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실패의 결과 친청 수구파가 재집권하게 되었다. 국왕은 19일 저녁 청군에 인계된 후 그 날 밤은 청장 吳兆有의 군영에서 보내고, 이튿날인 10월 20일에는 袁世凱의 군영으로 옮겼다. 국왕은 이 곳에서 3일간 체류하면서 친청 수구파의 신정부를 편성하였다. 국왕이 원세개의 군영에서 환궁한 10월 23일까지 편성한 정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領議政:沈舜澤
左議政:金弘集(兼外務督辦)
右議政:金炳始
吏曹判書:李載元
禮曹判書:金晩植
戶曹判書:金永壽
兵曹判書兼江華留守:金允植
刑曹判書:洪澈周
工曹判書:金有淵
前營使兼惠商公局堂上:李敎獻
後營使兼右捕盜大將:李鳳九
左營使:李奎奭
右營使:閔泳翊
左捕盜大將:申奭熙
宣惠廳提調:魚允中
漢城判尹:閔種黙
開城留守:趙準永
戶曹參判:南廷哲
海防摠管:李奎遠
外務督辦:趙秉鎬
外務協辦:金允植·묄렌도르프(穆麟德)
外務參議:徐相雨
(≪高宗實錄≫, 고종 21년 10월 20일∼10월 23일)
위의 정부개편을 보면 정부수반과 군사권 및 재정권은 처음부터 친청 수구파가 장악하고 수도와 그 방위 역시 친청 수구파가 장악하도록 하는 한편, 종친으로서 개화당이 포섭하려 했던 李載元(국왕의 사촌형)과 친청적 성향의 온건 개화파들을 그 밖의 직책에 임용하였다.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를 외무협판에 임명하여 중용한 것은 이례적 특색이었다.
친청 수구파정부에 일시 임용되었던 온건개화파들은 얼마 후에 대부분 해임되었을 뿐 아니라 개화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각종 구실이 붙여져서 유배당하였다. 청군측의 강력한 영향하에 친청적 수구파정부가 수립되어 국정을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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