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3. 갑신정변의 전개
  •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초기 개화파 중에서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파 개화당의 목표는 당시 세계대세에 뒤떨어져서 열강의 위협을 받고 있는 조선왕국을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로 건설하는 것이었다.789) 다음과 같은 글들이 관련하여 참고가 된다.
閔泰瑗,≪甲申政變과 金玉均≫(國際文化協會, 1947).
姜在彦,<開化思想·開化派·甲申政變>(≪朝鮮近代史硏究≫, 1970).
Harold F. Cook. The Korea’s 1884 Incident, 1972.
李光麟,<金玉均의 ‘甲申日錄’에 대하여>(≪震檀學報≫33, 1972).
―――,<숨은 開化思想家 劉大致>(≪開化黨硏究≫, 一潮閣, 1973).
―――,<甲申政變에 대한 一考察>(위의 책, 1973).
金榮作,<初期開化派의 民族主義思想과 甲申政變의 現代的 意義>(≪思想과 政策≫1-4, 1984).
愼鏞廈,<甲申政變에 社會經濟的 背景과 開化思想>(≪思想과 政策≫1-4, 1984).
―――,<甲申政變의 改革思想>(≪韓國學報≫36, 1984).
―――,<金玉均의 開化思想>(≪東方學志≫46·47·48, 1985).
―――,<19세기 한국의 近代國家 형성문제와 立憲共和國 수립운동>(≪韓國社會史硏究會論文集≫1, 1986).
―――,<甲申政變의 主體勢力과 開化黨의 北靑·廣州養兵>(≪韓國學報≫95, 1999).
韓國政治外交史學會,≪甲申政變硏究≫, 1985.
安秉珆,<1884年 甲申政變の社會經濟的基礎>(≪朝鮮近代經濟史硏究≫, 1975).
裵成東,<朝鮮末期의 政治體制>(≪韓國政治學會報≫10, 1976).
金達中,<1880年代 韓國國內政治와 外交政策>(≪韓國政治學會報≫ 10, 1976).
吳世昌,<開化思想과 開化黨의 形成>(≪韓國史學≫ 1, 1980).
山邊健太郎,<甲申事變について>(≪歷史學硏究≫ 244·247, 1960).
朴宗根,<朝鮮における近代的改革の推移-1884(甲申)年と1894年の改革をめぐって->(≪歷史學硏究≫300, 1965).
糟谷憲一,<甲申政變·開化派硏究の課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22, 1985).
朴明圭,<開化派와 討幕派의 社會經濟的背景과 近代指向性에 관한 비교연구>(≪韓國社會史硏究會論文集≫42, 1994).
康珍子,<甲申政變の問題點-甲申日錄の檢討を通じ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22, 1985).
Shin Yong-Ha, The Coup dˊÉtat of 1884 and Pukchong Army of the Progressive Party, Korea Journal 33-2, 1993.
姜昌一,<初期開化派의 近代化구상-甲申政變에 대한 비판적 검토->(≪韓國文化≫15, 1994).
金雲泰,<韓末開化思想과 그 運動의 展開>(≪朝鮮政治思想硏究≫, 1985).
崔震植,<甲申政變을 전후한 開化派의 外交인식>(≪釜山史學≫32, 1997).
갑신정변 주도세력의 핵심인물의 하나였던 徐載弼은 갑신정변의 지도자 金玉均의 목표는 ‘조선도 힘있는 현대적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金玉均은 현대적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朝鮮도 힘있는 現代的 國家로 만들려고 절실히 바랐었다. 그리하여 신지식을 주입하고 신기술을 채용함으로써 정부나 일반사회의 奮鬪因習을 一變시켜야 할 필요를 확고히 깨달았다(徐載弼,<回顧甲申政變>, 閔泰瑗 著≪甲申政變과 金玉均≫, 1947, 82쪽).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의 하나로 김옥균이 일본에 유학시킨 사관생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김옥균은 사관생도들에게 “일본이 동방의 영국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 나라를 아시아의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매 일요일이면 우리는 반드시 金玉均을 築地 寓居로 심방하였다. 그러는 때마다 그는 우리를 친동생과 같이 대접하고 숨김없고 남김없는 폐·간 속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祖國刷新에 대한 우리의 중차대한 임무를 말하는 동시에 나라에 돌아가 우리가 빛나는 대공훈을 세울 것을 믿어 마지아니하였다. 그리고 그는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日本이 東方의 英國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 나라를 亞細亞의 佛蘭西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고 또 유일한 야심이었다. 우리는 김씨의 말을 신뢰하고 우리의 전도에 무엇이 닥쳐오던지 우리의 책임을 이행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윗점-인용자)(徐載弼,<回顧甲申政變>, 앞의 책, 84∼85쪽).

조국인 조선왕국을 ‘힘있는 현대적 국가’로 쇄신하고, 조선을 ‘아시아의 불란서와 같은 나라’로 만들어서 ‘외국의 침략’790) 金玉均,<池運永事件糾彈上疏文>(≪金玉均全集≫, 亞細亞文化社版, 146쪽). 이하
≪金玉均全集≫은 全集으로 생략 표기하기로 함.
을 막아내려는 김옥균 등 개화당의 목표는 ‘임오군란’ 후 조선에 진주한 청군의 간섭과 방해로 달성이 어렵게 되었다. 임오군란 직후 청국은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서울에 주둔시키고 집권자이며 국왕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을 군함에 초청해 놓고는 그대로 납치하여 청국에 실어다가 保定府에 유폐해 버리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청국은 민비정권을 재수립해 놓은 다음에도 철군하지 아니하고 청군을 서울에 장기 주둔시킨 채 이 무력을 배경으로 허구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을 屬邦化하기 위한 적극 간섭정책을 자행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크게 침해하였다. 조선에 주둔한 청국 장수 吳長慶과 袁世凱는 병권을 장악하고 총판조선각국통상사무(재정고문)로 파견된 陳樹棠은 재정권을 장악했으며, 李鴻章이 파견한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는 해관을 장악했을 뿐아니라 외교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청국은 뿐만 아니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개화운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이라고 보고 온갖 방법으로 개화당을 탄압하고 개화운동을 저해하였다. 그러므로 임오군란 이후의 개화정책은 청군의 탄압과 방해를 받아 가면서 추진된 것이었으며, 개화당으로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당시 임오군란에 의하여 정권이 한 번 붕괴되었다가 청국의 구원으로 재집권하게 된 閔妃守舊派들은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순종하여, 나라의 독립이 크게 침해되고 자주근대화가 저지되는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일가일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였다.

당시 청국이 조선의 독립을 얼마나 침해했는가의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청국은 임오군란 직후 민비정권에 압력을 가하여, 그 동안 조선왕조가 각국과 체결한 불평등조약들 중에서도 가장 불평등하고 청국의 특권을 일방적으로 허여한<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1882년 8월 23일 체결하고, 그 前文에 조선을 청국의 ‘屬邦’이라고 문자로 써넣었다. 진수당은 방자하게도 ‘조선은 중국의 屬國’이라는 문귀를 넣은 방문을 공공연히 남대문에 써붙이기까지 하였다.791)≪尹致昊日記≫, 1883년 (음력) 10월 3일·5일. 그는 강제로 한국인의 집을 사들이고자 하여 이에 항의한 正言 李範晋을 청군의 군영에 잡아다가 어지러이 매를 때리는 만행까지 자행하였다.792)≪尹致昊日記≫, 1884년 5월 28일.

또한 청국조정은 조선조정에 대해 “무릇 外憂에 관한 일은 일체를 청국에 문의하라”793)≪尹致昊日記≫, 1883년 10월 3일.고 지시했다. 청국 장수 오장경은 조선국왕에게 맞대놓고 “내가 3천 군대를 거느리고 여기에 와 있으므로 매사에 皇朝(청국)를 배반해서는 안된다”794) 위와 같음.고 협박하였다. 그는 조선국왕에게 “내년 봄에는 청국의 군대가 증파될 것이라”795)≪尹致昊日記≫, 1883년 12월 4일.고 위협하였다.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행패도 극심하였다. 하나의 예만 들면, 청군이 광통교 부근의 한 약국에서 무료로 약품을 빼앗으려 하다가 약값을 요구하는 주인 최씨의 아들을 사살하고 최씨에게도 총을 쏘아 중상을 입혔다.796)≪尹致昊日記≫, 1884년 1월 3일. 개화당 신문인≪漢城旬報≫가 이를 보도하자, 청군은 이를 보도했다는 이유로≪한성순보≫를 발행하는 통리기무아문의 博文局을 습격하기까지 하였다.797)≪漢城旬報≫10호, 1884년 1월 3일,<革兵犯罪>. 그러나 민비 수구파정권은 청군의 이러한 만행에 대해 항의조차 제대로 한 번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개화당은 임오군란 후의 청국의 이러한 속방화정책 및 만행과 개화정책에 대한 탄압에 대해 단호하게 저항하고 조선을 서양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 때 김옥균의 생각은 무엇보다도 淸나라 세력을 꺾어버리는 동시에 그에 추종하는 귀족들의 세력을 빼앗은 후에 우리 나라의 完全自主獨立政治를 수립하자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고 실현의 최고 목적이었다.

더욱이 淸나라에서 大院君을 납치했다는 것은 우리로서 참을 수 없는 수치라 하여 분개함을 참을 수 없어 그 세력구축과 귀족타파의 깃발을 둘러메고 나서려 한 것이다(金道泰 編,≪徐載弼博士自敍傳≫, 首善社, 1949, 86∼87쪽).

또한 사관생도로서 갑신정변에 참가했다가 후에 심문을 받은 申重模는 김옥균의 목표에 대해 당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따라서 김옥균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서양 각국은 모두 독립국가이다. 어떠한 국가든지 독립한 연후에야 비로소 타국과 화친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은 오직 청국의 속국이 되어 있는 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朝鮮도 언젠가는 독립국가가 되어서 西洋諸國과 同列에 서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推案及鞫案≫324책, 大逆不道罪人喜貞等鞫案 중 申重模의 供述, 亞細亞文化社 영인판 30책, 588쪽).

서재필도 당시 김옥균의 사상과 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동일한 내용을 증언하여 기록하였다.

김옥균은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하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수치를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중에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될까 주주야야로 노심초사했던 것이다(<回顧甲申政變>, 앞의 책, 82쪽).

갑신정변 주도세력의 영수인 김옥균은 정변 직전에 일본인 정치가에 보낸 편지에서도, 조선이 振作의 희망이 없는 것은 청국이 조선을 속국으로 멍에를 씌우는데 원인이 있으므로 조선이 “첫째로 해야 할 일은 멍에를 철폐하고 특히 獨全自主之國을 수립하는 일이다”798) 金玉均,<朝鮮改革意見書>(≪金玉均全集≫, 亞細亞文化社版, 110∼111쪽).라고 명료하게 밝히었다. 갑신정변 주도세력의 목표는 임오군란 이후의 청국의 조선 ‘속방화정책’의 멍에를 철폐하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여 세계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동열에 서도록 나라를 발전시키려 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가진 개화당에 대하여 청국측과 민비 수구파는 결탁하여 탄압하고 개화당 요인들을 기회 있을 때마다 정계에서 제거시켜 나갔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직전에 박영효의 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은 수년래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각고진력해 왔으나, 그 공효가 없었을 뿐 아니라 금일 이미 死地에 들어가게 되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人을 制하여 策을 취하지 않으면 안될 정세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들의 결심에는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伊藤博文 編,≪秘書類纂 朝鮮交涉資料≫상, 朴泳孝邸ニ於テ洪英植·金玉均·徐光範ト島村久談話筆記要略, 271쪽).

개화당은 결국 임오군란 후 청국의 ‘조선속방화’정책을 정변의 방법으로 집권하여 물리치고, 위로부터의 급속한 자주 근대화정책을 실시해서 조선을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로 건설하여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완전 자주독립국가로 발전시킬 것을 목표로 정변을 추진하게 된 것이었다.799) 愼鏞廈, 앞의 글(앞의 책, 1985;≪韓國近代社會思想史硏究≫, 一志社, 198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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