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Ⅲ. 위정척사운동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2)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2)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1876년 문호개방이 단행된 이래 1880년대는 한국근대사에서 볼 때 개화당을 중심한 집권세력이 여러 가지 개화정책을 펴나간 시기이었다.

1880년 12월에는 통상과 외국문물 수용을 담당하기 위하여 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였다. 종래의 5군영을 2군영으로 통합하고 따로 신식 군대(別技軍)를 신설하는 등 군제도 개편하기 시작했으며 농업학교와 관영회사를 새로 설립하는 등 각 방면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다음해인 1881년에는 청나라에 領選使를 파견하여 군사기술을 도입하려 했고 일본에 紳士遊覽團을 파견하여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정책과 그 성과를 조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개화당이 정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굳혀 가고 있던 때였으므로 개화당 요인들은 기왕의 중국을 주축으로 하는 화이질서에 안주하는 조선왕조가 아니라 세계 속의 자주독립국인 조선을 건립하려고 했기 때문에 청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구미제국과 문호를 개방하려고 하였다. 그런 만큼 개화정책을 추구하는 집권세력과 보수적인 유교질서의 신봉자이자 파수꾼의 역할을 하였던 유림 사이의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갈등은 1870년대보다 더 격화되어 갔다. 왜냐하면 1870년대의 갈등이 주로 통상요구나 불평등조약체결과 같은 대외적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면, 1880년대는 이미 병자년 이래로 제도화된 개항질서 속에서 나타나는 대내적인 국내의 사회질서의 개혁방향에 대한 것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외교사정과 국제동향을 살피기 위하여 1880년 6월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갔던 김홍집이 귀국하였다. 귀국길에 김홍집은 당시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청나라 외교관인 황준헌의 私擬冊子인≪조선책략≫을 갖고 들어왔다. 그는 이 책을 고종에게 바쳤다. 고종은 여러 대신들에게 이 책의 내용을 검토하게 하였다.

≪조선책략≫은 李鴻章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여 황준헌이 당시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조선이 취해야 할 외교정책을 논술한 것이었다. 그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518) 韓㳓劤, 앞의 글, 122쪽에서 재인용.

첫째, 동양 3국인 청·일·조선에 대해 위협적 존재인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선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고 미국과 연합하는 ‘親中國·結日本·聯美國’의 외교정책을 써서 부국자강을 꾀해야 한다.

둘째, 구미제국과 개국통상하여 안으로 산업을 일으킴으로써 조선이 유리하게 될 것이다.

셋째, ‘周孔의 道’를 지키는 조선이 천주교의 전교를 허용하더라도 아무런 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넷째, 서양의 학문기술을 습득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유학생을 중국·일본에 파견하는 한편 서양인 교수를 초빙해야 한다.

계속해서 황준헌은≪조선책략≫에서 조선이 이와 같은 외교정책을 취해야 할 배경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519) 위와 같음.

‘친중국’에 대해서는 조선이 이를 믿고 있으나 ‘결일본’에 대해서는 반신반의일지 모르나 일본이 조선에 대해 사단을 일으킬 때에는 중국이 조선을 도울 것이며 더구나 일본은 현재 외양은 훌륭하나 실상은 재주가 없으며 정부와 민간이 싸움으로 사이가 벌어져 있고 국가의 금은창고가 비어 있어 조선침략 같은 것은 도모할 여지가 없는 상태이다. ‘연미국‘에 대해서 미국은 그 영역이 광대하고 工商을 주로 하여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어 애초부터 영토적 야심이 없이 신의를 지키는 나라이므로 이와 연맹하는 것이 유리하다.

조정의 신하가 시무를 강구하여 다른 견해를 내세우지 않고 士夫가 적습을 타파하여 천박한 식견을 개도하고 국민이 분발하며 일어나서 마음을 같이하여 힘을 합침으로써 나라가 강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므로 조선의 흥망과 아시아의 대체적인 판세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우선 조정은 ‘積習을 타파하고 淺識을 개도하기’ 위하여≪조선책략≫을 복사하여 전국의 유생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러나 낡은 관습을 타파하고 천박한 식견을 개도하며, 나아가 국가의 새로운 정책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전국에 배포된≪조선책략≫은 유림 사이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개화를 반대해 온 유림의 위정척사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유림은≪조선책략≫의 복사본이 반포된 직후인 1880년 10월부터≪조선책략≫과 같은 불온문서를 받아 온 수신사 김홍집을 탄핵하고≪조선책략≫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다음해인 1881년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규탄운동은 정부의 개화정책을 통틀어 탄핵하는 운동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여기저기서 타올라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영남유생들이 합심하여 올린 萬人疏이었다. 만인소는 1881년 2월 이퇴계의 후손인 영남유생 李晩孫을 소두로 하여≪조선책략≫을 반대하기 위해 올린 유림의 집단반대 상소문이었다.

만인소에서 유림은≪조선책략≫의 저자인 황준헌의 주장에 대해 일일이 논박하였다. 즉 중국과는 이미 2백년이 넘도록 신의를 나누고 있는데 皇이니 朕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 일본의 국서를 우리가 받아들이면 중국에 대하여 해명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일본은 우리의 육지와 해상의 요충지대를 이미 점거하고 있어서 우리의 무방비함을 엿보고 충돌을 일으키면 제지하기 쉽지 않다고 하였다. 미국은 본래 잘 알지 못하는 나라인데 공연히 남의 말만 듣고 관계를 맺으면 그들이 우리의 신료를 괴롭혀서 재물을 요구하거나 우리의 허점과 약점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어려운 청을 하면 대응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는 우리에게 혐의를 갖고 있지 않는데 괜히 남의 말을 듣고 먼 곳에 기대고 가까운 곳에 도전하게 된다면 이를 구실로 러시아가 침입할 때 막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를 막기 위하여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힘을 합하며 미국과 손잡으라는≪조선책략≫의 내용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로 러시아·미국·일본은 모두 이적들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도 차이를 둘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이 들어와 통상과 토지를 요구할 경우 조선은 강토를 수호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대저 중국은 조선이 그 藩邦으로서 2백년이 넘도록 신의를 교부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皇이니 朕이니 하는 칭호로서 보내온 일본의 국서를 받아들인다면 만일 중국이 이로써 힐난하는 경우에 장차 어떻게 해명할 것입니까. 일본은 우리의 羈靡로서 육지와 바다의 요충지대를 이미 점거하고 있으니 우리의 대비가 없음을 보고 충돌을 자행하면 장차 이를 어떻게 제지할 것입니까. 미국은 잘 알지 못하는데 공연히 타인의 권유로 불러들여서 그들이 우리 신료를 피폐케 하여 재물을 요구하거나 우리의 허점을 살피고 약점을 업신여겨 어려운 청을 강요하거나 계속될 수 없는 경비를 떠맡긴다면 장차 이에 어떻게 응할 것입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 혐의가 없는데 공연히 타인을 믿음으로써 먼 나라와 친교에 기대어 가까운 이웃에 도전하게 되어 이를 구실로 러시아가 내침하면 장차 이를 어떻게 구할 것입니까. 러시아·미국·일본은 모두 같은 오랑캐로서, 그 어느 곳에 후함과 박함을 두기가 어렵습니다. 일본이나 미국의 예에 따라 러시아가 땅을 요구하며 교역을 요구하여 오면 이를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그 밖의 여러 나라가 이와 같이 땅을 요구하며 강화를 요구하면 어찌 막겠습니까.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仇怨을 사서 적이 될 것이 러시아 한 나라뿐이겠습니까. 만약 허용한다면 한쪽 귀퉁이 靑邱(조선)는 장차 국토를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황준헌의 책략대로 防俄策을 쓴다 하여도 러시아가 병탄침략하는 경우 만리 밖의 원조를 앉아서 기다리면서 京軍만으로 어떻게 방어해 내겠습니까(李晩孫,<嶺南萬人疏>, 신사년 2월).

뿐만 아니라 만인소에는≪조선책략≫에서 주장된 부국책과 야소교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응하고 있다. 즉 “서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업과 공업을 일으킨다 하지만 財用農工은 옛부터 좋은 법규가 있으므로 어찌 서학에 종사함으로써이겠습니까”520) 李晩孫,<嶺南萬人疏 신사년 2월>(韓㳓劤, 앞의 글), 124쪽에서 재인용.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邪敎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周孔程朱의 교를 더욱 밝힘으로써 온 백성이 단결하여 사악하고 추한 무리를 물리쳐야 한다”521) 위와 같음.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이만손은 김홍집 및 정부 대신들에게까지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리고 황준헌의 책을 물이나 불에 던져 버려야 한다고 제언하였다. 즉 “책을 수화에 투척하여 좋고 나쁨을 명시하여 사악하고 추한 무리의 간사함을 허용하지 못하게 하여 우리의 예의의 풍속이 천하만세에 장차 할 말이 있을 것”522) 위와 같음.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집단적인 반대상소에 대하여 고종은 “闢邪衛正이란 근본방침에는 疏陳을 기다릴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의 私擬文子에 이르러서는 애초부터 탐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유생들이 잘못 보고 들추어 내고 있으니 이 같은 聯疏를 다시 올려서 조정을 헐뜯고 비방하지 말고 퇴거할 것”523)≪日省錄≫242책, 고종 18년 2월 26일.을 명하였다.

≪조선책략≫을 도화선으로 하여 일어난 서구열강과의 개국통상 문제는 조선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면서 전국적인 사회적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만인소 외에도≪조선책략≫과 관련한 조선의 정책적 진로를 모색하는 내용의 상소가 많이 올라왔다. 그 중 무과에 급제한 洪時中의 상소에는 당시 인천개항을 중심으로 일본에 의해 강요되었던 수교의 성격을 비판하며≪조선책략≫에 대하여 논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일본이 러시아가 두려워 우리와 화친한다면 일본의 약함은 이미 드러난 것인데, 약한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일본과 화친하여 러시아의 위협을 막는 것은 크게 잘못된 방책이라고 비판하였다.

옛날의 일본과 교섭할 때 일본은 동래 한 곳에만 머무르고 그 關市의 규칙도 엄격하여 일본이 우리의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일본은 마음대로 우리 나라 요충지대를 점거하고 해변에 기항하여 바다의 경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잘못해도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니 이는 우리가 일본의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 됩니다. 개항설시하고 稅規를 마련하여 아편, 사학의 책 등은 서로 譏捕하여 엄벌에 처하면 우환이 없다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인심은 巧術과 邪說과 영리에 빠져 들어 우미한 자는 아편을 좋아하고 傑傲한 자는 야소교서를 보고 미혹되어 결국 모두 아편을 복용하게 되고 사교에 물들게 되어 기포하고 법규를 적용한다 하여도 한갖 空文虛套가 될 것입니다. 일본과 화친하는 것이 러시아의 위협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이 진실로 러시아가 두려워서 우리와 화친한다면 일본의 약함은 이미 알 만합니다. 따라서 약한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러시아의 내침을 완화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日省錄≫243책, 고종 18년 3월 23일).

그리고 나서 홍시중은 이미 일본과 수교했고 사신왕래가 잦아서 국정이 다 누설된 이 때 일본을 엄하게 배척한다면 일본이 이것을 구실 삼아 사단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일본과의 수교방침을 다음과 같이 제한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사신교환을 엄격하게 제한하여 10년에 1회로 하고 왜관에 10일 이내로 체류하며 수행원을 10인으로 하고 이들이 왜관을 벗어나서 나다니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인천 등 개항장에 대한 철저한 감시를 해야 합니다.

셋째, 통상을 제한하여 교역일을 월 2회로 하고 내항선 수를 2∼3척으로 하고 교역품은 일본의 산품으로 하며 양화를 엄하게 금지하고, 물물교환만을 하여 화폐사용을 엄금하고, 미곡·포목 등의 무역을 금지할 것이며 조선상인에 대하여 5할의 과세를 부과하여 무역을 억제해야 합니다.

넷째, 새로 유입되는≪중서견문≫·≪만국공법≫·≪조선책략≫등의 서양과 일본의 서적을 수거하여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日省錄≫243책, 고종 18년 3월 23일)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만인소의 소두인 이만손은 3월에 다시 재소를 올렸다. 5월에는 경상도 유생 金淳鎭, 경기도 유생 柳冀永, 충청도 유생 韓洪烈이 상소를 올렸다. 윤7월에는 강원도 유생 洪在鶴, 충청도의 趙啓夏, 전라도의 高定柱 등의 수교반대상소가 쏟아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 1881년 7월에 홍재학이 올린 만언소에는 당시 집권세력이 일본과 서양이 똑같은 폐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통상을 해온 것을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즉 일본과 통상해 온 결과 사설이 횡행하고 洋織과 양물이 온 나라에 넘쳐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정척사는 정학과 대의를 위한 祖宗의 유업이기 때문에 지금의 정치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정치적 정통성의 기반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정척사의 기반을 망각하고 主和賣國을 감행하려는 조정의 관료를 처단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홍재학의 주장을 보면 아래와 같다.

오늘날 온 나라에서 입고 있는 것은 양직이고 사용하고 있는 것은 양물이며 流涎하는 것은 洋技이고…또한 지금 보고 들은 것을 말하면 온 나라에 邪書가 허다하고 충만하여 名士碩儒가 빠져 들고 있습니다. 그러한즉 승훈·가환은 우리 나라의 洋夷이며, 耶蘇는 유럽의 양이이며, 花房義質은 일본의 양이입니다. 우리 나라의 승훈·가환은 선왕께서 이들을 사형에 처해 제거했는데 일본의 花房義質은 전하께서 이를 용납하고 접촉합니다. 용납하고 접촉할 뿐만 아니라 한마디 말이라도 침범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귀양보내거나 쫓아 보내기에 겨를이 없고 힘을 다해 아첨하는 자는 벼슬을 높이고 은상을 내리기에 또한 겨를이 없으니 이는 세 분(정조·순조·헌종)의 聖王과는 남쪽과 북쪽으로 방향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위정척사는 정조 이래로 내려온 조정의 기본정책으로서 아직도 그 의리가 빛나고 있는데 고종친정 이래로 일본과 서양의 똑같은 해를 모르고 일본과의 통상을 주장해 온 결과 사설과 이의가 횡행하여 조선의 사태가 위급하기 비길 데가 없습니다. 孔孟程朱의 큰 도는 날로 사라지게 되어 가정에는 윤리가 깨지고 사람에게는 예의가 허물어져 그 결과 종묘사직이 무너질 위기에 있습니다. 국왕은 더욱 위정척사의 대의를 밝혀 주화매국하려는 신료들을 처단해야 합니다(洪在鶴,<萬言疏>, 신사 7월).

이와 같이 유림은 개국통상과 이러한 정책을 추구하고자 한 개화세력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당시 역사의 바퀴는 이들의 주장과 함께 하지 않는 방향으로 굴러 갔다. 집권세력은 국왕을 포함한 개화파관료 김홍집에 대하여 비판하고 나아가 권력의 정당성에까지 도전하는 유림에 대하여 강경하게 맞대응하였다. 유림에 대한 처단이 감행되었던 것이다.

만인소의 소두인 이만손과 홍시중은 유배의 형을 받았다. 만언소의 홍재학은 1881년 서소문밖 형장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홍재학의 상소는 같은 화서문인인 김평묵이 대필하였는데, 이로 인해 김평묵도 문구가 극히 격렬하다고 하여 조정으로부터 섬에 귀양보내졌다.

한편 과격하고 강경한 위정척사파의 왜양일체론과 집권세력의 개항명분론의 대립이 격화되어 갔던 1880년대에 유림 가운데서도 새로운 사상이나 입장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진행되던 근대적 역사의 흐름에서 강경한 위정척사만으로는 자주와 자강을 동시적으로 달성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일부 유림은 서양으로부터의 이질적인 사교와 외세를 일단 부정하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서양의 기예와 능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1881년 6월 8일 전 장령 郭基洛이 올린 상소는 이와 같은 입장과 논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곽기락은 요새 각도 유생들이 위정척사라는 명목으로 거듭 상소를 올려서 온 나라가 서학에 빠지고 양복을 착용하게 될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수교대상으로서의 일본과 배척대상으로서의 서양을 각각 별개로 파악하였다. 곧 대일수교와 對洋斥洋을 분리시킴으로써 당시 현실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수교정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척양의 한계를 사교라는 이질적인 서양의 종교 내지 문화로 규정하고 자강의 한 방법으로 서양의 기술 내지 문명 등에 대하여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유연한 입장을 취하였다.

…우리가 일본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양을 견제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본이 서양과 交好하고 양복을 입고 양학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못 됩니다. 우리가 교호하는 것은 다만 일본뿐이요 어찌 양이와 더불어 통하는 것이 되겠습니까…황준헌 책자는 우리와 관계되는 긴급한 적정 등에 대한 조치책이므로 그것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오직 조정에서 정할 일입니다. 일본과의 수교는 옛부터의 교린관계와 천하통상의 현 정세에 비추어 그것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적절한 조치로서 자강을 꾀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피폐된 내정을 개수하고 밖으로 외적을 막으면 됩니다…또한 서양이라고 하더라도 기계기술이나 농서가 진실로 이익이 될 만한 것이면 반드시 택하여 행할 것이요, 그 사람으로 해서 그들의 良法까지 물리칠 필요는 없습니다(郭基洛,<疏陳時弊條>).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자는 주장은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체결을 계기로 문호의 개방이 점점 확대되자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들 주장도 다양하게 보다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즉 直講 朴淇鍾의 西器이용책을 비롯하여, 鴻山유학 趙聲敎의 이용후생론, 출신 鄭暎朝의 문호개방론과 산업진흥책, 전 주사 柳完秀의 기선건조론, 廣州유학 趙汶의 기술교육론 등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조선이 종래의 동양적인 ‘사대교린’의 국제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제관계에 들어서게 되면서 국가안위와 결부된 위기의식이 더욱 팽배해져 갔기 때문이었다.

1882년경 이러한 주장을 담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 유림의 상소들을 보면, 우선 박기종은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그것을 멀리할 것을 주장하면서 “器는 이로운 것으로 진실로 이용후생이 될 것인즉 농상·의약·甲兵(무기)·舟車 따위는 어찌 이것을 가려서 하지 않을 것이 있겠는가”524)≪承政院日記≫, 고종 19년 9월 5일.라고 말하였다. 조성교도 또한 “서양의 기계는 耕織이나 兵備에 편리하므로 이것을 배우면 국민의 이익이 될 만하다”525) 위와 같음.고 그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정영조는 우리 나라도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수 없으므로 국제적 신의에 의존하여 독립을 유지하려면 각국과 수교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문호개방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역진흥·외화획득으로 서양산물을 직접 생산하자는 산업진흥책을 제안하였다.

…지금 동서남북 수교관계가 폭주한 가운데 각국 화폐가 유통되고 있으니 서로 편리하고 우리 나라의 常平錢이 나가면 타국의 화폐가 들어와 財幣가 극히 풍부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차·화선·기계·전선 등을 조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承政院日記≫, 고종 19년 9월 14일).

광주유학 조문도 “오늘날 이 땅에 와 있는 외국군대의 군비와 그 병기는 본받을 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더욱이 그들 공예의 묘함과 상업의 번성과 의약의 기술 등은 그 정수와 묘리를 취한다면 국민들이 모두 충분히 그 재예를 습득하고 그 기술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526)≪承政院日記≫, 고종 19년 9월 20일.라고 기술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출신 尹善學도 “서법이 나오자 그 기계의 정교함, 부국의 계략은 비록 주나라를 일으킨 呂尙, 촉나라를 다스린 제갈공명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그들과 더불어 논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들 배·차·군·농기계 등과 같이 국민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이롭게 한 것들은 모두 외형적인 것으로 국가에 유리합니다. 고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器이지 결코 그 道가 아닙니다. 그러니 준재들을 뽑아 기계 만드는 관서를 두고 외양에 출입시켜 그 제조법을 배워서 급속히 그 효용을 보게 하면 그 才智함과 정교함이 다른 나라보다 능가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527)≪日省錄≫263책, 고종 19년 12월 22일 무신.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더욱 발전하여 서양의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전개되었다. 1882년 9월 22일 유학 高穎聞이 올린 시무상소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포함되었다. 그는 서양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근대적인 여러 가지 서양제도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즉 의사당·상회소·국립은행·해군순사제를 특별히 설치하고 채광 및 화폐정책을 실시하며 관제·세제·녹봉제의 혁신 등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기술의 도입입니다. 서양 각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선 그 풍물을 살펴서 우의를 신장시키고 거기서부터 기술교사를 청하여 우리 나라 상하 인민들에게 새 기술을 습득시켜야 합니다.

둘째, 公議堂의 특별한 설치입니다. 정부 밖에 따로 공의당을 특설하여 시무에 밝은 인사들을 널리 구하고 참여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정사를 돕게 해야 합니다.

셋째, 채광·통화정책의 실시입니다. 법에 따라 채광을 장려하고 三幣를 점차 제한없이 계속 유통시켜서 화폐유통을 성하게 함으로써 遊食者를 없애야 합니다.

넷째, 巡査制의 실시입니다. 5家編法으로 50호를 1區로 하고 구마다 구장 1인을 선정하여 구장 아래 구마다 4명의 순사를 두어 도적·水火 등의 폐해를 방지해야 합니다.

다섯째, 상회소·국립은행의 설치입니다. 서울 안에 큰 규모 상인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利路便否를 상의케 하고 그 손해에 따라 진세토록 해야 합니다.

여섯째, 해군의 특별한 설치입니다. 인천은 삼남의 漕軍의 요충이며 京師海門의 咽喉이므로 해군을 특설하여야 합니다.

일곱째, 세법개정입니다. 冗職을 대폭 없애고, 雜貢은 신식세법으로 하며, 녹봉을 후하게 정하되 길을 넓게 열어서 搢紳士庶로 하여금 각기 그 업에 안정시켜야 합니다.

 (≪日省錄≫260책, 고종 19년 9월 22일 을사).

이와 같이 유림의 일부는 서양의 기술과 법, 제도를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다양하게 제안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이른바 ‘東道西器論’ 또는 ‘採西論’이라고도 한다. 용어가 암시하듯이 이 입장은 기존의 유교적 지배이념과 정치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의 발달한 산업, 군사기술 및 상공업제도를 도입하자는 절충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위정척사론의 기반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의 자존을 도모해야 하는 역사적 임무에서 수용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민족의 자강을 위한 서양기술의 도입, 채용을 용인하였던 입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입장을 ‘척사적 채서론’528) 洪淳昶,≪韓末의 民族思想≫(探求堂, 1982), 172∼173쪽.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집권세력이 여러 가지 개항정책을 정치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이념적 지지기반이 되었다. 즉 정부는 동도서기론에 입각하여 기존의 유교적 지배이념과 정치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의 발달한 산업, 군사시설 및 상공업제도를 도입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이 입장은 그대로 발전하여 1894년 갑오경장을 전후로 개화와 함께 자주를 강조하였던 온건개화파의 자주개화사상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1880년대의 위정척사운동은 위정척사이념을 공유하면서도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자강의 방법론에서 분화되어 갔다. 즉 한편으로는 왜양일체론에서 일본 및 서양과의 전면적인 개국통상을 반대해 온 강경한 위정척사파가 온존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왜양분리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서양과 서양의 기술을 각각 별개의 것으로 보고 일본과의 수교와 서양기술의 도입을 주장하는 척사적 채서론이 새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자강을 둘러싼 방법론으로서의 이러한 분화가 더 이상 진전하여 위정척사운동의 조직이나 이념상의 분화나 해체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1890년대부터 조선에 밀어닥친 민족모순이 너무 급박하게 전개되어 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 사회의 개혁방향에 대한 차이보다는 제국주의적 외세의 침략을 막아 내는 것이 중요한 역사적 단일의 과제로 되어 갔다. 따라서 강경한 입장의 위정척사파와 척사적 채서론의 위정척사운동도 결국은 외세를 배척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큰 흐름으로 변용, 합류되어 갔다.

<文昭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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