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1. 개항 후의 국제무역
  • 1) 불평등조약 체계의 성립
  • (1) 일본에 의한 개항과 무관세무역

(1) 일본에 의한 개항과 무관세무역

 1876년 2월 3일(양력 2월 27일)0248)음력 1895년 11월 16일까지는 조선의 모든 공문서에 음력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이후의 모든 일자는 음력으로 표기하였다. 일본과 맺은 朝日修好條規는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국제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6개월 후인 7월 6일에 조인된 조일수호조규 부록과<朝鮮國議定諸港日本人民貿易規則>(이하,<한일무역규칙>으로 칭함), 그리고 수호조규 부록에 부속하는 왕복문서 등에 의해서 상호 밀접하게 보완되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보장해 주는 불평등조약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0249)김경태,<개항과 불평등조약관계의 구조>(≪한국근대경제사연구≫, 창작과비평사, 1994), 24∼25쪽.

 이들 각 조약의 내용 중 국제무역과 관련된 조항만 정리하면, 부산항과 차후 별도의 2개 항구 개방, 무관세무역, 일본화폐의 유통, 자유무역, 조선 연안무역의 특권 등을 들 수 있다. 첫째, 항구 추가 개방의 문제는 조일수호조규 제4관과 제5관에 규정된 것으로 ‘향후 20개월 이내에 경기·충청·전라·경상·함경 5개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두 곳을 택하여 일본국 인민의 왕래·통상을 준허한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여 조선은 1876년에 개항한 부산에 이어 1880년에 원산을, 1883년에 인천을 개항함으로써, 일본에 뒤이어 수호조규를 체결한 미국·청·영국·러시아 등 열강의 정치 경제적 침략을 허용하게 되었다.

 둘째, 무관세무역은 일본정부가 수출입세 5%를 용인할 의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측 대표의 국제법 지식의 결여로 인하여 성립된 것으로, 국제관계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가혹한 국가주권의 침탈이었다. 조선보다 앞서 서구 열강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던 일본과 청국도 비록 극도로 낮은 세율이었지만 관세의 전면적 부인에는 이르지 않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국내시장과 유치산업의 보호를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수단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한 정부재정원으로 삼을 수 있는 관세수입을 박탈당한 것이었다.0250)김경태,<개항 직후의 관세권 회복 문제>, 위의 책, 249∼254쪽.

 셋째, 일본화폐의 유통은 ‘일본국 인민은 본국에서 현행하는 화폐로써 조선국인민이 소유하고 있는 물자와 교환할 수 있으며 조선국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의 화폐로써 일본국 토산의 화물을 매득할 수 있으며 이로써 조선국이 지정한 항구들에서 인민은 상호 통용할 수 있다’(「수호조규 부록」제7관)라고 하는 조항에서 허용되었다. 이는 개항장 내에서만 허용된 것이었지만 1883년 이후 일본 제일은행이 한국의 해관세를 관리하고 조선정부가 1883년부터 당오전 등 惡貨를 발행하면서부터 일본의 은화·지폐가 조선인민의 신용을 획득하는 단서가 되었고 조선상인을 일본상인에 종속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0251)도면회,<화폐유통구조의 변화와 일본금융기관의 침투>(≪1894년농민전쟁연구≫1, 역사비평사, 1991), 235∼236쪽.

 넷째, 자유무역은 ‘양국이 이미 通好하였으니 피차 인민은 각자 임의로 무역할 수 있다. 양국 관리는 조금도 이에 干預하지 못하며 또 제한 금지하지 못한다’(「조일수호조규」제9관)라고 하여 조일무역에 대하여 조선 정부가 어떠한 간섭이나 규제도 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자유무역 규정은 통상관계를 봉건적 국가권력의 개입과 제한으로부터 이탈시켜 자유롭게 전개시킨다는 점에서 일정한 진보성을 가지고 있으나, 무관세무역 조항과 함께 면포 등 외래 상품의 무제한 유입과 쌀·콩 등 국내 곡물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함으로써 오히려 일본의 경제적인 수탈과 지배를 보장해 주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이었다.

 다섯째로, 조선 연안무역의 특권이란 ‘조선국정부나 인민이 지정된 무역항 이외의 다른 포구로 물건을 운수하려 할 때 일본국 상선을 고용할 수 있다’(<한일무역규칙>제8칙)는 조항에서 확보되었다. 문맥만으로는 일본상인이 자유롭게 연안무역을 할 수 있다고 볼 수 없지만, 일본상인들이 금융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조선상인을 고용주로 내세우고 자국 상선을 동원하여 연안무역을 할 경우 이를 저지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무역상의 불평등 조항들은 여타 편무적 영사재판권, 租界地 설정권, 연안측량권과 해도 작성권 등 정치 군사적 불평등조항들에 의하여 강력한 뒷받침을 받고 있었다. 특히 편무적 영사재판권은 조선에서 일본인이 조선국민에게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모두 일본인 관리가 심판한다는 것으로, 일본인의 범죄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1881년 하반기 부산 영사재판소 기록에 의하면 2천 명도 안 되는 거류민 중에서 형사범칙자 총수가 248명이었다. 그 중 처분된 자 36명, 기각 15명, 취하 119명, 조사 2명, 미조사 30명, 未濟 36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범칙사건의 대부분이 조선인과의 분쟁으로 보이는데 처벌된 자가 극히 적은 점으로만 보더라도 이 조항이 얼마나 불법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0252)姜德相,<李氏朝鮮開港直後に於ける朝日貿易の展開>(≪歷史學硏究≫제265호, 1962), 4쪽.

 1876년부터 무역거래가 시작되면서 위 불평등조항들로 인하여 많은 폐단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무관세무역 조항과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측의 농간으로 들어간 곡물 수출입 조항이었다. 조선측은 조선 전기 이래 미곡 수출을 금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1876년 2월의「수호조규」담판 과정에서도 일본정부가 곡물 수출입 조항을 넣으려던 것을 반대하여 철회시켰었다. 그러나 조선측의 반대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타결된 그해 7월의「한일무역규칙」제6칙은 조선용 원문과 일본용 원문에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용 원문에는 ‘이후 조선국 항구에 재류하는 일본인민은 식량용 미곡과 잡곡을 수출입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 반면, 일본측 원문에는 ‘이후 조선국 항구에서 식량용 미곡 및 잡곡도 수출입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즉, 조선측은 곡물 교역 금지의 전제 아래 인도적인 견지에서 흉년시의 개항장 재류 일본인의 식량 사정을 고려하여 곡물 수출입을 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위 조항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재류하는 일본인민’이란 자구를 삭제함으로써 수출입무역을 조선측이 허가한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0253)김경태,<개항과 미곡문제의 구조>, 앞의 책, 48∼58쪽.

 이후 곡물은 정규 무역과정 외에 밀무역을 통해서도 대량 유출되면서 국내의 곡물가격을 폭등시키고 식량 수급사정을 혼란시키기 시작하여 도시 빈민과 일반 빈농의 생활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변경 지방인 함경도의 경우 원래 경상도 지방으로부터 미곡의 공급을 받고 있었는데 개항 후 경상도 지방의 미곡이 일본으로 유출됨에 따라 농민들의 유민화가 급증하였다.

 조선정부는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일본과의 조약에 직접 저촉되지 않는 한에서 대항 조처를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개항장인 부산의 豆毛浦에 해관을 개설하여 수출입 무역에 종사하는 조선 상인에게 먼저 수세할 것을 의정하고 세목을 책정하여 1878년 8월 10일 경상도 감사 및 동래부사에게 실행을 지시하였다. 여기서 규정된 세율은 수출세 15%, 수입세 24%의 고율이었다.

 이로 인하여 수출입품의 대종을 차지하던 곡물·면포류 거래가 격감하게 되자, 부산거류 일본상인 등 2백여 명이 동래부로 가서 과세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고 일본공사 花房義質 역시 조선 정부에 대해 두모포에서의 收稅를 정지하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하겠다는 등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정부는 일본측의 위협에 굴복하여 11월 26일 당분간 수세를 정지하라는 훈령을 동래부에 내림으로써 이 사건은 약 3개월만에 일단락되었다.0254)김경태,<개항 직후의 관세권 회복 문제>, 앞의 책, 271∼286쪽.

 그러나 이 단계까지도 조선정부는 내국세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관세의 독자적인 성격과 그 의의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정부의 인식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1880년 7월 金弘集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체류기간 중 주일청국외교관 何如璋·黃遵憲과 접촉한 것,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본 견문 등으로부터 근대적 통상관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자주적 입장에서 일본측과 조약 개정 교섭을 할 수 있게 되었다.0255)이병천,<개항과 불평등조약체제의 확립>(≪경제사학≫제8집, 1984), 65∼69쪽.

 김홍집의 귀국 이후 조선정부는 1880년 12월과 1881년 9월, 그리고 조미조약 체결 직후인 1882년 5월 3차에 걸쳐 일본과 조약 개정 교섭을 추진하였는데,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무관세무역 철폐와 곡물 유출 금지 조항의 설정이었다. 그러나 개정 교섭은 일본측의 회피와 지연 술책으로 인하여 계속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며, 1882년 5월의 제3차 교섭에서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으나 이 역시 군인폭동의 발발로 인하여 무기 연기되었다.0256)김경태,<불평등조약 개정교섭과 방곡문제>, 앞의 책, 112∼145쪽.

 부진한 조약 개정 교섭에 돌파구를 열어 준 것은 1882년 4월 6일에 조인된「조미수호조규」였다.0257)≪高宗實錄≫, 고종 19년 4월 6일. 조미수호조규 체결 교섭은 청국 李鴻章이 對日 견제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에 대해 구미제국과의 조약 체결을 권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조약은 후술하듯이 최혜국대우라는 치명적인 불평등조항을 포함하지만 수출입 관세와 곡물 유출 금지 조항을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그간 부진했던 일본측과의 조약 개정 교섭을 타결짓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동「조규」제5관에 의하여 조선정부의 관세 자주권이 회복되었다. 수입품의 경우 일상 생활용품은 10% 이하, 사치품·기호품은 30% 이하, 수출품의 경우에는 일률적으로 5% 이하의 관세율이 책정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과 청국이 구미 열강에 의하여 관세 자주권을 상실한 채 수입세 5%를 유지하고 있던 것보다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어서 제8관에서는 국내에 식량난을 우려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미국 관리를 통하여 미국민의 곡물 수출을 금지할 수 있으며, 특히 인천항에서는 곡물 수출을 일체 금지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미국과의 조약 체결 과정에서 조선은 관세자주권을 회복하고 수출입관세의 설정, 곡물수출 금지 조항 등을 확보하였지만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1882년 6월 이후 더욱 불평등한 조약체계를 강제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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