崔志亨·金成孫·朴永祚·金德鴻 등 5명은 공장의 오기일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安應龍·崔志亨·金德鴻 등 3명은≪陰晴史≫상, 임오년 2월 11일조에 공장이라 명기하였고, 金成孫·朴永祚 양인은 義州에서 선발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공장이었을 것이 추측되기 때문이다).

學徒:高永喆·李苾善·朴台榮·秦尙彦·尙澐·高永鎰·李熙民·金光練·李昌烈·金台善·趙漢根·趙台源·安昱相·安浚·李章煥·李南秀·李·崔圭漢·金聲·鄭在圭 工匠:金元永·河致淡·皮三成·韓得俊·金聖元·洪萬吉·黃貴成·張榮煥·宋景和·金興龍·崔同順·金泰賢·朴奎性·安應龍·崔志亨·金成孫·朴永祚·金德鴻

다음으로 官員·隨從 등의 명단을≪啓下咨文冊≫의 기록에 의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領選使:金允植 從事官:尹泰駿 官 弁:白樂倫 譯 官:崔性學 醫 員:柳鍾翕 伴 倘:朴永鈺 從事官伴倘:尹泰馹 別遣堂上:卞元圭 李根培 通 事:鄭麟興 李文熙 崔志華 隨 從:順得 仁錫 學甫 長孫 善基 萬吉 根成 龍成 興福 在吉 公孫 千萬 壽鳳 學祚 貞哲 同伊 仁石 石伊 漢傑

이상과 같은 영선사행의 인원구성을 보면, 유학생 38명을 중심으로 관원 12명, 수종 19명 등 도합 69명이 정식 인원이며 그 밖에 私帶隨從이 14명이 있었다.

김윤식은 예정대로 9월 26일 興福軒에서 고종에게 고별한 다음 야심하여 출발하였다. 영선사 일행은 의주에서 회동하였으며 10월 26일에 도강하여 柵門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본래<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제2조의 규정에 따라 海道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해도가 이미 封凍되었기 때문에 육로를 택한 것이다. 김윤식은 책문을 통과할 때 15조로 된<領選行中節目>264) 金允植,≪陰晴史≫상, 신사 10월 28일.을 제정, 포고하여 유학생과 행중 인원의 규율을 명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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