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3. 갑신정변의 전개
  • 3) 개화정권의 수립
  •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마침내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의 거사일이 왔다. 축하연 시작 시간인 오후 7시가 가까워 오자 초청받은 축하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외국인 축하객으로는 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 미국공사관 서기관 스커더(Charles L. Scudder), 영국총영사 애스턴(William George Aston), 청국총판조선상무(청국영사) 陳樹棠, 봉판상무(서기관) 譚賡堯, 일본공사관 서기관 島村久, 통역관 川上立一郎, 해관 세무사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등이 참석하였다. 일본공사 竹添進一郎과 독일총영사 젬부쉬(Zembsch)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한다고 알려왔다.

내국인 참석자로는 초청자인 홍영식을 비롯하여, 錦陵尉 박영효, 독판 김홍집, 친군영 전영사 한규직, 우영사 민영익, 좌영사 이조연, 김옥균, 승지 서광범·민병석, 주사 윤치호, 司事 申樂均 등이 참석하였다. 후영사 윤태준은 이 날 밤 궁중 숙직이었기 때문에 빠져서 참석자가 모두 18명이었다.858)<甲申日錄>, 1884년 12월 4일(全集, 77∼78쪽).

김옥균은 이 날 오후 4시에 우정국으로 가서 홍영식과 함께 연회준비를 점검하였다. 김옥균이 집에 돌아오니 국왕을 항상 가까이 모시고 있는 邊樹가 와서 국왕께서는 날이 밝은 뒤부터 공사를 재결하기 위해 계속 침실로 가지 않았고 承候官은 2시에 入對했는데 일찍 물러가게 해서 공무를 끝내었다고 국왕의 동태를 보고하였다. 김옥균은 변수에게 계속 국왕과 궁궐의 정황을 관찰하다가 오늘밤 김옥균 자신이 대궐로 들어가는 즉시 상세히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김옥균이 바로 이웃하고 있는 서재필의 집으로 가서 모여 대기하고 있는 개화당 장사들에게 행동지침을 거듭 결정하여 지시하고 나니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다. 김옥균이 급히 우정국으로 달려가니 조금 늦게 도착되어서 이미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옥균은 일본공사관 서기관 시마무라(島村久)의 옆 좌석에 앉아 이따금 이야기를 나누다가, 거사 직전임을 알리기 위해 암호로 ‘그대는 天을 아는가’ 하고 물으니, 시마무라는 일본말로 ‘요로시’ 하고 대답하였다.

이 때 김옥균에게 집에서 누가 찾아왔다고 알려왔다. 김옥균이 연회장 문밖으로 나가보니 개화당의 朴齊絅이 급히 달려와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아무리 애를 써도 별궁 방화는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였다. 김옥균은 다른 곳이라도 연소되기 쉬운 초가를 골라 불을 질러서 신호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옥균이 연회장에 돌아와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신호 불빛은 없고 또 김옥균을 찾는다고 하여 나가 보니 이번에는 유혁로가 달려와서 별궁 방화의 실패로 순라꾼들이 사방에 퍼져 다른 곳 방화도 위험하므로 여러 장사들이 연회장을 습격하고자 한다고 보고하였다. 김옥균은 그 경우에 혼잡 속에서 외국공사를 다치게 할까 염려되니 순라꾼이 없는 곳을 아무데나 골라 불로 신호하라고 다시 지시하였다.

김옥균이 긴장하여 두 번이나 출입하는 것을 민영익 등은 자못 의심하는 빛이었고, 시마무라도 매우 불안한 기색이었다. 이 때 우정국 북쪽 창문 밖에서 ‘불이야,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리고 떠들썩하므로 창문을 열어보니 우정국 바로 옆 거리에 불빛이 하늘에 뻗쳤다. 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당황하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한규직이 먼저 “우리들은 장수의 소임으로 급히 달려가서 불을 끄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막 나가려는데, 민영익이 칼을 맞아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채 연회장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민영익은 김옥균이 자주 밖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 눈치 빠르게 의심을 품었다가 ‘불이야’ 소리에 재빠르게 먼저 대문을 빠져 나갔는데 대기하고 있던 개화당 장사들의 칼을 맞고 돌아온 것이었다. 개화당 장사들은 서툴러 민영익을 완전히 처치하지 못하고 중상을 입힌 데 그쳤다.859) Fred H. Harrington, God, Mammon and the Japanese, pp. 23∼25 참조. 연회장은 완전히 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은 북쪽 창문으로 뛰어넘어 곧 암호로 ‘天’·‘天’을 부르며 달리는 도중에 이인종과 서재필을 만나게 되자, 그들로 하여금 개화당 장사들을 인솔하여 경우궁 문밖에 가서 기다리도록 지시하고, 먼저 곧바로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갔다. 별궁 방화가 실패한 것을 보고 일본측이 변심하지 않았나 보기 위해서였다. 일본공사관에서는 시마무라가 먼저 돌아와 있다가 나오면서 “그대들은 왜 대궐로 가지 않고 이 곳으로 왔는가” 하고 물었다. 김옥균은 일본측이 변심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대궐로 가는 도중 운니동 어귀에 김봉균·이석이 등 개화당 장사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또 신복모가 장사 40여 명을 여러 곳에 매복시켜 놓은 것을 보았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은 금호문으로 김봉균·이석이를 데리고 들어가 그들에게 인정전 아래 화약을 묻은 데로 보내서 30분 후에 폭발시키도록 하였다.

김옥균 등이 앞을 막는 武監을 호령하여 물리치고 편전 앞 합문 밖으로 나아가니 윤경완이 전영 병정 50명을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편전 안으로 들어가니 국왕은 이미 침실에 들었으므로 가로막는 환관 柳在賢을 시켜 국왕께서 급히 일어나시도록 청하게 되었다. 국왕이 침실로 김옥균·박영효·서광범을 부르면서 무슨 사변이 일어났는가를 물었다. 김옥균 등이 우정국의 사변을 아뢰고 잠시 다른 궁궐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민비가 김옥균에게 “사변이 청국측에서 나왔는가, 일본측에서 나왔는가”를 묻고, 김옥균이 미쳐 대답하기도 전에 홀연히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울리었다. 혼비백산한 국왕과 민비를 모시고 경우궁을 향해 달리는 도중에 김옥균 등은 국왕에게 “지금 이 때를 당하여 일본군사를 요청해서 폐하를 호위하도록 하면 만전을 기할 수 있겠습니다” 하고 진언하였다. 다급한 국왕은 그렇게 하라고 윤허하였다. 김옥균이 잇따라 “親筆勅書가 없으면 (일본군사가) 하명하신 대로 오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국왕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묻자, 김옥균은 연필을 올리고 박영효는 백지를 내놓았다. 국왕은 창황중에 曜金門 안 노상에서 친필로 “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호위하라”고 써 주었다. 김옥균은 이 친필칙서를 박영효를 시켜 다케조에에게 전하게 하였다.860)≪甲申日錄≫, 1884년 12월 4일(全集, 82∼85쪽).

국왕과 왕비를 모시고 김옥균 일행이 경우궁 正殿 뜰에 이르렀을 때 곧 박영효와 다케조에가 일본군을 인솔하여 왔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은 국왕과 왕비를 정전에 편히 좌정케 한 후에 좌우에 시위하고, 서재필의 지휘하에 사관생도 13명과 개화당 장사들로 內衛를 시켰으며, 친군영 전영 소대장 윤경완에게 5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정전 뜰을 지키게 하고, 일본군 150명으로 하여금 대문 안팎을 경호하도록 했으며, 外衛로 친군영 전영·후영 병사를 불러 경우궁을 지키도록 하였다. 국왕을 중심점으로 3중·4중의 철통같은 호위체제가 편성되었다. 정변은 일단 성공의 안정권에 들어선 것이었다.861)≪日本外交文書≫17권, 문서번호 125, 附記 明治 17年 甲申 朝鮮京城事變始末書, 352∼362쪽 참조.

김옥균은 이에 믿을 만한 무감 10여 명을 시켜서 경우궁 대문 밖에 나가서 재상과 대신들 중에 변을 듣고 오는 자가 있으면 곧 이름을 먼저 들여보내서 허가를 받은 다음 홍영식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이조연이 우정국 축하연에서 도피했다가 국왕이 경우궁에 옮기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으므로 들어오게 했더니, 이미 와 있는 한규직·윤태준 및 환관 유재현과 자주 쑥덕거렸다. 박영효가 이를 보고 3영의 영사들이 국왕 호위의 임무는 하지 않고 궁궐 안에서 왜 머뭇거리는가 하고 힐문하니, 먼저 윤태준이 나가겠다고 하였다.

윤태준이 손중문을 나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이규완·윤경순이 처단해 버렸다. 한규직과 이조연은 경우궁 후문을 나섰다가 기다리고 있던 황용택·윤경순·이규완·고영석에 의해 처단되었다. 이에 친군영의 전·후·좌의 3영사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우영사 민영익은 중상을 당하여 모두 처단된 것이었다.

민영목·조영하·민태호가 각각 차례로 경우궁 정전 밖에 찾아와 명찰을 들이므로 들어오게 하여 이규완·고영석 등이 처단하였다. 수구파 영수들도 역시 처단된 것이었다.

김옥균은 사람을 시켜 輔國 李載元(국왕의 4촌형)을 입시케 하여 정변과 대개혁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더니 기꺼이 따르겠다고 하였다.

김옥균은 변수를 각국 공사관에 보내어 정변을 알리고 우정국 축하연 참석자들을 위문케 하였다. 이에 미국공사는 해군사관 버너드와 윤치호를 경우궁으로 보냈으므로 정변의 대강을 설명해 보냈더니, 미국공사로부터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오직 내정을 잘 개혁하시오”라는 회보가 왔다.

김옥균 등이 우선 급히 시행해야 할 政令을 국왕께 품하려 하는데, 민비는 대궐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환관과 궁녀 수백명이 한 방에 뒤섞여서 정변에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떠들어대었다. 김옥균은 서재필을 시켜 장사들로 하여금 환관 유재현을 경우궁 정전 위에 묶어 오게 한 다음, 궁 안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유재현의 죄목(북청군대 환송 책동과 모함 등…)을 낱낱이 드러내고 칼로 목을 베어 참살하였다. 이를 바로 눈에서 보게 된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은 아연실색하여 이 때부터 개화당의 영을 한결같이 따랐다. 환관 유재현은 개화당에 속했었는데 후에 변절해서 개화당의 북청군대의 정변 투입을 방해하고, 수구파에 가담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862)≪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1일(양력 10월 29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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