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청통상협의

(1) 조·청통상협의

문의관 어윤중이 가지고 간 고종의 자문과 이 자문 내용을 따로 몇 개 조목으로 나누어 초록한 것은 이후 청과의 통상협의에서 중요한 안건이 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국왕이 통상 駐使 등의 일로 질의한다…舊章에 구애받지 않고 우매함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진언한다. 현재 외국인이 홀로 商利를 천단하고 선박이 바다를 달리는데 오직 上國과 우리 나라는 서로 해금을 지키니 視同內服之義와 다르다. 빨리 상국 및 우리 나라 인민으로 하여금 이미 개항된 口岸에서 서로 貿遷을 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또한 派使를 허락하고 入駐京師하여 두터운 정의를 통함으로써 聲勢에 도움이 되면 外侮를 막을 수 있고 민지를 굳게 할 수 있다…

1. 이미 通商駐使가 행해지고 있은즉 장정을 타결하고자 하나 오직 상국의 裁定을 앙망할 뿐이다.

1. 조선의 함경도에 烏口刺·甯古塔 民人이 와서 교역하는 일은 일찍이 말한 바 있는데 지금 아라사가 국경을 연해 있으면서 육로통상을 방해하려 하여 걱정이 되니 이 開市를 폐지하여 점증하는 아라사의 대두를 막자. 또한 商民을 供饋하는 법규를 혁파하여 통상장정을 새로 정할 때에 따로 1款으로 의정할 것을 奏明한다.

1. 이미 駐使가 행해지고 있은즉 賀謝·陳奏 등의 사절은 따로 파견할 필요가 없다. 칙명을 내려 또한 따르도록 함이 옳다.

1. 使臣은 自備資粮하는데 종전에는 上國이 頒賜하거나 연로에서 留館할 때에 廩給했지만 또한 영원히 혁파함이 가하다.

 (≪從政年表≫, 고종 19년 4월 1일;≪淸季中日韓關係史料≫2, #417-(5), 光緖 8년 4월 22일, 597쪽;≪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北京古宮博物院 編, 1963), 권3, #(103), 光緖 18년 4월 29일, 16∼17쪽).

위 咨文에서 조선정부가 요구한 ① 開海禁과 통상장정체결, ② 北道開市革罷 및 그에 따른 供饋의 폐지, ③ 派使駐京, ④ 年貢·賀謝·陳奏 등 事大使行의 폐지 등은 결국 청과의 통상과 사대사행의 폐지로 집약할 수 있다. 어윤중은 1882년 4월 3일 가진 주복과의 회담에서 위와 같은 문제를 자청한 이유를 설명했다.

宇內가 무사하다면 조선이 비록 불편함이 있다고 하나 어찌 감히 가벼이 경장을 의논하겠는가. 조선의 일로 대강을 개진하자면 조선은 지금 러시아와 일본에 끼여 있는 가까운 땅이며, 외국이 또한 번갈아 通好하러 오니 내수자강을 기약해야 만국과 대립할 수 있고, 上國에 근심을 끼치지 않게 된다. 조선 8도는 중국의 일개 작은 성에 불과하다. 1년 세입이 겨우 은 30만 냥이며 함경도 세입의 반이 烏刺·會寧 互市에 충당되고, 평안·황해도의 세입은 使行의 왕래에 충당되어 度支에서 받을 수 없으니 어찌 上國의 번병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更張의 일로 자청하는 것은 아니니, 오직 上國의 裁定만 기다릴 뿐이다. 금일의 계책으로 단지 舊典만을 지킴은 자강하여 上國의 拱衛함만 못하다(≪淸季中日韓關係史料≫2, #417-(1), 光緖8년 4월 22일, 591b∼592a쪽).

즉 조선의 내수자강은 청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는 방법이 되고, 또 조선의 경제적 궁핍은 청의 번병으로서 역할하는 데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청에 통상요청과 사대사행폐기를 제기한다고 했다. 이는 청과의 관계를 이용해 조선의 당면문제를 타개하고자 하는 조선정부의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아직 이 단계에서는 이를 독자적 힘으로 추진해 갈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강하지 못했으므로 청의 ‘裁定’만을 기대하는 수준에서 머물러야 했다.

조선정부의 위와 같은 요구는 북도개시 때의 供饋폐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거부되고 말았다. 청에서는 조선정부의 통상제의에 대해 자국을 경시하는 대담한 요구로 보고 있었고, 事大之典과 관계가 있는 파사주경의 제의는 조선과 청과의 조공관계를 위반하는 징조로 보는 견해가 팽배했다.696)≪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3, #(104)·(105), 光緖 8년 4월 29일, 17∼18쪽. 이미 1882년 4월 3일 어윤중이 청의 진해관도 주복과 필담할 때에 주복은 파사주경의 문제에 대해 통상문제와 무관하지 않으므로 서서히 상의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구례를 갑자기 고친다면 청에서 시비가 일어날 것이므로 사대지전에 관계되는 일인 만큼 조선이 ‘輕議更張’할 것이 못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697)≪淸季中日韓關係史料≫2, #417-(1), 光緖 8년 4월 22일, 591a쪽. 그러나 어윤중은 4월 18일 주복과의 연이은 필담에서 이 문제는 조선정부의 경장의지에서 나온 것이지 전통적 사대관계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698)≪淸季中日韓關係史料≫2, #417-(6), 光緖 8년 4월 22일, 601b쪽.

그러나 아무리 조선 내부의 경장정치를 위한 것일지라도 일단 청과의 전통적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 한 조선정부의 통상정책이 만국공법적인 관계에서 추진될 수는 없었다. 조선정부가 청을 조선과 대등한 국가로 간주하고 제시한 대청통상요청은 오히려 전통적인 ‘속방’관계에 가탁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하고자 하는 청의 의도로 거절되었다. 그 결과 조·청통상문제는 임오군변 이후 8월 23일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명문화한 전문 8조의<朝鮮中國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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