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2. 조선의 대외관계
  • 1) 조·일관계

1) 조·일관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친일 협력 세력의 와해로 조선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상실한 일본은 이 조약으로 조선의 안보를 평화적으로 보장하는 군란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고, 청과 동등한 출병권을 획득하여 사실상 청을 견제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사실에서 일본 외교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갑신정변은 청·일의 첨예한 대립을 종식시켰고 이를 계기로 일의 외교정책은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하여 조선에서 청이 러시아세력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天津條約 체결에 앞서 1885년 4월 15일 영국함대의 거문도점령사건이 일어나자 주일 영국공사 프란키트(F. R. Plunkett)는 일본 정부에 “영국 정부는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의 방지를 위해 영국함대에 의한 거문도 일시점거가 단행되었다”는 것을 통고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 군사점령사건에 대해 그들의 입장을 유보한다는 방침을 알리고,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주영 일본공사 하라이(河賴)를 통해 영국의 조선에 대한 군사행동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전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거문도 일시 점령은 다른 열강의 先占을 방지하려는 예방책에 근본 목적이 있음을 일본에 해명하면서 이 문제를 청과 교섭하려는 입장을 전하였다. 이에 河賴는 거문도가 조선에 속한다고 하여 조선과 직접 협상하도록 희망하는 본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여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주장을 일축하고 조선이 주권국가임을 밝혔다.

 6월 13일 일본은 ①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러시아가 그 전철을 밟아 원산·부산 또는 제주도를 점령할 우려가 있고 ② 조·러 조약이 체결된다면 최혜국 조관에 따라 조선이 제3국에 이와 같이 허락할 우려가 있으며 ③ 이홍장도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실상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한다는 입장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변화는 장기적으로 볼 때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러시아에게 조선을 농락할 기회를 주어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 기인하였다. 7월 일본 외무경 井上馨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일시 청과 타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홍장에게「조선 처리 8조」을 제출하였는데 첫째, 조선의 내정·외교 등 정무를 일·청 공동으로 감독관리하며, 둘째, 궁중과 정부를 구별하여 정부의 관여없이 궁중으로부터 밀지 하달을 막아 국사 개입을 못하게 하고 셋째, 조선 정부는 김홍집·어윤중·김윤식을 지도적 지위에 임명하는 내용을 먼저 이홍장과 상의한 후 이홍장과 井上이 공동으로 다시 협의한 후 조선이 처리토록 하는 것이었다. 井上의 조선 공동보호 제안은 사실상 청의 종주권 지위를 묵인하여 청·일이 조선에서 양국간 분쟁을 피하면서 내정·외교를 공동으로 관리하여 일본의 기존 세력을 유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은 井上의 건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조선의 내정·외교에 대한 통제와 간섭을 강화하기 위해 대원군의 석방과 함께 袁世凱를 총독에 해당하는「駐箚朝鮮統理交涉通商事宜」라는 긴 직책에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영국의 거문도 철수문제는 이홍장이 직접 개입하여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청·러 天津협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되어 1887년 2월 영국의 철군이 단행하였다. 이홍장의 聯英制俄정책은 영국이 청의 종주권을 사실상 인정하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청은 조선의 정치·외교·군사 및 경제 영역에까지 적극 관여하여 일본의 대조선 우위무역은 위협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이홍장의 聯俄策을 견제하고 조선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1887년에 이어 전함 20척, 정병 10만 명을 보유할 만큼 육·해군의 증강과 1883년 착수한 군함건조 계획에 따라 해군력을 강화하여 동아시아에서 지도적 해군강국으로 탈바꿈하였다.

 1888년 4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외무대신으로 취임한 시기는 일본이 착수한 헌법 기초 작업이 진행되어 그들은 이듬해 2월 明治제국주의 헌법을 공포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외교문제는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천황은 내각 국무대신의 보필에 의해 외교정책을 결정하며 집행할 권한과 和戰결정권 및 조약체결권을 비롯한 군 지휘와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외교문제에 관한 내각의 결의는 천황의 청원 형식을 밟아야 했고 정부에 대해 구속력이 없어 외무대신은 의원의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을 만큼 천황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 해 12월 24일 大隈가 신내각을 조직한 후 그가 쓴「군사의견서」를 각료들이 읽도록 주문하였다. 이 의견서에는 시베리아 철도 기공 날이 곧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전제하고,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구주 열강의 조선침략 우려를 제거하며 兵備의 完整이야말로 일본의 최대 급선무라 아니할 수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에서 수입한 상품가는 1886년 247만불, 1891년 525만불로 증가되었고 이 중 일본이 수입한 것은 대부분 쌀과 황금이었고, 조선해상 운송은 기선 1501척 가운데 일본 기선은 1355척에 달하였다. 일본과 청의 대조선 무역이 수출에서 일본이 1885년 82%, 청이 18%였으나 1888년 72% 대 28%, 일본은 1892년 55%대 45%로 추격 당했고, 일본이 1887년 수입한 84.9%의 조선 황금은 1892년 청이 오히려 57% 수입하여 일본은 43%에 불과하는 등 역전현상이 일어났다.

 이듬해 가을 일본은 쌀 대흉작에 이어 1890년 여름 보리 대흉작으로 각지에서 쌀 소동이 일어났다. 마침 이즈음 조선에서도 흉작으로 인해 함경도 관찰사 趙秉式이 1884년 3월 조·일간 체결한 무역규칙 제37조 규정을 적용하여 大豆 등 곡물의 일본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발표하고, 황해도 관찰사 吳俊泳마저 일본에 곡물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防穀令을 내려 양국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러자 신임 외무대신 아오키 수조(靑木周藏)는 방곡령으로 인해 발생한 그들 상인의 손실액 14만 7천 6백여 원의 배상과 이의 철폐를 요구하는 등 이 문제에 적극 간섭하고 나섰다. 일본의 배상요구는 1890년 일본 경제가 공황을 맞아 米價 폭등으로 5월에서 7월까지 쌀소동이 발생하여 야기된 국내 식량부족이 각종 공업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섭통상사무협판 민종묵은 “손해배상은 아국의 치욕”이며 “이 금액이 너무 과다하다”는 이유를 들어 회답도 하지 않자 일본은 8월 1일 조선 주재 일본공사 스기야마 테이스케(梶山鼎介)로 교체하여 그들이 제시한 14만여원의 배상금에 대해 조선의 해답을 요구하자 정부는 6만여원 지불을 알렸다. 그러나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는 조선의 배상금 감면요구를 전적으로 거부하고 외무성 통상국장 겸 취조국장 하라 타카시(原敬)를 서울에 보내 梶山에게 일본정부의 강경방침을 전달하였다. 1892년 9월 11일부터 4차 회담에 이르기까지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자 조선은 민종묵을 趙秉稷으로, 일본도 梶山을 재야정객 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巳)로 교체, 방곡령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듬해 2월 25일 大石는 조병직에게 방곡배상액 14만 7천 1백여원과 이자 銀 2만 8천 5백여원 합계 17만 5천 7백여원을 요구하는 강경책을 제시하였다. 일본의 대조선 강경책은 山縣이 1890년 3월 2일 내각에「군사의견서」와「외교정략론」을 제출하여 공공연하게 조선을 일본의 利益線(Interest Line)임을 공포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일본의 대조선침략의지를 천명한 바와 같이 국가독립자위의 길은 첫째, 主權線을 지켜 타인의 침해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 이익선을 방호하여 자기의 유리한 지역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오늘날 열강국 사이에 끼어 일국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원한다면 오직 주권선을 수호해야 하며 이러한 결정이 불충분하면 반드시 이익선을 보호할 수 없다고 주장한 사실에 기인하였다. 그가 말한 이익선의 초점은 곧 조선이었고 이것이 곧 그들의 대륙정책의 시발점이었다.

 난관에 부딪힌 이 배상금 문제는 원세개의 요청에 의해 이홍장과 伊藤이 개입하고, 陸奧가 파견한 육군중장 카와카미 소오로쿠(川上操六)가 이 해 5월 4일 입경, 조선에 최후통첩을 전달하여 19일 정부는 배상총액 11만원 중 6만원은 3개월 이내, 3만원은 5년 분할, 2만원은 6년 분할에 합의함으로써 타결되었다.

 1894년 3월 28일 李鴻章의 아들 前駐日 청공사 李經芳과 일본 재야 거물 오오미와 쵸오베(大三輪長兵衛)의 자금이 연루된 김옥균의 피살사건이 상해에서 발생하였다. 주일대리공사 兪箕煥으로부터 이 사실을 타전받은 조선은 곧 원세개를 통해 洪鍾宇의 보호와 송환을 요청하고, 원세개로부터 협조전문을 받은 이홍장은 30일 상해해관도 聶緝槼에 이를 적절히 처리하도록 타전하여, 곧 범인 홍종우를 縣衙에 이송시켜 환대하였다. 본국 정부의 긴급명령으로 4월 6일 상해에 도착한 駐天津 통상사무 徐相喬는 이홍장을 만나 홍종우의 국내 호송과 김옥균 시신 운구 처리 문제를 부탁하였다. 다음 날 이홍장의 편의제공 지시를 받은 상해해관도 聶緝槼과 서상교는 경찰의 도움으로 김옥균의 심복인 일본인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에게 인도된 시체를 다시 인수하여 범인 홍종우와 함께 청 군함 威靖號로 인천에 호송하는 등 사건을 일방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김옥균의 피살과 시체처리 소식은 일본 조야 인사들을 분노시켰다. 더욱이 조선이 舊習을 이유로 김옥균의 사체에 형벌을 가해 陵遲處斬시키려 하자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공사는 이의 중지를 요청한데 이어, 4월 14일 조선 주재 외교사절단을 통해 다시 조선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김옥균이 朝鮮籍이어서 마땅히 조선이 스스로 처리할 것이며 우리들은 이를 권고할 뿐 결코 내정간섭을 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大鳥의 저지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어쨌든 청이 김옥균 시신 처리과정에서 보인 불공정성이나 조선의 홍종우에 대한 중용 조치는 일본에게 反淸反朝운동의 명분을 제공하였고,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조·일을 비롯한 청·일간 국제적 위신에 관련된 외교적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분쟁의 소지를 남겼다.

 김옥균의 피살과 시체 처리 문제로 조·일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이 해 4월 全奉準의 지도하에 東學徒들이 주도한 전라도 고부군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반정부 농민 세력이 6월 1일 전주를 함락하자 민영준은 領敦寧 金炳始의 반대를 꺾고 국왕의 어명을 받아 袁世凱를 통해 3일 청병의 조선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이미 5월 20일 육군 소좌 이지치 고오스케(伊地知幸介)를 통해 조선농민 반란정보를 입수하고, 22일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 濬)는 외무성에 출병준비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기 때문에 외무대신 陸奧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 29일 “목하 조선정부가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는 풍문의 진위를 보고하도록 지시할 만큼 조선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파병할 만반의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6월 1일 조선 정부의 청병 지원을 탐문한 杉村는 공관 번역관 鄭永邦을 비밀리 원세개에게 보내 “동학폭도가 창궐하여 상무를 크게 손해를 입혀 이런 일은 크게 우려할 일이며 … 귀 정부는 어찌하여 신속히 조선을 대신하여 진압하지 않는가? 우리 정부는 절대 다른 의도가 없다”라고 하여 오히려 청의 무력 진압조치를 재촉하였다. 다음 날 원세개로부터 조선의 파병요청 사실을 확인한 杉村가 이 사실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자 이 날 임시 각의에서는 “만약 중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명분을 쓰더라도 아국도 반드시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군비확장과 조약개정 교섭을 둘러싸고 대외강경운동이 고양되어 내각탄핵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맞은 伊藤수상은 재빨리 衆議院 해산을 결의하고 긴급소집된 임시각의에서 이 사실을 보고한 뒤 외무경 陸奧, 외무차관 하야시 타다스(林童), 참모차장 카와카미 소오로쿠(川上操文) 등 3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본이 壬午·甲申의 조선사변에서 청국에 승기를 제압당해 실패를 자초한 결과와 이 두 차례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청국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해 신속히 서울에 진입하여 청군의 입경을 저지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결정하였다.

 6월 5일 明治天皇이 참모본부내에 대본영 설립을 승인하자 이 날 외상 陸奧는 주조선 공사 大鳥에게 “조선에서 우세를 취득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되 비록 평화를 파괴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진다”고 하여 전쟁 도발 단서를 찾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원세개로부터 上國체면을 위해서라도 파병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이홍장은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에 파병을 통고한다면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7일 주일 공사 汪鳳藻를 통해 直隷提督 葉志超 휘하 청병 1,500명이 속방보호를 위해 출병한다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즉각 주북경 대리공사 고무라 준타로오(小村壽太郞)를 통해 천진조약에 따라 공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을 내세워 출병을 통고하고 1개 혼성여단 병력의 출병을 강행하였다.

 9일 大鳥와 함께 인천에 도착한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 휘하 일본군함 6척은 곧 488명의 육전대를 편성하여 대포 4문을 대동하고 조선의 저지를 물리치고 서울에 진입한데 이어 12일 1,024명의 보병대대와 15일 2,700명이 계속 인천에 도착함으로써 淸軍보다 3배 우세한 병력으로 조선 정국과 정부를 무력으로 장악하여 군사상 淸軍의 기선을 제압하였다. 7일 일본의 출병이 조선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제물포조약 제5조와 천진조약 제3조에 근거한 것이라는 杉村의 출병통고를 받은 조선은 즉시 그에게 파병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다음 날 주일공사 金思轍을 통해 일본의 파병에 항의하였다.

 9일 외무독판 조병직은 주서울 외교사절단의 힘을 빌려 일본의 출병을 중지시키려고 하였다. 동시에 러시아 임시대리공사 케에르 베르그(Pavel de Kehrberg)와 독일 부영사 젬부시(Zembush)도 大鳥에 일본군의 대거침입을 항의하였다. 그러나 휴가중인 고령의 미국 대표 씨일(M. B. Sill)은 참여하지 못해 외교사절단의 동원으로 일본에 압력을 가하려는 조선정부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6월 11일 정부와 농민군 사이에 全州和約이 성립되어 외국이 간섭할 구실이 없어졌음에도 일본은 大鳥가 보고한 군대 상륙 중지 요청을 외면하고, 그들이 염려하는 영·미·러 등 열강의 간섭을 교묘히 피하면서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찾고 있었다.

 15일 일본은 원세개와 大鳥공사가 수 차례 회담에서 토의한 청·일 공동철병안을 파기하고,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기로 결정한 후 다음 날 주일 汪공사에게 각의에서 결정한 일·청 공동 진압과 조선 내정 공동개혁안을 통고하고 이 결과에 따라 공동철수 문제를 결정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외무대신 陸奧가 이 내정 개혁안은 “우리 외교의 위치를 일시에 피동자의 위치에서 주동자로 변화시켰다”고 실토한 것처럼 청의 공동철수안에 대한 逆代案으로 조선 내정 공동개혁안이 제의되었다.

 21일 汪공사는 조선의 내정 개혁은 강화도 조약 제1조에 위반되며, 일본은 조선의 자주를 인정하여 내정을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하여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다음 날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내정개혁 의사를 밝힌 뒤 청에 제1차 절교서를 보내 開戰도 불사하겠다고 하여 내정개혁안을 전쟁 도발 수단으로 삼았다. 26일 大鳥는 고종에게 전략상 조선 독립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내정개혁 필요성만을 거론한 다음, 내정개혁위원 임명과 개혁에 관해 자기와 협의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군 철수가 선결문제이고, 내정개혁은 자주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격렬히 비난하자 28일 大鳥는 내정개혁과 종속의 두 문제에 대한 조선정부의 회답을 29일까지 요구하였다.

 7월 1일 일본은 조선에 재정 조사, 관리 도태, 병제 개혁과 경찰 설립 등 7개항의 내정개혁안을 제출하였다. 3일 大鳥는 申正熙·金宗漢과 내정개혁안을 협의하였으나 신정희는 “정부는 남쪽에 소란이 있은 이래 바야흐로 更張을 꾀하고 있다”고 알리면서 오히려 일본의 先撤兵이 이루어진 후 내정개혁안을 의정할 것임을 통고하였다. 다음날 大鳥는 杉村을 보내 개혁조사위원으로 국왕이 신임하는 중신 몇 사람을 임명할 것을 요구하고 5일 하오까지 회답할 것을 강요하자 정부는 부득이 7일 신정희 등 3명을 내정개혁교섭위원으로, 김홍집 등 5명을 총재로, 박정양 등 15명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교섭토록 하였다.

 조·일간 제1차 내정개혁위원회에서 大鳥는 “친일 정부를 세워 일본에 협력하지 않는 관리에 타격을 주고, 전쟁에 필요한 해안·철도 및 각 도시간 전선 수리 및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여섯 가지의 條款을 제출하고 3일 내에 타결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12일 청이 영국의 조정을 거부한 것을 계기로 일본은 개전을 결정하고, 청에 제2차 절교서를 전달하는 한편, 13일 大鳥에게 청·일간 충돌을 촉진하는 것은 오늘날의 급선무이므로 이를 단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꾀하라고 하여 강압적인 수단으로 개전정책을 실행토록 훈령하였다.

 17일 영·일 통상항해조약이 개정된 다음 날 명치천황은 樞密院 의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하였다. 19일 大鳥가 일방적으로 조선에 서울-부산간 군용전신선 가설과 일본 군대 병영 건축을 강행하자 이 날 저녁 원세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서울을 떠나 버렸다. 이러한 상황하에 大鳥는 다음 날 종속문제를 꺼내어 조선으로부터 청군의 퇴거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폐기를 요구하는 등 강압적인 수단으로 和戰 최후통첩을 보내 22일까지 회답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大鳥에게 “조선은 자주적이며 강화도 조약을 위반한 적도 없으며, 청군의 京內 주둔은 조선의 요청에 의한 것이나 반란이 진정된 후 이미 수 차 철병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貴國처럼 철병하지 않기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는 회답을 보냈으나 일본의 개전 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23일 일본의 경복궁 점령 계획이 완료된 상태에서 大鳥는 대원군에게 사태가 병력동원을 가능케 한다고 통고하고 왕궁을 포위한 후 일병의 호위 하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金嘉鎭·兪吉濬 등으로 구성된 친일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25일 대원군은 부득이 조·청간 제조약의 폐기와 개전을 위한 청군의 철수를 주장하고 27일 일본은 대원군을 견제하는 軍國機務處를 설립토록하여 그들이 지원하는 친일 개화파 인사들로 하여금 실권을 장악케 하여 내정개혁안을 구체화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 정치권의 상황이 급변한 가운데 이홍장이 영국의 전쟁개입이나 지지를 얻고자 용선한 영국 국적의 高升號에 청 병력 1,100명과 선원 67명, 선장과 유럽인 8명, 여객 1명을 싣고 영국기를 게양하고 牙山으로 향하던 중 7월 25일 朝鮮 近海 豊島海上에서 일본함대의 일방적인 발포로 격침되었다. 동시에 이 날 일본 육군의 우세한 병력은 牙山주둔 淸軍에 공격을 개시하여 개전이 선포되기 전 청의 권위와 자존심을 짓밟는 중대한 전쟁 도발을 자행하자 청은 부득이 속방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8월 1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양국간에 조선의 통치권을 에워싼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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