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5. 외국인 고문의 고빙

5. 외국인 고문의 고빙

 조선정부는 개화정책과 자주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일환으로 다수의 외국인 고문관과 기술자를 고빙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 서구식 제도와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내재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외교·군사·교육·산업 전분야에 걸쳐 근대적 지식과 경험을 갖춘 외국인 고문관의 고빙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1881년부터 일본·청국인은 물론 그들의 권고로 묄렌도르프 등 서구인을, 갑신정변 이후에는 청국의 내정간섭이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 주로 미국인 고문관·군사교관·교사·기술자 등을 초빙하였다.

 우선 외교 및 법률고문으로는 데니·그레이트하우스·르젠드르 등 모두 미국인을 채용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 주고 있다. 조러밀약의 추진으로 파면당한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1886년 5월 데니가 부임하였다. 청국은 조선에서 러·일 양국의 세력이 점차 증대하자 이에 대처할 외교고문으로 미국인 데니를 천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청국으로부터 조선의 친청정책 유도, 종속유지의 사명이 암암리에 주어졌다. 그러나 판사출신인 그는 袁世凱가 고종폐위 등 조선의 내정에 극심하게 간섭하고 아울러 자신의 영향력 증대를 꺼려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자 오히려 반청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데니는 조선이 청국과 朝貢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屬國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丙寅洋擾와 천주교 포교관계로 소원해 왔던 프랑스와 국교를 맺도록 주선한 데 이어<한러육상조약>을 체결토록 하였으며, 구미 각국에 조선의 외교사절을 상주케 함으로써 청국의 간섭을 배제시키는 등 조선의 자주적인 외교활동을 도왔다. 아울러 그는 조·청간의 종속관계를 부정하고 국제법 이론에 근거해 조선왕국의 독립성을 명쾌하게 밝혀 놓는 동시에 청국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신랄히 비판하는≪淸韓論≫을 저술·출판하였다. 이 글은 짧은 정치 논설이었지만 군사적으로 조선의 주권을 탈취하지 않는 한 조선이 영구적인 독립국임을 선명하게 논증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국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데니는 친구 프레이저의 商社를 조선으로 유치하여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도록 이권에 관여하기도 했지만, 조청관계를 국제법적으로 규명하고 조선의 해외공관 설치를 주선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자주독립외교를 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0238)스워다우트 지음·申福龍·姜錫燦 옮김,≪데니의 생애와 활동-韓末 外交 顧問制度의 한 硏究-≫(평민사, 1988).

 1890년초 데니가 청국의 압력에 의해 임기를 마치고 사임하자 역시 미국인 르젠드르가 외교고문으로 취임하였다. 원래 프랑스인으로서 미국에 귀화하였던 그는 청국 厦門영사, 그리고 일본 외무성 고문을 역임하다가 미국공사 딘스모어의 추천에 의해 채용되었다. 메릴의 사임으로 해관총세무사직이 공석이 되자 고종은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해관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고자 르젠드르를 발탁하려 시도했으나 원세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일본과 상해에 파견되어 구미 열강으로부터 200만원 차관교섭을 벌였으나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1890년 8월 외교·법률고문으로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가 고빙되었다. 그는 법률가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문사를 경영한 바 있었으며, 특히 일본 橫濱총영사로 근무하는 동안 친일적 외교관으로 평가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외무성의 추천을 받아 초빙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내무부 협판직을 부여받았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과 황해도 防穀令사건과 제주도 通漁문제 등을 절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0239)崔鍾庫,≪韓國의 西洋法受容史≫(博英社, 1982), 155∼158·192∼193쪽.

 다음으로 해관담당 고문에는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미국인 메릴(Henry F. Merrill)이 고빙되었다. 1885년 9월 해관 총세무사로 임명된 그는 청국 해관에서 근무하였으며, 부임하기 전 이홍장과 청국 총해관사 하트(Robert Hart) 등으로부터 조선해관을 청국해관의 일부분으로 개편·통합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메릴은 이 훈령을 비교적 충실히 이행하여 부임 직후 묄렌도르프 휘하에 있던 해관원을 상당수 해고 또는 직위 교체하였다. 이와 동시에 인천해관 세무사서리에 독일인 쉐니케, 부산해관 세무사서리에 프랑스인 피리(T. Piry), 원산해관 세무사서리에 영국인 크리그(E. F. Creagh) 등을 신규 채용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메릴은 조선해관의 분기별 보고서를 청국해관의 貿易總冊에 합쳐 간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착실히 시행함으로써 조선해관이 자연히 청국해관의 지부로 인식되기도 하였다.0240)高柄翊,<朝鮮海關과 淸國海關과의 關係-「메릴」과「하트」를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1965), 465∼48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릴도 원세개와의 불화로 1889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메릴의 뒤를 이어 쉐니케, 모오간(F. A. Morgan)이 서리로 임명되면서 진남포와 그 밖의 개항장에도 해관이 설치되는 등 해관사무의 질서가 잡혀갔다. 1893년에는 역시 청국해관에 근무하였던 영국인 브라운(J. McLeavy Brown)이 총세무사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또한 교사로서 역시 미국인 헐버트·길모어(G. W. Gilmore) 및 벙커(D. Z. Bunker) 등이 초빙되었다. 미국인교사 초빙은 보빙사 민영익이 방미 중 이미 교섭한 바 있었다가 1884년 9월 조선정부가 미국공사 푸트에게 직접 의뢰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추진되었다. 푸트의 요청을 받은 미국 내무성 교육국장 이튼(J. Eaton)은 외국에 파견될 교사는 신앙심이 두터운 신학생이 적당하다는 생각하에 외교선교부직원과 협의하여 뉴욕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인물을 구하였다. 그리하여 헐버트·길모아·번(H. E. Bourne) 3명을 선발하였으나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일시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1885년 중반부터 교섭이 재개되어 그 다음해 7월 4일 조선에 교사들이 도착하였다.

 그런데 애초에 오기로 작정되었던 사람 중 번은 중도에 포기하고 그 대신 벙커가 참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미국의 일류대학을 졸업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길모어는 프린스톤대학을, 벙커는 오베린대학을 각각 졸업하여 유니온 신학교의 졸업반에 있었고, 헐버트는 다트마스대학을 졸업한 뒤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특히 헐버트는 명문의 집안으로 그의 아버지는 다트마스대학 출신으로 조합교회의 유명한 목사인 동시에 미들버리대학의 총장이었고, 어머니는 다타마스대학의 창설자의 후예이며 인도에 파견되었던 선교사의 딸로서 그의 가족은 철저한 칼빈주의 신봉자들이었다.0241)李光麟,<育英公院의 設置와 그 變遷>, 앞의 책, 112∼119쪽.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육영공원이 설치된지 3년만인 1889년 길모어가 먼저 사임 귀국하고, 1891년 헐버트도 뒤따라 사임하였다. 그리고 1894년 봄 벙커마저 배재학당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육영공원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한편 군사교관으로는 다이(William McEntyre Dye)·커민스(Edmund H. Cummins)·리(John G. Lee)·닌스테드(F. H. Nienstead) 등 4명의 미국인이 초빙되었다. 군사교관은 보빙사에 의해 처음으로 요청되었고, 1884년 고종이 푸트공사에게 직접 요청한 적도 있었다. 그후 갑신정변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체결된 청·일 양국간의 천진조약에서 양국이 조선에서의 군사충돌을 회피하려는 방책으로 공동철수를 규정하는 한편 제3국의 군사교관에게 조선군대의 훈련을 맡기도록 합의가 이루어졌다. 더욱이 고종이 러시아교관을 초빙하려던 계획이 폭로되면서 자연스레 미국교관의 고빙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조선의 군사문제에 깊이 간여할 수 있는 특권을 조선정부 뿐 아니라 청·일 양국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국내문제로 말미암아 관심을 쏟지 못하다가 1887년에 이르러 현역이 아닌 퇴역장교라도 무방한가를 문의하였고, 이에 대해 고종은 유능한 장교라면 현역이나 퇴역에 관계없이 채용할 의사가 있으며, 수석교관 1명과 조교관 2명 총 3명의 군사교관을 후한 조건으로 고용할 계획을 아울러 통보하였다. 또한 1888년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일행이 적극적으로 미국측과 교섭을 벌인 결과 다이 등 3명의 선발을 완료하게 되었다.0242)李光麟,<美國軍事敎官의 招聘과 鍊武公院>, 앞의 책, 161∼173쪽.

 수석교관 다이는 펜실베니아주 출신으로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었다. 그는 남북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전시명예대령 혹은 준장 계급까지 승진하였으나 전쟁 후 육군의 역할이 감소되자 소령으로 자원제대하였다. 그후 그는 농업에 잠시 종사하다가 1873년부터 5년간 이집트의 터어키총독이 거느린 군대의 참모차장으로 용빙되어 아비씨니아정토전에 참전하여 부상당하기도 하였다. 1878년에 귀국한 그는 1883∼1886년간 워싱턴 콜럼비아특별지구의 시경 총경으로 근무하였으며, 조선 부임 직전에는 미연방정부 연금국의 육해군본부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다이가 직접 선발한 두 명의 조교관 중 커민스는 버지니아주 알렌산드리아출신으로 남북전쟁시 남부 연방군의 소령으로 출전하여 미시시피강 및 멕시코만 연안 방위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리는 의사로서 필라델피아방위군에 복무한 적이 있으며, 필라델피아 검시관사무소의 전속의사로 근무하다가 조선으로 고빙되어 왔다. 이들 미동부 출신자들과는 별도로 딘스모아공사의 주선으로 선발된 닌스테드는 미해군의 사병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고, 神戶주재 미국영사관 부영사 겸 통역관이란 섭외관직에 종사하고 있다가 조교관으로 발탁되었다.

 이처럼 수석교관 다이를 제외한 3명의 교관은 정규사관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장교로서 전투경험도 별로 없는 일종의 아마추어 군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조선에 수석교관 내지 조교관으로 초빙되어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들 네 명의 군사교관은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창설된 연무공원에서 근무하였다. 그들은 영어로 조선정부가 구입하였던 미제무기의 사용법, 대오편성연습, 전초전전술 등을 무관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연무공원 교육은 개시된 지 얼마 안되어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조선정부측의 대우에 불만을 느낀 일부 미국인 교관들의 직무 태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커민스와 리는 숙소의 급수시설 미비와 조선인 당번병의 부족에 대해 불평하고, 자신들과 다른 경로로 채용된 닌스테드와 반목하였으며 과음으로 직무를 게을리 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봉급마저 체불되자 조선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미국과 청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투고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다이의 동의를 얻어 1889년 9월에 조선정부 비판, 과음 및 무능 등의 이유로 조교관 커민스와 리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커민스와 리를 계약기간 만료 전에 일방적으로 해고했기 때문에 결국 딘스모아공사의 요구에 따라 이들에게 3년분 봉급과 왕복여비를 완급해 준 1891년 3월에야 퇴거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0243)柳永益,<開化期 美國人 軍事敎官 傭聘 始末>, 앞의 책, 63∼71쪽.

 그후 남은 두 명의 교관은 약 160명의 연무공원 무관과 1,200여 명에 달하는 서울 궁성수비대를 훈련시켜야 하는 과중한 업무를 떠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연무공원의 교육이나 시위대의 훈련이 체계적·효율적으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연무공원의 사관양성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시위대를 위시한 중앙군의 군사력은 질적으로 오히려 저하되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1893년말 닌스테드도 사임하게 됨에 따라 연무공원은 외견상으로만 존속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신식화폐를 주조하기 위한 전환국이 설치되고 묄렌도르프가 총판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조폐기구를 독일에 주문하는 한편 기술자의 고빙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5년 가을 크라우스(F. Kraus)·리이트(C. Riedt)·디드리히트(C. Diedricht) 등 독일인 기술자 3명이 초빙되었고, 조각과 기관기사로는 일본 조폐국 旗手 稻川彦太郞과 池田隆雄이 고용되었다. 처음에 전환국에서는 은화·동화 등 14종의 화폐를 주조할 계획이었으나 조러밀약사건으로 묄렌도르프가 총판직에서 물러남으로써 은화 1원, 동화 10문, 5문 3종만 시험적으로 주조되다가 중단되면서 이들은 해고되었다.

 그뒤 1892년 전환국 방판 안경수가 서양식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일본인 관계자만을 고빙하여 인천전환국을 출범시켰으나 업무상 분쟁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해 일본인관계자는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조폐사업은 그동안 大阪의 조폐국에서 기술을 연수해 온 조선인들이 주전 실무를 담당하였지만, 운영자금의 부족·청국의 간섭 등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0244)元裕漢,<典圜局攷>(≪歷史學報≫37, 1968), 58∼63·74∼80쪽.

 또한 정부는 미국 광산기술자를 초빙하여 광산개발을 추진함으로써 재정을 확충하려고 시도하였다. 1888년말 피어스는 주미조선공사관의 참찬관 알렌과 서기관 이하영의 주선으로 내무부 광무국의 광산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평안북도 운산금광에 풍부한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미국에서 石英臼機 10대 등 광무기기를 구입함과 아울러 5명의 광산기술자를 초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광무국은 이들 가운데 스코트(Scott)·하베이(Harvey) 두 사람만 채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주한 미국공사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지만 정부는 알렌이 단독으로 그들을 고빙하였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후 정부는 광산채굴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자 스코트 등도 해임시킴으로써 그들의 기술을 제대로 활용해 보지도 못한 채 재정만 낭비하고 말았다.0245)李培鎔, 앞의 책, 22∼25·59∼62쪽.

 한편 전신·우체·전등의 근대적 시설분야에서도 그 건설과 운용을 담당할 외국인 기술자가 초빙되었다. 먼저 1885년 청국의 화전국이 주관하였던 서로전선의 가설에는 다수의 청국 기술자가 조선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덴마크인 뮤렌스테스(H. J. Muhlensteth)가 고빙되어 왔다. 서로전선 건설 후 1886∼1888년간 그는 정부가 독자적으로 가설하였던 남로전선의 공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로전선 가설시 동문학에서 영어를 교수한 바 있는 영국인기사 핼리팩스가 勘路委員으로서 1년간 노선을 측량하는 데 관계하였다. 또 1893년 전보총국이 전우총국으로 개편될 때, 그레이트하우스가 잠시 회판외체우편사무에 임명되었다. 외교고문이었던 그가 이 직책을 맡게 된 것은 국제우편관계 때문이었다. 그밖에 1887년초 경복궁에 전등을 설치할 때 미국인 멕케이(William McKay)를 고빙하였으나 내한한 지 얼마 안되어 조선인에게 저격당하여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기 가설공사가 늦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1884년 모범농장인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하면서 1887년 영국인 재프리를 채용하였으나 그 역시 10개월 뒤에 사망하였던 것이다.0246)李光麟,≪韓國史講座 V:近代篇≫(一潮閣, 1981), 226∼232쪽.

 이상과 같이 조선정부는 외국인 고문관 및 기술자를 고빙하여 개화·자강정책과 자주외교를 효율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부국강병과 국가독립의 실현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 실패의 원인으로는 먼저 정부가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수용하거나 열강간의 상호 견제 내지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인 고문을 고빙하기도 하였지만, 청·일 양국과 구미열강이 자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대시키려는 방편으로 그들을 파견한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외국인 고문들은 자신 내지 본국, 또는 자신을 추천해 준 국가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도모함으로써 외국인고문 고빙은 정부가 의도한 본래의 목적과 달리 오히려 조선의 자주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외국인 고빙은 정치·경제·군사분야에 편중되었던 반면 국력 강화의 기초를 다지는 교육·기술분야에 소홀히 하였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교육관계 고빙인은 근대적 학문을 심도있게 교육하기보다 어학을 가르치는 데 역점을 두었고, 산업기술자는 단계적이고 무계획하게 초빙된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근대화 추진의 인적 자원 양성이나 근대산업의 기반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

 또한 조선에 초빙된 외국인 고문들은 출신과 경력, 그리고 전문성의 측면에서 제대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의 부족, 연령문제 등으로 인해 본국에서 출세할 기회를 잃었거나 청·일 양국과 이해관계에 얽혀 있었기 때문에 초빙되었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뚜렷한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고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보다 고액의 월급과 지위를 보장받고 이권을 챙기는 데 열중하였던 것이다.

 한편 1885∼1893년간 정부가 외국인 고문관들을 고빙하여 자주독립 내지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노력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있었던 청국의 방해 혹은 비협조로 좌절되기도 하였다. 특히 원세개는 조선정계내에서 개화파 내지 개화지향적인 인물들을 축출함으로써 조선의 개화활동 자체를 위축시켰으며, 청국의 추천으로 파견된 고문들을 통제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확충하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원세개가 고종폐위까지도 서슴치 않고 시도하는 정황 속에서 애초부터 외국인 고문의 고빙을 통해 자주외교와 개화정책을 원활하게 펼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였다고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점은 국가재정의 빈약으로 말미암아 정부가 장기적인 계획 아래 다수의 유능한 외국인 고문을 초빙·대우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주로 해관세 수입에 의해 외국인 고빙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지만, 조선해관은 청국해관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자유롭게 해관세를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해관세 수입마저 직원의 봉급과 외국에서 도입한 차관의 상환금 등으로 대부분 지출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부의 재정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봉급도 제때 지불받지 못한 상황에서 외국인 고문들은 업무를 충실히 이행할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고, 일부는 중도에서 해고당해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울러 정부내에 국제정세에 밝고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개화파세력이 부재했던 점도 외국인 고문의 지식과 능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김옥균·홍영식 등 급진개화파들은 살해당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청국의 후원으로 요직에 등용되었던 김홍집·김윤식 등 점진개화파 역시 반청적 입장으로 전환한 고종과 민씨척족에 의해 관직에서 배제되었던 것이다. 비록 박정양·김가진 등 소수의 개화파인사들이 개화·자강기구에 기용되었지만 근대화추진에 대한 열의나 능력도 없었던 민씨척족이 외국인 고문관과 기술자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0247)Young Ick, Lew, “American Advisers in Korea, 1885∼1894:Anatomy of Failure,” Andrew C. Nahm, ed., The United States and Korea:American- Korean Relations, 1866∼1976(Kalamazoo:The Center for Korean Studies, Western Michigan University, 1979), pp. 78∼82;李光麟, 위의 책, 232∼233쪽. 李元淳,<韓末 雇聘歐美人 綜鑑-外國人雇聘問題 硏究 序說->(≪韓國文化≫10, 1989), 304∼30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고문관은 조선의 개화·자강운동의 발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즉, 그들은 대내외적으로 조선의 자주 내지 독립의식을 선양시키는 데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교육활동을 통해 근대적 의식을 심어주고 개화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韓哲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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