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2. 조선의 대외관계
  • 2) 조·미관계

2) 조·미관계

 박정양 공사의 미국 파견을 전후해 보여준 조·미간 협력관계는 1887년 5월 초 조선이 재촉한 군사 고문으로 일찍이 이집트에서 근무하고, 워싱턴 경찰청장을 지낸 육군장군 출신 다이(William M. Dye), 소령 출신 리(John G. Lee)와 중령 커민스(E. H. Cuminns) 3인이 來朝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이 해 5월 알렌은 다이 장군이 블레인 국무장관에게 거문도를 저탄소로 차용토록 요청해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이는 곧 미국이 조선을 진정으로 지지토록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비록 데니는 외국차관 교섭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국가의 경제 기반을 강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광산과 철도시설의 개발이라고 생각하고 1887년 이후부터 외국차관 교섭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1886년 1월말 미국의 광산기술자 피어스(A. I. Pierce), 스코트(St. John T. Scott) 및 하베이(Eugene Harvey) 등이 월 5,000불을 받기로 하고 미 공관과의 1년 계약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석탄과 금광 개발을 위해 먼저 평안도 운산금광을 조사하였으나 정부는 하베이만 남아 함경도의 금광을 조사해 주길 원하였다.

 이때 데니와 橫濱 주재 프레이저회사(Everret Frazar Co) 대표 페이니(Payne)는 첫째 북서지역 내의 광산권 양도 둘째, 서울과 인천간의 철도건설권 셋째, 조선정부에 225만 달러의 차관공여 계획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袁世凱는 데니가 주선한 미 차관교섭을 반대하여 香港·上海은행(Hong Kong and Shanghai Bank)으로 하여금 조선 정부와의 차관교섭의 뜻을 전하였으나 데니는 프레이저의 소식이 있기 전에는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袁世凱는 자신의 압력으로 공사직을 사임하고 건강이 나쁘다는 핑계로 3-4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다 부산을 거쳐 이해 5월 서울에 돌아온 박정양을 청 황제의 定章과 王命을 위반한 청·조 양국의 죄인으로 몰아 그를 법에 의해 처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데니는 만약 袁世凱의 말을 듣고 박 공사를 처벌할 것 같으면 자주국이 아니며, 각국은 반듯이 사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하자 국왕은 정병하를 袁에게 보내 국가체면을 보전하기 위해 박 공사를 면죄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데니는 이미 국왕의 자주독립노선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조·청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아 袁의 강압적인 탄압정책을 맹렬히 비판한 청한론(China and Corea)를 발간하여 조선이 독립국임을 역설한 바 있기 때문에 국왕에게 청의 차관이나 李鴻章이 보증하는 차관도입은 궁극적으로 청의 조선에 대한 지배를 강화시킬 뿐이므로 어떠한 협정에도 반대하도록 충고하였다.

 마침내 李鴻章과 袁世凱가 종전의 태도를 다소 완화하는 기미를 보이자 8월 21일 국왕은 박정양을 접견하고 다음날 그를 승지 겸 부제학에 임명한데 이어 이듬해(1890)에는 형조판서와 호조판서에 승격시켜 왕권의 자주성을 보였다. 이와 같은 국왕의 박정양에 대한 파격적인 인사조치와는 달리 영·불·독·이·러 5개국 전권사절에 임명된 심상학은 청국의 항의가 두려워 현지에 부임하지 않고 홍콩에서 2년간 체류하다 왕명도 없이 이해 귀국하자 국왕은 袁의 경고에도 굴복하지 않고 인천에 머물고 있던 심상학을 咸悅郡으로 바로 유배토록 명령을 내려 엄벌함으로써 군주의 절대권을 다시 한번 과시하였다.

 이즈음 국가의 재정은 막대한 지출과 차관 이자 등으로 날로 악화되어 정부의 기선은 長崎수리소에서 수리 후 수리비의 미지불로 3개월간 묶였고, 특히 지배계층의 극심한 부정부패로 정부가 고용한 선장과 선원, 전기·전신국 기술자 및 군사고문들에게 2∼8개월간 봉급을 지불하지 못하는 등 李鴻章 산하 招商局과 礦務局 빚 50만냥과 橫濱 정금은행 빚 72만불을 제외하고도 1889년 8월 말까지의 부채가 55만불에 달할 정도로 극도로 곤란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듬해 1월 페이니는 조선 관리들과 협상하기 위해 서울에 올 것이라는 전보를 보낸 데 이어 2월 22일 프레이저대표가 서울에 도착하여 데니를 통해 철도와 광산개발권 양도를 조건으로 한 차관에 관한 상세한 계획서가 준비되었음을 밝혔다. 28일 정부관리 2명이 그를 방문하고 “정부는 지난 8월 프레이저회사를 통해 차관하는데 관심을 가졌으나 그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차관의 이자가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더 이상 차관협상을 않겠다”는 사실을 통고하여 데니가 시도한 차관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딘스모어(Dinsmore) 후임으로 이해 10월 부임한 허드(Augustine Heard)는 국왕에게 양국간 우의가 상호간 통상교역 확장과 생산품의 유리한 교환으로 확대되길 희망하며, 미국 정부는 결코 영토에 대한 야심이 없고 오직 조선이 자원을 개발하여 부강한 국가가 되기를 기원한다는 본국 정부의 광산자원 개발에 대한 관심을 전하였다.

 그러나 블레인 국무장관이 국무성을 떠나고 포스터(John W. Foster)가 후임장관으로 취임한 이후 미국의 입장은 조선이 청과 일본에 비해 여전히 전략적·경제적 이익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이유로 전과는 달리 조선의 사건에 대해 방관자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소극적이었고 군사적으로도 군함 파견을 자제하는 등 종전의 불개입·중립적인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892년 여름에 서울을 잠시 방문한 해군장교의 보고 결과에 대해 해군성이 “조선의 해안에 미국 함대가 정박할 필요성이 없다”고 결정하고, 또한 허드 대리공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미국전함의 조선 방문이 대단히 보기 드물었다는데 기인하고 있다. 때문에 조·미 관계는 우호적이기 보다는 명목적인 상태로 유지되어 조선의 주권이 침해당하고 열강의 위협이 가중되어 갈 때 미국의 지원을 요청한 조선의 호소는 결국 무산될 수 밖에 없었다.

 1892년 11월 내부협판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와 데니의 후임 외무아문 고문 르젠드르(LeGendre)는 허드 대리공사를 방문하고 그가 러·불·독 대표와 연합하여 국왕에게 일본의 배상금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대세임을 알려 조속히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부탁하였다. 허드는 방곡령 해제와 배상금 타결에는 협조적이어서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며 또한 전임자 록힐(Rockhill), 딘스모어 및 자신의 강력한 추천으로 주조선 미공관 서기관으로 근무한 알렌도 같은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허드 대리공사는 제주도 해안 채업권 대신 부산 영도와 전라도에 건어물 장소를 설치하려는 일본의 요구에는 “이와 비슷한 양도가 모든 외국인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적극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어쨌든 방곡령을 둘러싼 조·일간 분쟁은 일본 정부가 국내에서 말썽 많은 자유당의 거물 오이시(大石)를 신임공사로 임명하자 그는 국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만약 방곡령금지에 대한 일본의 배상 요구가 2주 내에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공관을 철수할 것이다”라고 위협적으로 경고하는 등 대조선 강경책으로 일관하였다. 마침내 李鴻章의 개입으로 조선은 관세수입을 담보로 北京으로부터 20만냥을 6%이자로 차관한 후 17만 6천불의 배상금을 지불하여 해결하였다. 미공관은 본국정부에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반대하지 않아 이를 계기로 미·일 관계는 더욱 밀접하게 되었고, 원세개 또한 현상유지를 바랬기 때문에 청·일관계도 개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일 양국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인 미 공사의 친일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1893년 정부는 현재 운영하고 있는 전신국을 새로 설치하는 우정국과 합친 후 미국과 첫 우편조약을 체결하였고, 국왕 또한 2년간 계약기간 만기로 귀국하는 벙커(Bunker)와 헐버트(Hulbert)를 제외한 길모어(Gilmore)교사의 고용 계약을 3년간 갱신하여 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미국 교사들은 국왕이 누구보다 관심을 가진 25명 내지 30명의 학생들에게 정치, 경제, 국제법을 영어로 가르칠 수 있었다. 이때 주조선 미공관에 근무하고 있던 알렌은 언제든지 왕궁에 출입하고, 정부 관리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어 미 스미소니안(Smithsonian)박물관에 과학자료를 보내 조선을 소개하였다. 또한 1893년 그는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 조선의 참가를 계획 지도하면서 휴가를 이용해 직접 미국에 가서 조선 대표단의 진열관 개설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이 해 3월 말부터 동학교도 40명이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국왕에게 동학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의 합법적 인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제출하는 등 시위를 단행하자 국왕은 그들이 귀가하면 청원대로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 시위는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함에 따라 지방관리들이 이를 동학당을 탄압하는 구실로 삼자 동학교도들은 오히려 미국 선교사들이 이 나라를 떠나도록 요구하는 榜文을 게시하여 국내 정세는 매우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이에 허드 대리공사의 요청으로 국무성이 승인한 데이톤(J. H. Dayton)함장이 이끄는 페트럴(Petrel)함과 알래스트(Alest)함이 인천에 입항하고 다음날 袁世凱가 요청한 청 전함 두 척과 英艦 세번(Severn)호가 인천항에 입항하였으며, 이틀 뒤에는 일 전함 두 척마저 입항하여 동학교도의 기세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6월 26일 허드마저 사임하고 귀국하자 미 정부가 임명한 주일본 2등서기관 헐로드(Joseph. R. Herod)가 6월말 부임하여 8월 31일까지 2개월간 대리공사직을 수행하다가 9월 1일 알렌 신임공사가 부임하였다. 이 시기 조선정부가 고용한 많은 미국 고용인들이 조선을 떠나게 되자 알렌은 국무장관 그레샴(Walter Q. Gresham)에게 “최상의 정책은 정치고문의 중요 직위를 미국인의 수중에 유지토록 하는 것이다”고 건의하였지만 미국 정부는 나머지 고용인들이 떠나도록 방치할 만큼 무관심하였다. 조선의 운명에 대해 미국무성이 분명히 보인 무관심 가운데 하나의 이유는 정치적 불안, 열악한 교통, 품질이 나쁜 화폐 및 일·청의 국내 무역독점, 세금 징수 등으로 조선에서 상인들이 챙길 수 있는 무역의 몫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국왕이나 미 공사들은 국정전반을 개선하고 脫華聯美정책을 방해한 袁世凱를 비난하거나, 미국의 대조선정책이 일관성이 결여되어 조선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주기 보다 오히려 조선의 정치적 불안만을 증가시켰다는 불만에 대해 “조선인들은 국내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그들 자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또한 다른 국가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저지만 함으로써 조선에서 계속된 실정과 무질서는 제3의 이해 당사자로 하여금 개입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해 주어 그들의 위치마저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

 1894년 3월 28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池運永의 암살 계획 탄로로 인해 주일 미공사 허바드(Richard B. Hubbard)를 통해 미국 망명을 신청하다 거절당한 김옥균이 上海에서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자 국왕은 미 공관 사무관 알렌을 통해 駐上海 미 총영사 헌터(Hunter)에게 김옥균의 시체 반환과 암살자 洪鐘宇의 호송에 협조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헌터의 개입 거절로 무산되었다. 이러한 헌터의 입장은 5월 31일 국무차관 얼(Edwin Uhl)이 승인하고 주조선 미 공관에게 간섭을 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밝혀 미국의 불간섭정책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알렌의 행동에 유감을 표시하였다. 이 해 4월초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반정부운동이 정부와의 전쟁으로 확대된 것을 기화로 출병한 청·일 양국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허드의 후임으로 이해 4월말 부임한 씨일(John M. B. Sill) 공사는 즉각 본국 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미국 선교사들을 서울로 소집하는 등 미국인의 이익과 자국민 80명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 캐랫트(S. Kerrett) 제독에게 미함 볼티모어(Baltimore)의 인천 입항을 요구하는 한편, 주일 미국공사 던(Edwin. Dun)에게 일본이 병력을 계속 증파하는 의도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도록 타전하였다.

 6월 9일 주일미국공사 던은 일본 정부에 “한반도에 동학난이 성공적으로 진압되었음에도 일본이 공동철수를 거절하고 조선에서 급진적 정치개혁을 시도하고 있음”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한편 일본이 위약하고 방위력이 없는 인접국가의 영토를 불의의 전쟁터로 만든다면 미국 대통령에게 고통스러운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될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혀 일본이 조선의 독립과 주권을 존중해 주도록 촉구하였다. 동시에 이날 주북경 미국공사 덴비(Charles Denby)는 국무성에 청병의 조선 파견을 알리고 李鴻章은 청군대가 철수할 것임을 통고하였다. 15일 주일미공사 던은 국무장관 그레샴(Gresham)에게 일본이 파견한 군대의 숫자는 그들이 공언한 것과 일치하고 있지 않다고 전제하고 일본의 개전 가능성을 보고하였다.

 22일 일본이 다시 자국민보호와 동학난의 진압,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무시한 청일 공동 관리안을 제출하여 조선을 지배하려는 본심을 드러내자 조선 정부는 주미공관을 통해 미국 정부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에 앞서 18일 씨일 공사는 국무장관 그레샴에게 조선 국왕은 청국 군대가 철수토록 애원하고 있으나 청은 일본이 있는 한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고 있으며 또한 인천항에는 일·청·미·영·불·러 6개국의 전함 28척과 수송함이 정박하고 있다는 긴박한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에 미국 정부는 씨일공사에게 가능한 한 조선에서 평화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다음날 씨일 공사는 청국은 동시 철수에 찬성하나 일본은 이를 반대하고 있어 저의를 의심받고 있으며 또한 전쟁을 원하는 것 같아 조선의 주권보전이 위협을 받고 있으며, 조선 국왕은 미국이 일본과의 중재를 원하고 있음을 타전하여 미국 정부의 개입을 정식으로 요청하는 동시에 자신은 조선 국왕의 요청으로 영·러·불 대표들과 함께 일본에 대한 동시철병 요구에 참여하였음을 보고하였다.

 27일 던 공사는 본국 정부에 “청국이 양보하거나 혹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본 외무차관 하야시(林董)의 말을 전한데 이어 다시 29일 “청일관계가 너무 위급하기 때문에 일본은 언제든지 청으로부터 공관과 영사관을 철수해야 될 지 모르며 만약 그럴 경우 미국이 청국 주재 일본 거주자들의 보호를 책임맡아 줄 수 있는지?” 여부를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물을 정도로 일본과는 긴밀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날 국무장관은 던 공사에게 일본이 무슨 이유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무엇을 요구했는지 알아보도록 훈령을 내렸다. 7월 3일 던 공사는 “일본의 파병은 1882년과 1884년(壬午와 甲申)에 있었던 사건들의 재발을 방지하는 데 있고, 일본은 향후 소요의 방지 보장책으로 행정개혁을 원하나 청은 이를 위한 공동행동을 거절하고 있어 일본이 단독으로 개혁을 수행하고자 하며 일본은 영토적 병합의사가 없음”을 전문으로 알렸다. 그러나 陸奧重光 외상은 청이 언제나 속임수와 교활한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어 일본은 무력에 호소할 수 밖에 없으며 조급한 자국병력 철수가 원상회복을 촉진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극동의 평화를 위협할지 모른다고 변명하면서 던 공사에게 자국병력을 철수하지 않는 이유를 설득하였다. 이에 미 정부는 씨일 공사에게 조선과 조선 국민의 복지를 미국의 우호적 시각에서 보아 평화적 조건을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만 지시하여 청·일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불개입정책을 되풀이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에 있던 미국 선교사들은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르려 하지 않고 자기들이 봉사하고 있는 조선과 조선 국민을 동정하였다.

 9일 미국무장관 그레샴은 조선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으므로 평화유지를 위해 3차에 걸쳐 미국의 개입을 요청한 李承壽 주미공사에게 “미국은 한국의 독립이 존중되기를 희망하나 조선과 타국에 대하여 공평한 중립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 여하한 경우에도 미국은 타국과 공동으로 간섭할 수 없다”는 종전의 입장만을 되풀이하는 한편 주일 공사 던에게 “조선에 대해 신실한 우의를 갖고 있으므로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조선의 독립과 주권을 존중하기를 희망한다. … 만약 일본이 약하고 무방비한 이웃의 영토를 처음부터 전투장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이는 미 대통령에게 고통스러운 실망의 문제가 될 것이다”라고 통고하여 결코 청·일 양국간의 분쟁이 개전으로 발전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일본외상 陸奧重光가 말한 것처럼 “미국은 역사적으로 일본에 대해 가장 우호적이며 신실한 국가였고 또한 미국 자신의 특별한 외교정책은 극동사태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정도로 미국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쨌든 미국은 조·미조약의 거중조정(Good offices)조항에 따라 중재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 노력에 호의적이고 동정적이었으나, 조선이 청의 지배나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려는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는 항상 불간섭의 원칙을 고수하는 이상의 일은 피하려고 하였다.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기간에도 미국은 교전국에 대해 공평한 우호적인 중립노선을 추구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6일 미 대통령은 주일 던 공사를 통해 “만약 일본의 육·해 군사작전을 견제하지 않고 전투가 계속된다면 그 지역에 이해를 가진 제3의 국가들이 장차 일본의 안보와 복지에 불리한 해결책을 요구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일본 정부가 미국의 중재를 수락할지 여부를 일본 정부에 타진토록 지시, 중재를 자청하였다. 이에 17일 일본 정부는 청이 먼저 평화회담문제를 제기한다면 응하되 공식적으로 이를 요청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하였다. 이를 확인한 청 정부는 명예와 권위를 돌보지 않고 주북경미국공사 덴비에게 조선의 독립인정과 군비지출에 대한 배상금을 조건으로 평화회담을 개최할 의사를 전하였다. 27일 주북경과 동경의 미국 대표들을 통하여 청의 제안이 일본에 의해 수락되지 않자, 마침 일본 정부도 주일미국공사 던에게 “청이 평화회담 문제를 끄집어내어 중재자로서 미국의 알선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중재로 終戰에 대한 평화회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고 알려 미국정부가 청·일 양국의 終戰에 중재자로 나서도록 요구하였다. 이해 12월 말부터 3월 14일 이홍장이 평화회담을 위해 天津을 떠나기 전까지 미국의 중재로 청·일 양국은 사전 전권대신의 지위, 회담장소, 전권대사 자격의 시비문제, 사전조약 내용 그리고 특히 회담 중 이홍장의 피격과 같은 사건을 포함한 가장 어려운 배상금액과 영토문제를 해결한 후 이듬해인 1895년 4월 17일 下關條約이 체결된 것을 계기로 미국의 대조선 외교정책도 친일노선으로 급선회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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