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2. 조선의 대외관계
  • 3) 조·러관계

3) 조·러관계

 러시아의 대조선 기본정책은 일본처럼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종래 러시아의 소극적인 대조선정책이 1884년 조·러수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적극적 정책으로 전환되려는 시점에서 영국의 거문도점령사건이 발생하였고 또한 제 1, 2차 조·러밀약사건이 일어난 탓으로 러시아 정부는 종래의 동북아정책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1886년 여름 러시아는 조선 영토가 침략당하면 러시아도 부동항을 점령할 것이라는 결의를 청을 비롯한 열강에게 보이기 위해 쾌속선 베스티니크(Vestinik)를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보호한다는 의지를 보여 줌으로써 우회적으로 이홍장에게 영국 함대의 거문도 철수에 동참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이어 1886년 9월 12일, 25일, 29일, 10월 1일의 네 차례 회담 끝에 체결된 李-라디겐스키협정(청·러천진협정)에서는 조선의 영토보전에 대한 비밀보장 즉 첫째, 조선과 청, 조선과 각국과 관계는 현상을 유지하며 둘째, 조선의 영토보전을 보장하고 셋째, 조선국왕의 자주권을 인정하여 장차 조선에서 예기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을 때 조선이 이를 자주적으로 처리하고 청·러 양국간의 협정에 의해서만 변경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이 조약의 제3조는 러시아가 오히려 청국을 이용하여 청·러 양국이 조선을 공동으로 통치하려는 야심을 드러낸 내용이기 때문에 이홍장이 거절하여 두 사람은 조선의 영토보전에 관한 구두협정으로 종결지었다. 10월 30일 청은 주북경 영국공사 월샴(John Walsham)에게 이같은 청·러 천진협정을 전달하는 한편 다시 영국이 요구한 서면보장(他國不占保障)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2월 27일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철수하여 조선을 위요한 긴장이 크게 완화되었다. 무엇보다 청은 영국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여 조선의 외교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조선국왕의 독립국가 노선에 쐐기를 박았다는 사실에서 李鴻章의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 함대의 거문도점령사건을 전후하여 보여준 영·청간의 협력적인 태도로 인해 영국 함대의 철수 직전인 2월 7일 러시아는 동북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특별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동북아지역 현지 책임자인 아무르총독 코르프(Adjnntant General Baron Korf)는 청국 군대와 영국 함대는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게 심각한 위험과 조선에 대한 분쟁을 야기시킬 수 있고, 따라서 조선에서의 영토획득은 러시아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국경지역과 원산·영흥만을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여 전반적인 러시아의 지위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회의의 결과 코르프와 총독 이그나티에프(N. P. Ignatiev)가 짜아르 정부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을 청원하여 러시아 정부는 종래 극동의 방위를 해군력 강화에만 의존하지 않고 육군력의 강화를 모색하는 새로운 방위정책을 채택하여 당분간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극동지역의 러시아 관리들은 청에 대한 방위로서 사용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필요성을 언급하기 시작한 이후 1888년 2월 2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특별회의에서 러시아가 조선으로 영토를 팽창하거나 부동항을 점령할 경우 영국과 청국이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의 극동정책을 강화할 때까지는 지금까지 추구해 온 평화적인 현상유지책을 지속하기로 재확인하였다.

 또한 이 해 4월 26일과 5월 8일 러시아정부는 프리아무르(Priamur)의 총독 겸 방위군사령관 코르프(A. N. Korf)와 외무성 아시아국장 겸 추밀원 고문관 지노비에프(I. A. Zinovieff) 사이에서 검토된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기본 노선을 반영하였다. 특히 이 회담에서 그들은 러시아에 의한 조선병합은 조선이 빈한하고 방위하기 어려우며 러시아의 국력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해군의 공격을 노출시켜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며 조선을 점령하려는 어떤 시도도 영국·청 및 일본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조선의 독립을 유린하는 어떠한 조선병합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라디겐스키와 이홍장간에 체결한 청·러 비밀협약을 준수하며 조선의 획득은 러시아에게 이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상당한 불이익의 결과를 가져오며 둘째, 상업적인 면에서 조선이 너무 貧國이고 중앙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군사적으로 방위가 어려워 불이익과 어려움이 따르며 셋째, 그럼에도 만주의 첨단에 위치한 조선은 러시아에게 중요한 전략적 기지로 바꿀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기지의 방위와 관련하여 불편과 곤란이 따르기 때문에 충분한 군사력을 발휘할 수 없고 특히 극동지역에서의 러시아 자신의 속령에서 제조업이 없어 러시아에 유익한 통상시장이 될 수 없고 경제적 가치가 적으며 넷째, 연해주의 제한된 재력때문에 조선으로의 영토확장은 재정적으로 부담스러우며 다섯째, 러시아의 조선병합은 영국뿐만 아니라 청과의 국제관계를 파괴하며 만약 청·일 양국이 동맹하게 되면 러시아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지므로 러시아는 청·러 천진협정의 정신을 준수하며 조선의 점령을 반대한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의 견해와 입장을 수용하여 청과의 전쟁을 피함으로써 조선영토의 불침방침을 세운 이후 특히 1888년 봄 러시아 정부 고위회담에서 “근래 수 년간 경험한 증명에 근거하여 러시아의 정치이익의 주요 집중은 조선에 있다. 조선은 우리의 중요한 전략거점이 될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은 조선의 정치적, 군사적, 전략적 가치를 본국 정부의 외교정책에 반영하고자 베베르는 정부와 가진 회담에서 첫째, 조선은 독립하기에 너무 약소국이므로 청국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말고 현재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청이 조선내정을 간섭할 구실을 제공하는 어떤 일도 피하도록 자문할 것 둘째, 러시아 단독으로 조선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은 러시아에 이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곤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서울주재 외국사절대표의 협조를 구해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것 셋째, 조선의 내정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은 극히 조심스러워야 하며 또한 러시아의 간섭이 조선의 내란이나 분규를 저지시킬 수 있는 경우에만 한정하며 넷째,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보장받는 확실한 길은 조선이 발전하는 방법 밖에 없으니 이 점에 대해 조선정부의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네 가지 사항에 합의하였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경제적, 군사적 가치가 곧 러시아로 하여금 청국의 조선 속방정책을 반대하거나 직접 청국과 대결할 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러시아는 되도록 조선에서 청·일의 이해관계를 존중하며 특히 청국의 의심을 사지 않고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신중한 정책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이 해 7월 원세개는 정부가 조·미 조약의 규정에 따라 주미공사의 파견결정을 사전에 청국과 협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저지하자 베베르는 미국정부가 어느 정도 조선에 지원할 것인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의 대조선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아 매우 어려운 입장에 처했었다. 그러나 이홍장은 국왕의 파사결정을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종주권의 도전으로 판단하여 원세개의 간섭정책을 적극 지지하였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한 일, 러는 조선의 미 파사를 지지하지 않고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여 오히려 러, 일관계는 상호협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청·일관계 또한 개선되었다.

 이해 8월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미국공사 데니의 적극적인 도움을 얻어 외아문 독판 趙秉式과의 사이에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두만강 변경지역의 무역을 정상화시키고 또한 자국상인들의 안전한 교역을 도모하기 위해 변경 육지 100리 내에 무역지대 설치를 허용하는 조·러 육로통상장정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군사나 정치적 합의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 성격상 전적으로 통상장정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무역은 사실상 미미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면에서 5%의 종가세 부과 규정은 성공적은 아니었지만 이 조약으로 조선의 항구와 블라디보스톡간에 증기선이 운행하게 되었고, 경흥에 영사관이 설치되었으며, 전혀 무역거래가 없는 부산에도 러시아 영사가 주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러시아가 조선에서 거둔 크나큰 외교 성과로 볼 수 있지만 열강 제국은 러시아가 이 조약을 조선의 북동지역에 침투하여 영흥만 주변지역을 지배할 수단으로 믿어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의도와 조약 내에 비밀협약이 첨가되지 않았는가 의심을 불러 일으켜 러시아를 더욱 경계하였다.

 조·러 육로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청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대우하여 이 조약을 체결한 러시아의 의도를 의심하였기 때문에 러시아 외상 기어즈(Giers)는 이홍장에게 “청·러 천진협약에 제3국의 가입을 성문화하자”고 역제의 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오히려 이 협상을 이용하여 영·일 및 러에게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명문화할 것을 고집하여 그들과의 협상은 자연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실제로 러시아는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별로 이득을 얻을 수가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쉽게 개선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의 시장은 청·일 양국의 상인에 의해 이미 잠식되어 있었고 러시아 상품까지 소화해 내기에는 너무나 협소한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거리상 러시아가 조선까지 병력수송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으며 당시 그들 해군력으로서 조선의 긴 해안선을 방위할 능력도 없었다. 그러므로 극동지역에서 상대적 열세를 인식한 러시아는 영국과 청이 연합하여 블라디보스톡과 시베리아지역을 침범할지 모른다고 우려하여 조선에서 이들을 자극하지 않았고 또한 일본에 대해서도 호의와 우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신중한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처럼 러시아는 조·청간의 전통적인 관계, 러시아의 대외진출을 견제해 온 영국 그리고 새로운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일본 등을 의식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우위를 확보할 적절한 시기를 택하지 못하고 중립적인 관망정책을 견지하였다. 따라서 러시아의 신중한 외교노선은 경제적·전략적 측면에서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추진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러시아는 그들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는 한 조선에서의 청의 활동에 소극적으로 반대하였으며 때로는 청의 종주권을 묵인하여 조선의 현상유지를 희망하였다. 이에 따라 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 다음으로 러시아를 선택하여 청·일·영을 견제하기를 바란 조선의 기대는 결국 러시아가 극동지역 특히 조선에서 청·일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영국마저 자극하지 않으려는 소극적이고 신중한 대조선정책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갑신정변 이후 1889년까지 5년간 軍制와 군비를 정비한 일본은 해군력을 강화하여 함대 톤수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 러시아의 해군력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증강시키자, 이해 5월과 6월 프리우수리 총사령부 소속 베텔(F. Vetel)중령은 일찍부터 거론되어 온 영흥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확인하고자 현지조사를 단행하였다. 조사 결과는 영흥만의 방위에 막대한 비용이 소용되고 영흥만이 러시아 변경에서 산길로 650㎞(3,000리)나 떨어져 있으며 겨울 2개월간은 결빙하여 만약 일본과 러시아가 開戰할 경우 일본이 조선 해협을 봉쇄한다면 러시아 함대는 동해에 갇혀 사실상 영흥만을 전략적으로 이용할 수 없으므로 조선을 전적으로 무시해도 무방하다는 보고였다.

 이 해 일본에서 대러강경론자이며 군부의 최고 실권자인 야마가타(山縣有朋)가 집권하자 러시아측은 일·러조약 수정에 대한 비준을 지연시켰다. 이로 인해 1885년 영함의 거문도점령사건으로 결속되고, 1887년 10월 박정양 공사의 派美를 둘러싸고 袁世凱의 대조선간섭정책을 적극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일시 형성된 러·일본간에 좋은 감정은 사라지게 되고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국내여론마저 악화되어 불신으로 변하였다.

 1890년 6월 청이 山海關에서 만주를 거쳐 瀋陽까지의 철도부설을 영국인 기사 킨더(M. C. W. Kinder)와 계약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러시아 외상 기어즈가 철도의 중요성을 인지함에 따라 마침내 이듬해 2월 3일 특별회의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1891년 2월 27일과 3월 5일 각료회의에서도 상기 철도의 건설수단과 방법을 정하고 5월 31일 니콜라이(Tsarevich Nicholas)가 극동여행길에 올라 경제적, 전략적 목적을 고려한 상기 철도 건설공사의 기공식에 참석하여 러시아의 극동정책 수행이 구체화된 것을 계기로 일본은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되기 전 대륙침략을 위해 청국과 一戰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해 8월 러·불 정치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극동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위테(S. Y Witte)가 9월 11일 재무장관 서리직에 임명되자 그는 극동과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국내외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 공사의 진행방침을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 시베리아 철도의 완성으로 구주에 中國茶의 급속한 수송이 중국에 생산품을 수출할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동시에 러시아로 하여금 면사, 면, 금속제품의 판매에서 청에서 영국과 경쟁할 것으로 기대하여 이 철도가 러시아와 청경제의 단합의 토대를 마련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줄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특히 1893년 12월 러·불 군사동맹이 체결되자 위테는 이 철도가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유지하는 데 상당한 힘을 실어 줄 것이며 구주나 극동에서 정치적 분규가 있을 경우 태평양 해역의 모든 상업적 활동을 좌우하는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가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국제관계하에 이즈음 조선 정부가 발표한 방곡령과 이듬해 봄 上海에서 일본 정객 大倫의 자금이 연루된 김옥균 암살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인 청의 석연치 못한 태도는 일본 여론을 악화시켜 그들에게 청에 대한 개전의 명분과 구실을 제공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청·일은 자국의 이익을 고수하기 위해 조선에 각각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대치함으로써 양국간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보였다. 당시 휴가차 北京에 갔다가 주청 러시아공사 카시니(A. P Cassini)의 부탁으로 잠시 업무를 맡게 된 베베르와 불 대표를 제외한 주조선 각국 대표들은 그들의 본국 정부에 조선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청·일 양군의 동정과 사태진전을 보고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지시해 주도록 건의하였다.

 6월 초까지 러시아 정부는 주조선 공관으로부터 현지상황을 보고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체적 방침도 세우지 못한 채 단지 사태의 진전만을 관망하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가 청·일 분쟁 조정에 나서기 위해 구체적인 태도를 표명한 것은 이홍장이 6월 9일 주북경 영국 공사 오코너(Nicolas R O'conor)와 비밀회담이 실패한 후 20일 휴가차 귀국길에 天津에 들린 카시니에게 조선에서 일본군과 공동철수를 중재해 주도록 정식으로 요청하여 카시니가 본국 정부에 이를 보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홍장이 전통적인 ‘以夷制夷策’의 일환으로 러시아를 청·일분쟁에 끌어넣어 이를 해결하려고 한 것은 오코너가 이미 불개입정책을 표명하여 조정역할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李는 카시니에게 1886년 청·러 협정에 규정된 상호 조선 영토 불침범 보장조항을 내세워 러시아의 중재로 자신의 공동철수안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李의 접근책은 만약 러의 개입으로 조선에서 청·일 양국의 충돌을 방지할 경우 어떠한 희생도 치르지 않고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청·러 양국의 영향력을 대폭 증대시킬 것이며, 이로 인해 동북아에서 영국의 입지가 약화될 것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계산에서 비롯되었다. 이 날 李의 공동철수 요청과 청정부의 명의로 된 중재요청을 카시니를 통해 정식으로 제의받은 러시아 외상 기어즈는 사전에 이홍장과 오코너간에 영국의 거중조정 교섭이 실패한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카시니에게 “天津에서 이홍장과 접촉하여 교섭을 진행하라”고 통고하고 주일본 러시아공사 히트로프(Mikhail Hitrovo)에게도 청·일 양국군대가 동시에 조선에서 철수하도록 일본 정부를 설득하도록 훈령하였다.

 다음 날 본국 정부의 전문을 받은 카시니는 파블로프(A. F. Pavlov) 參使를 통해 이홍장에게 마치 러시아는 일본이 동시 철병을 않는다면 강압적인 방법(무력사용)도 불사할 것 같은 강경한 본국 정부의 입장을 전하였다. 히트로프공사도 이 날 일본 외무경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를 방문하고 러시아의 대일요구가 이홍장의 중재요청에 의한 것임을 전제한 후 청·일 양국이 평화적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기를 원한다는 본국 정부의 뜻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陸奧는 히트로프공사에게 청이 일본과 공동으로 조선 내정개혁에 참여한다면 청·일 공동철병 의사를 고려하겠고, 일본은 절대 먼저 개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약속과는 달리 陸奧는 이미 오토리(大鳥圭介)공사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開戰의 구실을 찾으라고 훈령을 내리는 한편 17일 청의 공동철수 주장에 대하여 조선의 내정개혁에 대한 공동계획을 제의하여 러시아의 공동철병 권고를 사실상 무시하여 버렸다.

 이러한 상황하에 히트로프는 일본의 확고한 개전 의사를 간파하지 못하고 본국 정부에 일본이 개전을 바라지 않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이상 양국의 충돌은 피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떤 국가가(청국) 러시아로 하여금 동북아의 분쟁와중에 끌어넣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여 이홍장이 영국의 중재제의설을 구실로 러시아를 청·일 분쟁에 끌어들이려는 이중외교행각을 비난하면서 카시니와는 달리 본국 정부의 개입을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기어즈외상은 처음의 적극적인 태도와는 달리 한 발짝 물러서서 카시니와 히트로프에게 이홍장이 요구한 러시아의 중재는 오직 청·일 양측에 의해 요청될 때만 받아들여 조선에서 공동철수를 실행한다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카시니의 적극 개입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일본이 공동내정개혁안에 참여를 거절한 청에 제1차 절교서를 전달하여 그들은 결코 철병하지 않겠다는 뜻을 통고하고 단독 내정개혁을 밝힌 이후였고, 大鳥공사는 이를 계기로 국왕에게 6월 26일까지 내정개혁위원임명을 요구한 상황이었다. 이에 외아문 독판 趙秉稷은 러시아 참사 케아르버그(Paul De Kehrberg)를 위시한 서울 주재 각국 사절대표들에게 이들 외교 대표들이 청·일 대표들에게 공동철병 단행을 촉구해 주도록 부탁하자 이들은 공동명의로 즉각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난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大鳥공사가 내정개혁과 종속 두 문제에 대한 정부의 회답을 29일까지 요구하던 날 케아르버그는 오히려 본국 정부에 동학난이 이미 평정되어 조선 국왕이 각국 대표들로 하여금 자국정부에 동북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청·일 공동철병을 관철해 주도록 정식으로 요청한 사실을 타전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즉각 주청·주일 공사에게 조선 정부의 공동철병의 뜻을 주재국가에게 알리도록 훈령하였다. 이 가운데 기어즈외상은 히트로프에게 일본 정부로 하여금 이해시키도록 할 것은 만약 일본이 조선에서 공동철병을 방해할 때는 일본 스스로 중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는 전보다 강경한 입장을 시달하였다. 6월 30일 히트로프는 다시 외무성을 방문하여 陸奧 외상이 표현한 것처럼 ‘모골이 송연할 느낌을 줄 정도’의 강경한 철병권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대해 陸奧는 이것이 분명 러시아의 무력개입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조선에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철병할 수는 없는 처지여서 사안이 중대한 만큼 최종회답을 하기 전 내각과 상의해야 된다고 히트로프에게 완곡한 표현으로 확답을 회피하였다.

 한편 카시니는 7월 1일 본국정부에 “이홍장은 청국이 조선의 내정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이 개혁의 문제는 서울이나 天津에서 러·청·일 대표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하여 이홍장이 이미 청·일·러 삼국회의를 제안한 것처럼 보고하여 본국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때 러시아 정부는 영국공사 라셀레스(F. Lascelles)가 이미 6월 30일 러시아 외무성 아시아국장 카프니스트(Count Kapnist)를 만나 “영국 정부는 억지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개입정책을 천명했을 뿐 아니라 카시니가 이홍장의 요청을 받아 히트로프로 하여금 일본 정부에 “만약 일본이 열강의 권고를 거부한다면 열강은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통고해 주도록 부탁한 사실마저 털어놓았다. 이에 카프니스트국장은 카시니와 이홍장이 러시아를 청·일분쟁에 끌어들여 공동철병을 관철하려는 장본인들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조선에 관한 한 영국의 견제를 받고 있으므로 그는 러시아 정부가 조선의 현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탓으로 영국이 사실상 반대하는 카시니의 삼국회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7월 2일 일본 정부는 히트로프에게 “아직 조선사변을 조성한 근본적인 원인이 제거되지 않아 철병하지 못하고 있고, 일본은 조선영토를 침략할 뜻이 없다”고 회답하여 러시아의 철병 권고를 완곡한 표현으로 거절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 영토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통고는 러시아 정부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 공동 철병이나 삼국회의를 재론않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럼에도 7월 5일에는 카시니를 대신하여 總理衙門을 방문한 조선주재 러시아대표 베베르는 이홍장이 조선문제 처리에 전권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와 그가 적극 지지한 삼국회의에 대한 청국 정부의 입장을 타진하였다. 그러나 總理衙門 대신들은 이홍장이 전권의 일부를 가지고 있음을 시인하고 삼국회의는 카시니가 제의한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확답을 회피하였다.

 7월 6일 카시니는 히트로프로부터 일본정부가 러시아의 권고를 거절하여 이젠 ‘평화적 방법은 절망적’이란 전문을 받았다. 그럼에도 카시니는 본국 정부에 다시 조선 반도에서 일본의 독점세력 구축을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시종일관 러시아정부의 개입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미 청·일 분규의 와중에 휩쓸리기를 원치 않고 일본에 대한 철병권고를 우호적인 성격에 국한시켰음을 알리면서 카시니의 주의를 환기시킨 후 그의 개입 제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카시니가 삼국회의을 제의한 사실을 확인한 주청 역국공사 오코너는 자기 나름대로 열강 오국회의에 의한 공동간섭책을 청 總理衙門과 이홍장에게 역제의하여 청·일 분쟁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열강오국회의나 조선문제의 최종결정권이 청국 정부와 이홍장 중 누구에게 속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데다 일본도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았다. 이에 영국 정부는 청·일 양군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일본은 남쪽을, 청국은 북쪽을 점령하는 조선 영토 분할점령안을 제의하여 양국 분쟁해결의 타결책을 다시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즈음 청·일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정치적 위기에 처한 청정부내의 분위기는 慶親王을 비롯한 翁同壽가 주전론자로, 西太后를 비롯한 李鴻章은 주화론자로 분열되어 있었고, 청정부 내에 국가 위기관리의 최고책임자와 결정자가 누군지 분명하지 않아 권한과 책임의 소재와 한계를 분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적절한 대안이 마련되거나 해결책이 나올 수 없었다.

 물론 청은 영국의 열강 5개국 간섭안과 분할점령안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7월 23일 이미 조선에 최후 통첩을 보냈고, 영국의 조정 성의와 노력을 외면할 수 없어 영국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일본정부는 청 정부에 첫째, 청국의 增兵과 조선내정개혁에 일본이 단독 참여하며 둘째, 조선에서 청과 ‘정치상’이란 명문으로 표시하여 동등한 권리를 향유하고 셋째, 청국의 내정개혁 불참을 조건으로 청 정부와 타협한다는 전보다 더 가혹한 제의를 전달하여 사실상 영국의 제의를 거절해 버렸다. 영국은 이와 같은 일본의 요구가 분명히 이홍장과 伊藤간에 체결한 천진조약의 정신을 위반한 것이라고 간주했지만 일본의 개전의사를 꺾을 수는 없었다.

 7월 14일 이미 정부로부터 개전준비를 지시받은 이홍장은 조선에 그들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차용한 1,353톤의 高升號가 7월 28일 조선의 豊島 근해에서 일본전함 나니화하라(吉野) 등 3척에 의해 피격 침몰되는 사건을 계기로 국가의 체면, 권위와 자존심마저 짓밟힌 청정부가 8월 1일 먼저 선전포고를 하여 청·일 양국은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 2개월간 이홍장이 以夷制夷策으로 영·러 양국의 조정을 끌어들여 청·일간의 분쟁을 해결하려던 외교적 노력은 아무 보람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以夷制夷策은 약소국이 강대국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열강간의 모순을 이용하여 견제의 효과를 얻는 데 있다. 그럼에도 이홍장은 자국이 경제와 군사력 및 정확한 정책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열강의 모순과 상호 견제만을 이용하려다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그들 자신이 이들 열강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러시아는 조선에서 현상유지를 바라는 영·러협정에 따라 영국과 공동보조를 취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때까지 만주, 사할린 일대 및 조선에서 그들의 이해관계가 치명적으로 침해받았다고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입정책에 반대하는 소극적인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청·일전쟁 발발 초기인 8월 9일 추밀원 위테와 조선 국경에 군대증강을 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재무부 장관이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이들 양인은 첫째, 청·일전쟁에 적극적 개입이 러시아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므로 조선 문제는 다른 이해 당사국과 상치되지 않는 정책을 추구하고 교전국에 조속한 종전과 조선 문제를 외교루트를 통해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둘째, 특히 중립선언은 하지 않고 청·일 정부에 러시아의 이익을 존중할 것과 조선 국경에 대한 오해를 구실로 하는 어떠한 일도 피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며 셋째, 청·일 문제는 조선에서 현상유지가 바람직하며 넷째, 조선 국경에 인접한 지역에서 예측할 수 없는 증원부대의 문제에 대하여 필요하다면 반노스키(A. Vannosky)장군에게 필요한 부대의 개설을 위해 재무장관과 협정을 체결할 것에 합의하는 등 독자적 불간섭 정책을 채택하기로 합의하였다. 어쨌든 청·일전쟁을 계기로 영국을 비롯한 구미열강과 러시아의 동북아 진출은 현저히 나타났고 청의 패전으로 야기된 동북아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 일본이 조선과 청에서 획득한 정치적 우위와 경제적 특권은 러시아에 의해 견제될 수 밖에 없었다.

<朴日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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