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3) 임오군란의 영향
  • (3) 국내 상황의 변화

(3) 국내 상황의 변화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세력은 철저하게 제거되었다. 정부요직은 민씨 척족세력이 대부분 장악하였으며, 일부 개화파세력이 참여하는 형태였다. 정부는 임오군란 이전의 정책방향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며 개혁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청국의 입김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청국의 권고와 요구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조선정부는 관제개혁을 추진하였다. 군란 뒤 대원군이 복설했던 삼군부를 폐지하고 한동안 통리기무아문을 계승한 機務處가 설치되어 임시로 국정을 처리했는데, 집행조직을 갖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종래의 통리기무아문의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기구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그 결과 고문으로 들어온 마건상과 묄렌도로프의 자문을 받아 11월 17일 統理衙門 및 統理內務衙門을 설치하였고, 12월 4일에는 통리아문을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줄여서 外衙門이라 하였다)으로 명칭을 바꾸어 외교통상관계 사무를 담당하게 했으며 그 밑에 4개의 司라는 하위기관을 두었다. 그리고 통리내무아문을 統理軍國事務衙門(줄여서 內衙門이라 하였다)으로 명칭을 바꾸어 군대에 관한 일을 포함한 모든 내정관련 사무를 담당하게 하면서 7개의 ‘사’를 두었다.

군국아문과 교섭아문은 기본적으로 통리기무아문을 계승한 것이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발전적인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 교섭아문을 설치해 외교통상업무를 전담하는 부서를 독립시키고, 교섭아문보다 격이 높은 군국아문이 내정 및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동시에 교섭아문을 통제함으로써 짜임새가 갖추어진 것이다. 이후 교섭아문은 1894년 갑오개혁까지 계속 역할을 수행했지만 군국아문은 갑신정변을 계기로 폐지되었다.664)김필동,<한국 근대 관료의 초기 형성 과정과 그 역사적 성격:1881∼1894>(≪한국의 사회제도와 사회변동≫: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50, 문학과지성사, 1996, 182쪽).

군제도 개편되었는데 전적으로 청국군 주도로 진행되었다. 다시 복설되었던 훈련도감을 폐지하면서 먼저 9월 19일에 군병 500명씩의 2개 부대로 편성한 親軍을 새로 창설하였다. 두 부대는 각각 친군 좌영과 우영으로 분리되었으며 청국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편 박영효는 1883년 3월 광주유수로 임명되자 수백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신식 군대를 일본식 훈련으로 양성하였고, 윤웅렬 역시 남병사로 임명되어 北靑에서 모집해 온 군병에게 일본식 군사훈련을 시켰다. 박영효가 양성한 병력은 그가 광주유수에서 물러난 후 어영대장 한규직이 감독을 맡으면서 친군 전영이 되었고 남병영 군대를 합류시켰다. 이어 친군 후영까지 창설하여 4영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1884년 8월 29일에는 궁궐경비를 담당하던 용호영·금위영·어영청·총융청을 해체해 그 병력을 친군 4영에 분산 배치하였다.665) 박은숙, 앞의 글, 214∼215쪽.

이처럼 군사제도는 친군 4영체제로 정비되었지만 훈련방식과 간부의 정치적 성향이 청국지향적이던 좌우영과 일본지향적이었던 전후영 군병들 사이에는 심각할 정도의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 이 대립된 입장은 갑신정변 때 그대로 나타나 친군 좌우영군은 청군에 가담해 개화당정권을 진압하였고, 친군 전후영군은 정변에 동참하여 개화파의 명령을 받는 비극을 불러왔다.666) 박은숙, 위의 글, 215∼217쪽.

개항장이 늘어나고 서울 장안까지 일본상인과 청국상인들이 몰려들면서 조선상인들과의 심각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서울시장이 개방된 것은 우선 새로 체결된 조일수호조약속약 때문이었다. 첫째 인천 등 개항장 부두를 기점으로 100리(약 40km)까지 일본인이 진출할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고 양화진이 열리면서 서울침투가 가능해진 것이다. 청나라 역시<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서울에 청국상인이 상점·창고·여관을 개설할 수 있는 이권을 삽입했으며, 이를 본 영국 역시 영국인의 서울 상점개설권을 조영수호통상조약에 삽입해 버렸다(1883년 11월 26일). 이러한 모형으로 1902년까지 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벨기에·덴마크가 그들도 조약에 이 같은 이권을 넣었고, 미국과 일본은 최혜국조관에 따라 영국의 서울 상점개설권을 균점받게 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특히 청국상인의 진출이 두드러져 군란 1년 뒤인 1883년에는 인천·부산·원산 등 개항장의 상인 수가 99명으로, 다시 1년 뒤인 1884년에는 3.5배가 늘어난 353명에 이르렀다. 그 뒤에도 해마다 청국상인의 수가 늘어나는 동시에 점포개설도 크게 늘어갔다.667) 譚永盛,<朝鮮末期의 淸國商人에 關한 硏究-1882년부터 1885년까지->(단국대 석사학위논문,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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