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3) 임오군란의 영향
  •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일본은「임오군란」의 직접적인 공격목표였다. 일본정부는 1876년 무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켰고 통상을 통해 엄청난 부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후발 자본주의국가로 서구열강과의 대외무역에서 적자를 기록하던 일본에게 조선시장은 매우 큰 비중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 안에서는 征韓論이 대중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전파되고 있었으며, 특히 언론은 그러한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일본공사관이 피습을 당하고 상당수의 공관원과 군인이 피살당했다는 소식은 일본 국내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일본 국내 각 신문사는 곧 호외를 발간하고 전 국민을 긴장 속에 몰아넣는 선동적 기사를 연일 싣기 시작했다. 각 보도기관들은 저마다 외무성을 비롯하여 주요 관청, 군부, 그리고 시모노세키와 나가사키까지 특파원을 보내 대부분 약간의 사실에 많은 추측이 담긴 기사를 경쟁적으로 보도하면서 마치 곧 전쟁이 일어날 듯이 여론을 자극하였다. 그러자 흥분해 종군을 지원하는 자가 속출하였고 군사비에 충당하라고 헌금을 하는 자들은 물론 무력으로 대원군을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특히「玄洋社」을 중심으로 한 정한론자들은 의용병을 조직하는 한편 개전 주장을 활발히 펴나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투기업자들이 나서 물품을 매점하는 소동을 일으켜 요코하마(橫濱)의 은화시장과 洋鐵시장, 그리고 일반 소비물자의 시세가 급등하는 현상을 보이면서 불과 며칠 사이에 사회 전반이 준전시상태 같은 분위기로 빠져 들어갔다.649) 白鍾基,≪近代韓日交涉史硏究≫(正音社, 1977), 199∼201쪽.

일본정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의 정치적 불만을 대외문제에 쏠리게 함으로써 적절히 언론을 이용하였다. 당시 일본은 자유민권운동이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1881년 정변으로 민권론자들을 추방하고 천황제 군국주의를 지향하는 伊藤博文 등이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자유민권운동 탄압에 고심하던 일본정부는 이 사건을 이용해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650)旗田巍,<明治期の日本と朝鮮>(日本國際政治學會 編,≪日韓關係の展開≫, 有斐閣, 1963), 4쪽. 정부는 어용지를 동원해서「임오군란」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으며 아울러 매우 선동적인 그림을 담은 팜플렛과 채색화 등을 유포시켜 여론의 방향을 마치 곧바로 전쟁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로 몰고 갔다.651) 宮武外骨 編,≪壬午鷄林事變(新聞雜誌所載錄)≫(1932).
權錫奉, 앞의 글(1975), 417쪽.

하나부사공사를 파견하면서 일본정부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우선 이노우에의 훈령 가운데 “육해군을 파견하는 것은 개전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절과 거류민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만약 폭도와 부딪칠 경우에도 선제공격을 해서는 안 되며, 만약 개전이 불가피하다면 즉시 본국정부에 알려 명령을 받도록 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고, 조선정부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일단 제물포로 돌아와 개항장을 점거해 거류민을 보호하면서 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파병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경주재 각국 공사에게 일본정부는 평화주의에 입각하여 조선정부를 문책하기로 했다는 통지를 보내어 침략이 아님을 양해시키려 했고, 주청공사를 통해 청국정부에게 일본군파견 목적을 설명해 오해가 없도록 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물론 만약의 개전사태에 대비해 동경에 있던 병력 일부를 후쿠오카(福岡)에 파견해 그 곳의 병력과 합쳐 혼성여단을 편성한 후 명령에 따라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말하자면 국내에서는 준전시체제를 유지하고 조선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하면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되 즉각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노우에는 훈령을 내리면서 “일본상민을 위하여 安邊을 開港場으로 할 것”과 “만일 朝鮮政府가 중대한 과실을 범한 사실이 있으면, 巨濟島나 松島(鬱陵島)를 日本에 양여하여 사죄의 뜻을 표할 것”이라는 사항을 포함시켰다. 그 뒤 하나부사공사가 조선정부에 요구한 내용 중에 “원산·부산·인천 각 항구의 통상 허용범위를 사방 100리로 확대하고, 새로 양화진에 시장을 개설하여 서울을 개방하며, 함흥과 대구를 왕래하며 통상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통상을 확대하고 가능하다면 주요 섬을 점령하겠다는 이러한 생각은 평소 일본 외무성이 조선정부에 요구하고자 했던 것들이었다고 생각된다.

하나부사공사가 조선에 다시 들어와 요구사항을 제시했을 때만 해도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협상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청군이 대원군을 납치하고 군란을 완전히 진압하면서 정권이 다시 바뀌자 청군의 중재에 따라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국왕은 李裕元을 전권대신, 김홍집을 전권부관으로 임명하여 인천 제물포에서 회담에 임하도록 했다. 일본공사는 일본측의 요구사항을 부분적인 수정 후에 거의 그대로 관철시켰고, 조선측 대표들은 협박조에 가까운 무력외교에 굴복하여 약간의 수정안만 관철시켰을 뿐 대부분 일본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결국 7월 17일<朝日善後條約>(일명 濟物浦條約)을 맺었다.652) 金正明 編, 위의 책(2권), 225∼227쪽.

그 내용은 조선정부가 주동자들을 체포해 처벌하고, 피살된 일본인의 장례를 치른 뒤 이들의 유족과 부상자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측 손해배상비와 파병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부담할 것이며, 일본공사관을 경비할 군대주둔을 허용과 아울러 특사를 파견해 공식적으로 사죄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20일 이내에 주동자의 체포와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일본이 개입할 수 있다고 못 박고, 일본공사관 경비를 구실로 삼아 일본군대를 서울 도성 안에 주둔시키겠다고 한 것은 조선의 군대와 경찰을 전적으로 무시·배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조선의 주권을 침해한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손해배상비 50만 원은 당시 조선의 국가재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나친 요구였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같은 날<朝日修好條約>(일명 江華島條約)의 續約 2개 조항에 동의한 것이었다.653) 金正明 編, 위의 책(2권), 232쪽. 이 속약은 강화도조약체결 이후 통상범위를 대폭 확대해 나가기 위해 여러 차례 일본정부가 조선정부에게 요청한 바 있었으며 그 때마다 거절당해 실현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이처럼 중대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조항을 일본은 혼란을 이용해 반강제로 얻어낸 것이다. 청국군대가 군란을 진압했고 그들의 힘에 업혀 정권을 되찾은 상황에서, 중재를 하던 청국측 마건충이 화해를 종용했기 때문에 조선측 대표들은 앞뒤 상황을 충분히 따지고 버틸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결국 충분한 협상을 포기하고 조선측 대표들은 일본의 요구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조약체결에 성공한 하나부사공사는 다시 이노우에의 추가훈령에 따라 대원군이 전국 곳곳에 건립한 반외세정책의 상징인 斥和碑를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의 쇄국정책과 유생세력의 위정척사운동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버리겠다는 의도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조선정부는 이 요구에 따라 전국의 척화비를 철거하였다. 한편 7월 21일 제물포에서 호리모토(掘本禮造)를 비롯한 13명의 일본인피살자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조선정부는 예조좌랑이 예물을 갖고 참석하게 했다. 또한 일본측이 청국군의 진압 때 체포, 처형당한 자들이 진범이 아니라고 불만을 제기하고 나왔기 때문에, 조선정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포도청에 명령하여 7월 말까지 9명의 용의자를 추가로 체포하였다. 일본측은 이러한 조치를 받아들여 죄인들의 사형집행을 일본군 1개 소대가 참석하여 지켜보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조약체결과 사후 처리를 대부분 일본측이 요구하는 대로 시행한 다음 하나부사공사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가 타고 간 선박에 조선측 謝過使로 파견된 전권대신 박영효와 그 일행이 동승하였다. 박영효는 일왕 명치에게 조선국왕의 사죄내용을 담은 국서를 제출하고 외무경 이노우에에게 예조판서의 사과문서를 전달하였다.

이상 간략히 검토한「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는 일본각의에서 결정한 방향과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정부와의 협상이 성공을 거두어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통상과 관련된 요구들을 관철시키면서 동시에 군대주둔권까지 얻게 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청국의 적극적인 개입이라는 변수가 놓여 있었다. 일본정부가 즉각 개전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청국을 포함한 국제관계가 악화되면, 조선뿐만 아니라 청국과의 전쟁까지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러기에는 일본의 군사적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청국은 군대를 조선에 그대로 주둔시키고 있었고, 조선정부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청국상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청국과 맞서 싸우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군사력의 확보가 절실해졌다.

때문에 일본정부는 이를 계기로 적극적인 군비확장정책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미 1878년에 설치되어 청국과 맞서 싸울 방안을 연구하던 일본 육군참모본부는「임오군란」의 발생 직후인 7월 2일(양력 8월 15일) 청국을 가상적으로 하는 군비확장안을 제출하였고 정부는 이를 채택하였다. 일본 해군도 이에 발맞추어 9월 초 이와쿠라(岩倉)우대신이 각의에서 청국을 가상적으로 한 해군확장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고, 해군성이 건의한 새로운 군함 건조계획이 제출되어 11월 15일 각의에서 의결되었다. 명치도 12월 24일 지방관회의를 궁중에서 소집하여 군비확장에 필요한 비용을 위해 조세부담을 늘릴 것을 지시하였고, 그에 앞서 22일에는 각의가 군비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라고 지시하면서 군인의 정신무장을 강조하는<軍人勅諭論>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그 뒤 일본정부는 청국과의 전쟁을 예상하면서 계속해서 군비확장에 나섰는데, 육군은 1884년부터 1894년까지 약 10년 동안 보병 12개 여단, 기병과 포병 각 6개 연대, 工兵·輜重兵 각 6개 대대를 정비하게 되었고, 해군은 1882년 26척이었던 군함을 1893년까지 32척으로 늘리면서 정비하였다.654) 白鍾基, 앞의 책, 204쪽.

이와 같은 임오군란 이후 일본의 급속한 군비확장이 단순한 군비의 문제 만이 아니라, 근대적인 군대형성의 시발점으로 파악할 때 그 시작은 1882년이 된다.655)藤間生大,<「壬午軍亂」と日本近代軍の確立>(≪海外事情硏究≫24, 熊本商科大學, 1985). 그리고 1880년대 내내 지속된 군비확장은 정치적으로는 임오군란 당시 청국 해군의 출동에 대한 위기감이 원인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생사무역을 중심으로 한 당시 세계경제를 유리하게 활용해 그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656)藤間生大,<日本近代軍成立の經濟構造-「壬午軍亂」を媒介とし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22,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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