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강화도조약체결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의 세력침투가 켜져 독점적 지위가 구축되어 가는 반면 청국은 전통적인 종주국으로서의 권위가 실추되어 갔다. 임오군란은 청국으로서는 실추된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군란이 일어나자 청국은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세력을 침투시켰다. 청국의 계획된 무력개입정책과 그들이 대원군을 유인하여 강제 납치한 사건으로 임오군란이 일단 수습되었다. 이에 따라 고종은 그 해 9월 趙寧夏·金弘集·魚允中 등 陳奏使 일행을 청국에, 濟物浦條約에 따라 다음달에 박영효·김옥균·서광범·민영익 등 개화당으로 구성된 修信使 일행을 일본에 각각 파견하였다. 이들 양파는 혼미한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이를 수습하려는 태도와 방법만은 처음부터 달랐기 때문에 양파간의 대립과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732) 개화당의 위기의식에 대해서는 李光麟, 앞의 책(1973), 140∼146쪽 참조.

조영하 등 진주사 일행은 대원군의 납치와 관련하여 청나라 조정에 그의 석방을 청원하는 본래의 임무를 관철하기보다 오히려 馬建忠이 제의한 차관도입문제와 선후6조를 협의하는 등, 양국간의 기존 관계를 바탕으로 더욱 친청책을 강화하는 정책적 배려를 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청국의 대조선간섭정책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자초한데 반하여, 박영효·김옥균·서광범 등 개화파는 도일할 때 처음으로 국기를 사용하여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과시하고 청군의 조선주둔이 국체와 독립국가의 면모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증가된 청의 세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일본의 헙력이나 구미세력을 이용하여 자주권을 회복하여 중단된 개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대파 조영하 등은 9월 중순부터 그들 나름대로 천진에서 이홍장과의 몇 차례 회담에 의한 교섭 끝에 외국인 묄렌도르프을 고문으로 채용하는 문제와 조선의 금광·세관 및 홍삼수입을 담보로 연리 8리에 12년 기한내 상환을 조건으로 하는 50만 량 문은차관이란 재정적 지원을 획득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진주사 일행인 조영하·김홍집·어윤중과 周馥·마건충 등 청국대표 사이에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며, 조선내에서 청국이 종주국으로서의 특권을 명문화한<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함으로써 조선내에서 열국을 제치고 청국이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정치·군사·경제 등 조선 내정에 대한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이 있게 되었다. 즉 군사는 吳長慶 휘하의 袁世凱 등이, 외교·재정상의 사항은 馬建常·묄렌도르프를 통하여 조선의 전권을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집권파 관료들의 외교적 교섭행위는 분명히 청국이 조선의 정치적·경제적 자주권을 침해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속방정책을 제도화할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개화당의 도전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을 주권국가로 인정한 일본·미국 양국의 반발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1880년 전반기에는 閔台鎬를 위시한 민씨들, 그리고 이들에 밀착되어 있던 尹泰駿·韓圭稷·李祖淵 등이 정계를 좌우하고 있었다. 이들은 청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데 급급하였고, 그리하여 임오군란 뒤 청군을 끌어들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룩해보려는 개화당의 이상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개화당 요인들은 불만을 토로하고 집권파의 생각과 행동을 비판하였다. 차츰 상호간에 불신과 대립이 날카로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불신과 대립은 1881년경부터 나타났지만 1883·84년에는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883년 4월 한성판윤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좌천된 것, 그리고 6개월 만에 광주유수직에서도 물러나야만 되었던 일, 또 화폐주조문제를 둘러싼 의견충돌 등의 예는 당시의 실정을 말해준다

개화당 인사들은 집권파 요인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윤치호일기≫에서 찾아보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이날 밤 入侍하여 들으니 李左佞·尹右狐·左贊姦 및 金輔國이 淸人 張□□와 회동하여 30만원을 借金한다고 한다(≪尹致昊日記≫1, 1883년 11월 2일).

李祖淵을 아첨꾼, 尹泰駿을 여우, 좌찬성 민태호는 간신이라 부르면서 이들이 고종의 주위에 있기 때문에 국가는 위기에 빠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통탄을 하였다. 민영목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국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음흉하고 간사한 늙은 간신이라고 비난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민씨의 마음에는 음흉하고 간사하고 편벽된 것으로 가득 차서 일찍이 나라의 이해에는 관심이 없음을 가히 알겠다(≪尹致昊日記≫1, 1884년 1월 1일).

老奸하는 바는 남이 예측하기 어렵다. 도시 利計가 배에 가득차서 국사에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尹致昊日記≫1, 1884년 5월 12일).

집권파와 개화파간의 불신과 대립은 특히 민영익이 報聘使의 정사로 미국과 유럽을 遊歷하고 귀국한 뒤로 더욱 격화되었다. 민비의 조카로 1877년 과거에 급제한 뒤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왕과 왕비가 그의 말이라면 듣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따라 그의 집에는 항상 벼슬하려는 손님들로 들끓었다733) 黃 玹,≪梅泉野錄≫상(國史編纂委員會, 1955), 43쪽.고 할 만큼 당대의 세도가였던 그를 김옥균 등은 개화당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개화에 열심이었으므로 개화당으로서는 이러한 인물을 포섭하였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러나 민영익은 미국을 다녀온 뒤 개화당에서 이탈하고 집권파에 가담하여 개화당과 상반되는 정치적 견해를 갖고 대립하게 되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1884년 5월 말이었다. 이러한 사정에 대하여 미국공사관 무관 포크는 갑신정변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놓았다.

1884년 9월경에 민영익은 완전히 개화당과 손을 끊었다. 그의 동료는 청국인과 강력한 친청당의 멤버들뿐이었다. 그는 낮 동안에는 서구인들을 접견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때때로 그들을 면전에서 경멸하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하였다(George C. Foulk, 앞의 글, 996쪽).

즉 민영익이 개화당과 손을 끊고 완전히 집권파로 넘어간 것은 9월경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일본의 문명진보의 수준을 아직 낮다고 보아 그 힘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734)≪東京日日新聞≫, 明治 18년(1885) 1월 21일(≪新聞集成明治編年史≫6, 財政經濟學會, 1926, 29쪽). 민씨 집안의 한 사람으로서 그 집안의 이해와 상반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735) 李光麟,<甲申政變에 대한 一考察>(앞의 책, 1973), 142쪽. 이후로 민영익은 개화당에 있을 때와는 달리 조선의 독립과 개화에 대해 회의를 품고 개화당에 대해 적대되는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1884년 8월 親軍營制의 실시와 더불어 한규직이 전영사, 이조연이 좌영사, 윤태준이 후영사가 되는 동시에 민영익은 우영사로 임명되었다. 곧 이어 그는 協辦軍國事務도 겸임하게 되었다. 민영익은 군대훈련을 위해 청국군 장교를 부르는 조치를 취하는 등 청국의 힘을 빌리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냈다.736)≪尹致昊日記≫1, 1884년 8월 26일.

이미 고종은 1883년 10월 16일 푸트 미국공사를 통해서 군사교관을 미국에 요청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이 건에 대하여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이들이 오게 되면 우선 徐載弼 등 사관생도들을 그들 밑에서 좀더 훈련을 받도록 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요코하마에 있는 미국상사를 통해 4,000정의 미국제 소총도 구입해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영토에 관심이 없는 공평무사한 나라 미국에서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일본에서 귀국한 사관생도들을 교육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군대를 교련시켜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것을 개화당에서는 조선이 청의 간섭과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민영익이 미국군사교관 대신에 청국교관을 고빙한다는 것은 개화당에게 큰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포크무관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본국으로 보냈다.

얼마 있지 않아 민영익은 조선군대 훈련을 위해 청국으로부터 5명의 교관을 부르게 되었다 이 조치는 개화당 요인들을 크게 자극하였고 한편 14명의 사관생도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니, 그 까닭은 청국군 교관을 고빙하게 됨으로써 자리를 유지할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규직)장군의 군영에 채용된 3명을 제외하고 사관생도들은 군에서 떨려나 개화당 인사들에 의하여 반자선책으로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는 우정국에 옮겨져 일을 하게 되었다(George C. Foulk, 앞의 글).

즉 민영익이 청국교관을 초빙함으로써 김옥균의 알선으로 일본의 戶山學校에서 수학하고 1884년 4월 귀국한 서재필 등 14명의 사관생도들 대부분이 내쫓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884년 8월 尹雄烈이 상주한 사관학교 설립계획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이처럼 집권파와 이들과 결탁한 서울주둔 청국군의 지휘관 袁世凱 등 청의 손아귀에 군사권을 완전히 넘겨주었으므로 개화당으로서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민영익에 이어서 또 1884년 10월에는 윤치호가 “우리 개화당 幹事重位의 한 사람이다”737)≪尹致昊日記≫1, 1884년 9월 17일.라고 할 정도로 개화당의 주요인사였던 내시 柳在賢이 개화당에서 이탈하여 집권파에 가담하였다. 이것 또한 개화당으로서는 큰 타격이었다.738) 李光麟, 앞의 책(1973), 144∼145쪽. 그는 내시였기 때문에 국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개화당에 유리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또 국왕을 둘러싸고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어 개화당을 위하여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이처럼 국왕의 측근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던 인물이 반대파에 가담하였다는 것은 개화당으로서는 크나큰 손실이었다. 또 유재현은 개화당의 계획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터이므로 개화당의 불안은 가증되었다. 그러므로 개화당은 행동대로 하여금 정변을 일으키자마자 유재현을 景祐宮에서 무참히 살해해 버릴 만큼 유재현의 배반은 개화당에게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국내의 정치상황은 갈수록 개화당에게 불리해져 갔다. 개화당들이 모여서 한탄하기를 “지금의 국사를 돌아보니 벼랑 끝에 걸려있다. 奸臣이 권력을 농간하고 財用을 탕진하면서 개화를 한다고 하지만 개화의 실효가 없다…실로 개화당은 몇 사람 안 된다. 모두가 頑固黨이니 개화의 실효가 언제나 있을지 알지 못하겠다”739)≪推案及鞫案≫324책, 大逆不道罪人喜貞等鞫案(亞細亞文化社版 30책, 1978, 585쪽).고 할 정도로 집권파들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정권을 주도하는 반면에 개화당의 세력은 약해지고 이들에 의한 개화정책의 추진은 갈수록 힘들어져 갔던 것이다. 개화당은 이미 언제 집권파에 의해서 제거당할지 모른다740)≪尹致昊日記≫1, 1884년 6월 18일.는 위기감과 아울러 조선의 장래도 더없이 암담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개화당이 자신들의 처지뿐만 아니라 나라의 장래도 이처럼 암담하게 느껴졌던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돌파구를 찾는 방법에 대하여 홍영식은 미국공사 푸트에게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말하였다는 것이다.

등잔불이 있어서 불이 심히 밝은데 밖에 있는 물건이 가리고 있어서 안에 있는 빛이 밖으로 비출 수 없어 밖의 물건은 밝은 빛을 받지 못해서 사람이 그 가린 것을 제거하고 그 빛을 방출하려고 시도하나, 그 가리고 있는 물건이 너무 뜨거워 순순히 제거할 수 없어서 부득이 그 가린 것을 깨뜨려 제거한 즉 사방으로 그 밝음이 전해지는 것을 곁에서 본다면 이것이 유쾌한 일이겠는가. 도리어 망령된 일이 되겠는가(≪尹致昊日記≫1, 1884년 11월 19일).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개화당은 비상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고종 주위의 집권파를 제거하지 않는 한 이 위기를 돌파해 나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尹炳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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