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3) 하층민의 저항운동

(3) 하층민의 저항운동

서울에서는 19세기로 들어서면서 각종 형태의 도적사건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일반 민가·시전·부호가는 물론 각급 관아와 궁궐에 도적이 침입하는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도적들은 혼자서 또는 두셋이서 도적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는 수십명이 成群作黨하여 대낮에는 주로 길거리를 지나는 자들을, 밤중에는 칼과 몽둥이를 들고 부호가를 습격하였다. 도적은 주로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몰락한 이농민들이 서울로 흘러 들어온 流丐, 또는 서울주민으로 정착하여 일정한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無恒之輩·無賴之類·雜技之類라 불리는 자들로서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563)“근년들어 遊手가 극히 많아지고 流丐들이 成群하여 街巷에 가득하고, 촌락에 출몰하여 평민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같이 가뭄이 심한 해에는 서로 모여 도적이 되고, 閭巷의 無賴之類들이 좇아 和應하니, 비록 1,000명을 잡는다 하더라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備邊司謄錄≫202책, 정조 18년 10월 16일)라는 기록은 이러한 사정을 단적으로 표현하면서 도적행위가 이미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어 가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사대문밖 교외지역은 물론 도성 안에서도 도적의 집단적 출몰은 매우 빈번한 일이 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성 안에 사는 하층민들이 밤이면 도적으로 변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오부의 각 洞任掌 또는 里任掌들에게 계속 감결을 내려보내 신고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데도, 이들은 도적체포에 거의 협조하지 않고 있었다.564)≪左捕廳謄錄≫1책, 을미 9월 초6일 甘結五部結幕.

도적사건 중에서 특히 중요시해야 할 것은 궁궐침입사건이다. 이전 시기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궁궐침입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국왕의 거처인 창덕궁은 물론 종묘, 사직단, 그리고 경희궁을 포함한 거의 모든 궁궐에 침입하고 있었다. 침입의 목적은 물론 대부분이 절도였으며, 內人房의 궁녀들을 희롱하려던 경우도 있었다. 궁궐에 침입하는 자들은 농촌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서울 각지를 전전하던 유민들을 비롯하여 궐내 잡역노동자, 하급 군병, 관청 말단직책 등의 하층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565)궁궐침입사건에 관한 몇 가지 기록을 보면, ① 昌慶宮越牆侵入事件(≪左捕廳謄錄≫권 10, 신유 정월 초9일), ② 宗廟越牆侵入事件,≪左捕廳謄錄≫권 11, 신유 7월 초4일, ③ 宣禧宮祭器偸竊事件(≪左捕廳謄錄≫권 11, 신유 6월 29일), ④ 昌德宮偸竊事件(≪左捕廳謄錄≫권 6, 을사 3월 초4일), ⑤ 昌德宮越牆侵入事件(≪左捕廳謄錄≫권 10, 병진 5월), ⑥ 敦化門月臺侵入事件(≪左捕廳謄錄≫권 10, 병진 5월), ⑦ 孝昌墓竊盜事件(≪左捕廳謄錄≫권 1, 정묘 2월 25일), ⑧ 社稷壇神主偸竊事件(≪左捕廳謄錄≫권 10, 무오 6월) 등이 있다. “궁궐담을 넘어 침입하는 것은 관부의 담을 넘는 것보다 백배 엄중하고 어려운 것”566)≪左捕廳謄錄≫권 11, 신유 7월 초4일.이라는 인식이 보여주고 있듯이 궁궐침입은 국가의 상징인 왕실의 존엄성에 대한 저항으로서 尊王의식의 약화와 함께 도시 하층민의 의식성장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또한 국왕이 거둥할 때 가마에 투석한 사건이나, 괴서사건, 御寶위조사건, 璿譜를 비롯한 각종 족보위조사건들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567)≪秋官志≫3편, 考律部 寶印. 이 사건들은 도적사건들과 함께 중세사회 해체기의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어 감을 드러내 보여주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사회체제를 점차 무너뜨리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각종 형태의 범죄행위와 저항행위에 대해서 지배층은 가혹한 형벌을 가하며 대처하고 있었다.568) 徐壹敎,≪朝鮮王朝 刑事制度의 硏究≫(博英社, 1974). 그러나 기존질서와 기득권의 옹호를 위한 지배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에 도전하여 사회의 변동을 촉구하는 범죄 및 사회변동에 의하여 파생된 범죄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좀더 큰 규모의 저항운동도 계속 전개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자료가 밝혀진 몇 가지 사례를 검토하여 도시 하층민들의 저항의식과 운동과정 및 특성을 정리해 보자.

① 쌀폭동:1833년 3월 9일 서울 시내에서는 경강상인 및 미곡상들의 독점과 쌀값 조작으로 쌀값이 크게 치솟고 쌀 구하기조차 어려워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이에 저항하는 하층민들의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569)이 민란은 상업자본의 성장문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도시 소비자층인 하층민들의 ‘反都賈運動’으로 비교적 자세하게 분석된 바 있다(姜萬吉,≪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 高麗大 出版部, 1973). 난민들은 성 안팎의 저자와 거리를 휩쓸면서 서울 시내의 上米廛·下米廛·雜穀廛을 비롯한 모든 미곡전을 습격, 파괴하고 불을 질렀으며, 이어서 한강 연안지역으로 나아가 경강상인들이 곡식을 감추고 쌓아 둔 집들을 15채 이상 파괴하였다. 뚜렷한 조직은 없었지만 金光憲·高億哲 등 하층민 지도자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하층민들을 결집, 동원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경강상인들과 시내의 미곡상인에 대해 집중적이고 폭발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 민란은 비조직적이고 지속기간이 짧았지만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도시 하층민들의 요구를 드러낸 운동이었다. 정부지배층은 발생 초기에는 포도청 校卒을 파견해 해산시키려 하였지만, 점점 난민의 규모가 커지면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 버렸기 때문에 결국 각 영문의 군병들까지 모두 동원함으로써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난민들을 체포하는 대로 주동자 여부를 가릴 것 없이 그 날로 효수케 하였음은 지배층의 통제방식도 극단적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② 뚝섬주민 저항사건:1851년 2월에는 뚝섬주민들이 포도청 포교들의 횡포에 맞서 집단적인 저항을 전개한 바 있었다. 뚝섬은 한성부 행정 관할구역 중 가장 외곽지역이었고 한강 상류지방의 전곡·목재·시탄 등의 집산지로서, 柴木商을 비롯한 각종 상인들이 몰려들어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유민들이 비교적 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뚝섬처럼 도시 하층민들이 집단거주하는 교외의 벽촌은 양반·부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비해 오부 관원을 비롯한 하급 관리들의 대민수탈이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었고, 또 실제로 심한 수탈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사건은 좌우포도청의 군관과 포교들이 뚝섬주민 高德哲을 뚜렷한 이유없이 붙잡아 가면서 시작되었지만,570)≪訓局謄錄≫권 65, 신해 3월 4일.
≪右捕廳謄錄≫6책, 신해 2월 일.
이는 단지 뚝섬주민들의 잠재되어 있던 불만을 활성화시킨 촉발요인일 뿐이었다. 뚝섬지역의 주민들은 지배층으로부터 억압 또는 수탈당하고 있다는 공통된 감정을 이미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었고, 지배권력의 대행자로서 포도청을 비롯한 하급 관원들과 심각한 갈등상태에 있었는데, 이러한 조건들은 이 체포사건을 계기로 활성화된 것이며 포도청 군관과 교졸들이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된 것이었다.

운동의 동원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기제는 주민들의 불만을 결집시킨 향촌조직 책임자인 존위와 중임들이었다. 뚝섬지역의 행정책임자인 존위는 양반이 맡고 있었으며 주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였다. 그 밑에 중임 또는 임장이 평민들 중에서 선출되어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일종의 자문기구로 볼 수 있는 老人契도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마을책임자인 존위와 중임들이 계획을 짜고 노인계의 자문을 받는 한편, 기존 연락망과 조직에 의해 뚝섬 전 지역의 주민을 소집, 동원시킨 것이며, 운동의 과정에서 중임인 韓宗浩가 핵심적인 지도자로서 주민 중에 훈련도감 군병과 임노동자들을 묶어 선도집단을 형성하여 전 주민을 이끌었던 것이다.571)≪右捕廳謄錄≫6책, 신해 2월.

③ 목수집단 저항사건:1860년 5월 1일에는 목수집단이 좌변포도청·우변포도청·좌변군관청·포도대장 저택을 차례로 습격하여 청사와 저택을 파괴하고 교졸·종사관·군관 수십 명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궁궐 건축공사에 참여하고 있던 목수들 중에 白季昌이란 자가 공사를 위해 지급되는 철물 가운데 일부를 몰래 빼돌려 팔다가 적발되어 좌변포도청 기찰포교들에게 잡혀감으로써 비롯되었다. 서궐(경희궁)·二字處所·三字處所 등 여러 작업장에 흩어져 일하던 목수들은 동료가 포도청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 각 처소에서 작업을 중지하고 모여 掌木手의 지휘로 포도청을 습격하였고, 동료가 잡혀간 좌변포도청뿐만 아니라 우변포도청·좌변군관청·포도대장 저택까지 모두 습격 파괴한 것이다.572)≪右捕廳謄錄≫ 14책, 경신 5월 17일.

이 사건의 직접 원인은 철물의 潛賣에 있었다. 당시 목수들의 목재와 철물의 잠매는 자주 있었고, 목수들 사이에서는 예삿일로 여겨질 정도로 낮은 임금을 보충하는 수단이었다. 목수들은 철물의 잠매는 결코 도적질이 아니라고 말하며 오히려 정당한 행위로 보고 있었으므로, 철물잠매로 동료가 포도청에 잡혀간 사실은 목수집단 자체에 대한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573) 위와 같음. 또 이 사건은 철물잠매를 계기로 일어나긴 했지만, 목수들이 평소 포도청 관리들로부터 심한 억압과 수탈을 당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불만이 계속 누적되다가 철물잠매를 계기로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들의 저항이 동료를 잡아간 좌변포도청뿐만 아니라 포도청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들의 불만이 조직적인 행동으로 발전한 것은 목수동업조합인 木房의 조직력 때문이었다. 이 시기 서울의 목수들은 목방을 중심으로 동업조합을 구성하여 시장을 상대로 목제품을 생산하는 한편 각종 토목공사에 모군으로 고용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목수는 특수한 기술을 지닌 기술자였다. 목수들의 동업조합은 邊首 또는 掌木手를 중심으로 조직된 여러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토목공사에 참여할 때도 이들의 지시에 따라 집단별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목수들의 불만은 목수집단 구성원으로서의 동료의식과 목방조직을 통해 엮어질 수 있었고 조직적 저항이 가능했던 것이다.

④ 그 밖에 군병집단 저항사건은 여러 차례 발생하고 있었다. 1863년에 금위영소속 군병들이 급료로 지급되는 쌀의 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시위를 벌이다가 주동자들이 체포되면서 진압된 사건이 있었으며,574) 李瑄根,≪韓國史-最近世篇≫(乙酉文化社, 1961), 470쪽. 1877년에는 훈련도감 군병들이 급료를 여러 달 지급받지 못하자 榜文을 작성하여 길거리에 붙이고 민중들을 모아 시위를 전개하다가 역시 주동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진압된 사건이 있었다.575)≪承政院日記≫, 고종 14년 8월 10·11일.
≪高宗實錄≫, 고종 14년 8월 10일.

1882년 2월 즉「임오군란」불과 4개월 전에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일부 민중들이 함께 참가하는 대규모 군병집단의 폭동이 있었다. 좌변포도청 포교들이 동대문 부근 동리에서 주민들을 함부로 잡아가다가 동민들에게 오히려 몰매를 맞고 도망하였는데, 도망간 포교들이 다시 다른 교졸들을 데리고 와서 동대문 일대의 동리주민들은 몰론, 지나가던 훈련도감 군병들과 동대문 守門군병들까지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포도대장 저택으로 끌고 갔다. 끌려간 동리주민들과 군병들은 모두 31명으로 4명은 맞아 죽고 나머지는 포도청 옥사에 갇혔다. 이 사건을 알게 된 훈련도감 군병들은 지휘자 卓琦桓을 선두로 수백 명이 일부 동민들과 함께 포도청을 습격하였다. 그들은 갇혀 있던 군병들과 주민들을 구출하고 시체를 꺼내는 한편 포도청 청사를 파괴하고 포교들을 구타하였다.576)≪左捕廳謄錄≫18책, 임오 3월 15일·17일.

앞의 두 사건은 국가재정의 위축으로 군병들에게 급료가 정상적으로 지급되지 못한 점이 원인이었고, 뒤의 사건은 포도청 관리들의 행패와 권력남용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보다 넓게는 사회체제의 모순이 재정적·행정적 측면에서 나타났고, 이에 피해를 입고 있으면서 지배층과 갈등관계에 있던 군병들이 군대조직 하부의 연결망을 동원조직으로 이용하면서 공통된 적의 표출대상인 지배정권에 저항하는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간략히 검토한 네 유형의 사건은 제각기 그 전개구조와 동원조직, 지도자, 그리고 공격대상에서 차이를 보이면서도, 도시 하층민들이 지배층으로부터 당하는 각종 피해와 억압에 맞서 자신들의 요구를 집단적으로 표현하고 관철시키려 했던 저항운동이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서울 하층민의 저항운동은 19세기 전 시기에 걸쳐 끊임없이 계속되어 오고 있던 농민들의 민란, 또는 농민전쟁과 함께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사회경제적 변동과정에 조응하여 새롭게 발전하던 도시 공간에서 발생한 사회적 모순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세사회 구조의 해체를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경험의 축적이「임오군란」이라는 대규모 저항운동을 가능케 한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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