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Ⅲ. 위정척사운동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2) 위정척사운동의 의미

2) 위정척사운동의 의미

이렇듯 조선 후기 서구와 일본세력의 침입에 대항하여 일어나 의병운동으로 동태화된 후 마침내는 항일구국운동으로 발전되어 간 위정척사사상과 운동이 오늘날 어떤 의의를 갖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위정척사론은 조선 말기 서구열강과 일본세력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조선왕조 정치체제와 민족주체성의 보위를 위해 가장 강하게 저항한 대표적인 사상과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개국을 전후한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왕조 정치체제는 대내적 측면과 대외적 측면 모두에서부터 수많은 도전을 받아 급속한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내적 측면에서 보면 조선왕조 정치체제는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폐정과 정치체제의 내재적 모순이 심화되어 한계에 이르르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개항 직전의 정치사회적 구조는 조선왕조 정치체제가 이상으로 삼았던 天命德治의 명분과는 거리가 먼 세도정치로 변질되었고, 체제유지에 기여했던 요소들, 즉 왕실, 외척, 그리고 관료를 포함하는 사대부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이것을 구조적 기반으로 했던 체제의 안정은 급속히 와해되어 갔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삼정의 문란이 구조화되고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체제의 균열이 이미 제어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게 되자, 조선왕조 정치체제는 점차 그 질서와 균형을 상실해 가는 동시에 계속 약화일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이미 내부적으로 분해과정을 걷고 있던 조선왕조 정치체제를 향하여 또 하나의 심각한 도전이 대외적 측면에서 가해지고 있었으니, 다름 아닌 서세동점으로 일컬어지는 서구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구의 국가들은 이미 산업혁명을 완수하고 근대적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는 바, 이들은 처음에는 자생적인 변모과정을 겪으면서 내재적 민주독립을 성취한 국가들이었으나, 나중에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팽창주의적 민족주의국가로 변신하여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통상이나 이권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요구들을 제기하고 이러한 요구들을 관철하기 위해 정치·외교·군사적 행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러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19세기 중엽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관계에 급격한 변화를 몰고 왔는데, 여기에 더하여 조선왕조 정치체제를 더욱 괴롭힌 것은 조선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타율적으로 외세와 교섭했던 청나라와 일본이 서양세력을 모방하거나 그것에 가세하여 우리에게 도전을 해왔다는 점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1869∼1876년에 걸친 書契문제, 1876년의 ‘병자수호조규’문제, 1880년의 황준헌의≪조선책략≫문제, 같은 해의 통리기무아문 설치문제 등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조선왕조 정치체제에 역사적 충격을 던져 온 대외적 변수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의 조선왕조 정치체제는 바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외부적 도전에 부딪쳐 상당히 급속한 대내외적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내외적 모순과 도전에 대한 조선왕조 정치체제 내부의 대응 양상은 크게 몇 가지 사상 내지 운동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위정척사사상·동학사상·동도서기사상(채서사상), 그리고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개화사상 등이 그것이었다.532) 韓興壽,≪近代 韓國民族主義硏究≫(延世大 出版部, 1977), 70∼73쪽. 이 중에서 개화사상은 자기의 정체를 정립하기 이전에 근대화를 먼저 서둘렀던 오류를 범했는가 하면,533) 裵成東,<朝鮮 末期의 政治體制>(≪韓國政治學會報≫ 10, 1976), 55∼71쪽.
文丞益,<韓國 近代政治思想의 論理的 性格>(≪韓國政治學會報≫10, 1976), 159∼167쪽.
동학은 끝내 종교적인 민중동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 있었으며,534)G. Henderson, Korea:The Politics of the Vortex,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68, pp. 63∼71. 동도서기의 사상은 성리학적인 기초 위에서 아직 서양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어설프게 서양문물의 수용을 논한 무리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위정척사론은 조선왕조 500년의 통치이념으로서의 정통적인 성리학의 맥락에서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보위를 주장한 대표적인 사상이며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535) 李澤徽,<朝鮮 後期 斥邪論議의 展開와 그 意義>, (韓國政治外交史學會,≪朝鮮朝 政治思想硏究≫, 평민사, 1987), 164쪽. 또 실제로 이 사상과 운동은 외세가 이 땅에 들어올 때 제일 먼저 강하게 저항했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반외세운동에 영향을 준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후기 위정척사론의 본질은 힘에 의해 밖으로부터 불평등을 강요당하는 이른바 주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라는 민족적 모순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536) 崔昌圭,<斥邪論과 그 性格>(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16, 근대:개화·척사운동, 1975), 334쪽.는 평가는 일면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위정척사사상과 운동은 그 기저에 수구적이고 모화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것이 위정척사론이 비판받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할지라도 이 사상과 운동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보여준 철저한 자주와 배외의 정향은 한국 근대민족주의의 원류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둘째, 무엇보다도 위정척사운동은 민족자주와 주체성을 지향하는 전통적인 강력한 민족주의적 애국애족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위정척사운동의 민족의식적 뿌리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상적 근원의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조선왕조의 성리학사상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조선 말기에 나타난 위정척사론에는 성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강력한 주리적 경향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는 민족자존의 의식을 간직한 것이었다. 예컨대 화서와 중암은 주리이원론과 理主氣客의 입장에서, 그리고 노사는 유리론적 理主氣僕의 입장에서 각각 이기론을 전개하였는데, 그 공통된 관점은 理尊氣卑의 논리 위에서 조선왕조의 체제와 문화를 이로 보고 외세를 기로 규정하여 이에 대처하려는 자존적·자기수호적 의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정척사운동의 민족자존과 자주의 이념적 정향은 서양의 자본주의적 팽창에 따른 민족의 경제적·문화적 피폐를 염려한 위정척사론자들의 경고와 대비책을 통해 구체적인 정책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한편, 세계 열강들의 각축 끝에 일본이 최종 침략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그 행동을 노골화하자, 위정척사론은 척사의 대상을 왜양일체의 관점으로 확대시키는 동시에 이에 맞서는 구국운동을 상소운동이나 의병운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하여 형성, 발전된 위정척사운동의 민족자존과 자주의식은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적극적 저항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연결되어 후일 항일 민족주의운동의 한 연원을 이루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위정척사사상과 운동은 원래 화이의식을 기조로 하는 모화적 보수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말의 변천하는 역사적 상황에서 자신을 심화, 발전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민족자존과 자주의식을 근간으로 하는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으니, 우리 민족의 민족주체성의 계보는 이 위정척사사상과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537) 洪淳昶,≪韓末의 民族思想≫(探求堂, 1982), 54쪽.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조선 말기에 있어서 민족적 자주성과 자의식을 기초로 하는 민족주의이념의 형성에 관한 논의는 단호한 배외적 민족주의이념으로서의 위정척사사상에서, 그리고 위정척사사상에 이념적 바탕을 둔 의병운동에서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위정척사운동은 외세와의 단절된 상태를 전제로 하여 폐쇄적 척화만을 고집한 수구적 운동이 아니라 우선 국력을 배양하여 외세의 도전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 자강아사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근대적 시각에서 보면, 위정척사사상이나 운동이 서양을 금수로 인식하여 척화를 주장하고 양물을 奇技淫巧로 단정하여 배격한 사실은 아무리 그러한 주장의 이론적 근거가 충분하다 하더라도, 폐쇄적인 수구성을 벗어나지 못한 사상과 운동이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초기의 척사론자들이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관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러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혁신적인 사고와 노력을 등한시하는 등 비효율적인 전근대적 정치행태에 집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정척사운동이 반동복고적이었고 폐쇄적 수구성에만 떨어진 것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 운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초기의 위정척사론은 폐쇄적 배타성을 강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보수적 수구성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개국 이후 특히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민족적 일체성에 의한 국민의 통합을 강조하는 한편,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정치체제의 자율과 자존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이념적 정향을 확대시켜 나갔으니, 궁극적으로는 국내외적 정치상황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국가의 보위와 민족의 자존을 지향했던 진정한 민족자주의 사상과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보면 위정척사운동은 노도처럼 밀려오는 외세의 도전에 부딪쳐 대책없이 둑을 터놓음으로써 홍수에 휩쓸려 들어가는 일을 당하기보다는, 먼저 제방에 수문을 만들어 놓고 필요한 수량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주체적인 변화를 도모하자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제방에 수문을 만드는 일이란 구체적으로 내수를 통한 자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으며, 적절히 수량을 조절하면서 주체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일이란 무조건적인 수구적 폐쇄성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의 현실을 인정하고 변동에 적절히 적응, 독립된 주권국가로서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위정척사운동은 수구적이고 보수적인 고루한 운동이 아니라 조선왕조 말기의 변천하는 역사적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심화, 발전시키면서 자강아사의 논리를 통해 주체성의 위기를 자율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민족자존과 자주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李澤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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