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3. 갑신정변의 전개
  • 2) 갑신정변의 준비
  •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김옥균 등 개화당은 1884년 10월 11일에서 10월 14일에 걸쳐 정변의 거사에 대한 행동계획을 최종적으로 수립하여 점검했는데, 이를<갑신일록>에서 추려 처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洪英植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건물 낙성식 날을 擧事日로 한다. 홍영식은 수구파 4營使(韓圭稷·尹泰駿·李祖淵·閔泳翊)의 유고 유무를 탐지하여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회 일자를 정하되 3일 이내로 한다(후에 10월 17일 오후 시로 정했음).

②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 도중 別宮에 불을 질러서 거사의 신호로 한다. 別宮에 불이 나면 4營使는 직책상 불을 끄러 화재현장으로 가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때 4영사 등 수구파 요인을 처단한다. 수구파 1인에게 하수인 2인씩을 배정하되, 하수인은 각각 단검 1자루와 단총 1자루씩을 휴대한다.

③ 別宮에 불지르는 일은 李寅鍾이 총책임을 맡고, 李圭完·林殷明·尹景純·崔殷童 등이 함께 석유를 뿌려 수행한다.

④ 수구파 4영사의 처단에 대해서는 閔泳翊을 尹景純·李殷種이, 尹泰駿을 朴三龍·黃龍澤이, 李祖淵을 崔殷童·申重模가 담당한다. 만일 이들이 실수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별도로 일본인 3명에게 조선옷을 입혀 예비로서 수구파 1명에게 1명씩 배정한다.

⑤ 별궁 발화 후 수구파의 도래를 기다려 개화파 장사들을 지휘 호령하는 임무는 연장자인 李寅鍾과 李喜禎이 맡는다. 이들의 통신연락과 왕래정찰은 柳赫魯와 高永錫이 담당한다.

⑥ 대신들과 別入侍가 출입하는 金虎門 밖에는 申福模가 지휘하는 개화당동지 장사(忠義契) 43명을 매복시켰다가 閔台鎬·閔泳穆·趙寧夏 등이 화재에 대한 문안차 입궐하면 즉시 처치한다.

⑦ 대궐 안의 내응으로는 친군영 전영소대장 尹景完이 칭병하여 당번을 천연시키다가 거사 당일 밤에 숙직을 자청한 후, 대궐 밖의 거사에 호응하여 친군영 전영 병사 50명을 거느리고 있다가 비상선을 넘어 대궐 안으로 들어오는 자가 있으면 처치한다.

⑧ 顧大嫂(42세의 중년부인으로 신체의 건대함이 남자 이상이요, 완력이 남자 5·6명을 당할 수 있는 궁녀로서 10년 전부터 개화당에 궁궐내 정보를 알려주던 궁녀)라는 별명을 가진 궁녀로 하여금 준비해 준 폭발약을 대궐 밖의 火光을 신호로 하여 通明殿에서 폭발시켜 폭음과 섬광을 내게 한다.856) 李光麟, 앞의 책(1973) 30쪽에 의하면, 顧大嫂는 정변 후에 희생되었다는 궁녀 李禹石이라고 추정되고 있다(≪金玉均傳≫상, 古筠記念會, 421쪽 참조).

⑨ 金奉均과 李錫伊이로 하여금 준비해 준 화약을 갖고 仁政殿 행랑에서 숨어 대기하고 있다가 개화당 요인들이 입궐할 때 폭발시켜 폭음으로 성세를 돕게 한다.

⑩ 別宮에 불이 난 뒤 일본공사관으로부터 일본군 30명을 빌려 景祐宮과 金虎門 사이를 왕래하며 의외의 사고를 방지케 한다.

⑪ 일이 일어나서 혼잡하게 되면 자기편끼리 또는 일본인과 서로 충돌할 염려가 있으므로, 암호로 ‘天’자와 일본어 ‘요로시’를 모든 장사들에게 알린다.

⑫ 정변 성공 즉시 국왕은 景祐宮으로 옮겨 모시고 삼중으로 호위하되, 內衛는 개화당 장사(충의계)와 사관생도가, 中衛는 일본군이, 外衛는 조선군(친군영 전영과 후영군인)이 담당한다.

 (<甲申日錄>, 1884년 12월 1일, 全集, 67∼74쪽 기타 참조)

김옥균 등은 이상과 같은 순서로 정변을 실행에 옮기는 최종 점검을 한 후 일찍이 거사일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로 정하고서도 다케조에와 일본측에게는 이를 알려주지 않고 있다가 우편선 千歲丸이 인천을 출항한 뒤인 16일에야 일본측에 알려주었다. 김옥균은 다케조에가 경솔하며 변덕스러운 성품을 가졌고, 일본정부의 정책은 수시 변하므로, 일본측이 갑자기 정책을 바꾸어 정변을 누설 실패케 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김옥균은 劉大致를 방문하여 거사를 독촉 받았을 때에도 일본은 ‘확실히 신뢰할 수는 없다’고 응답했었다. 김옥균은 천세환이 일본에 갔다가 다케조에의 보고에 대한 일본정부의 훈령도 싣고 인천항에 입항할 예정일이 10월 20일이므로, 그 이전인 17일에 정변을 일으켜서 20일에는 이미 정변을 완결지으려고 하였다.857)<甲申日錄>, 1884년 12월 1일(全集,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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