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1. 개항 후의 국제무역
  • 1) 불평등조약 체계의 성립
  • (2) 청의 속방화정책과 불평등조약체계의 성립

(2) 청의 속방화정책과 불평등조약체계의 성립

 1882년 6월 5일에 발생한 군인폭동을 진압한 청국은 1882년 8월 22일「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통해 정치·경제적으로 조선을 예속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청은 종래의 전통적인 정책, 즉 ‘조선이 비록 중국의 속국이기는 하나 조선의 政敎와 禁令은 조선 스스로가 主持하도록’ 하던 정책을 버리고 궁극적으로 식민지화를 겨냥한 속방화 정책을 취한 것이다.

 무역과 관련해서만 보더라도 청국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기존의 어떤 나라보다 극심한 불평등조항을 강요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① 한성·양화진에서의 行棧(상점·창고·여관) 개설권 ② 내지통상권 ③ 연안무역권과 연안해운권 ④ 招商局輪船 항로 개설권 등이다.

 첫째, 중국 상민이 조선의 양화진과 한성에 들어와 점포를 개설할 수 있게 됨으로써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首都시장을 개방하게 되었고, 이는 그후 한성의 시전상인을 비롯한 조선상인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결과로 나타났다.

 둘째, 내지통상권은 ‘양국 상민이 피차의 내지에서 상점을 개설하지 못하고 상품 매매도 못하되, 피차의 商務委員과 지방관이 발행하는 護照(이하 여행권으로 칭함)를 받을 경우 土貨(본국 상품)를 구매할 수 있다’라는 표현대로 아직은 수출품 매매만 허용한 부분적 내지통상권에 머물고 있었지만 조만간 수출입상품 모두를 매매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어 조선 내륙의 상권을 위협하는 조항이 되었다.

 셋째, 양국 상민은 피차의 개항장에서 모든 국내외 상품을 교역할 수 있고, 出口稅만 내면 본국 상품을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운반할 수 있다고 하여 개항장과 개항장간의 연안무역 및 개항장과 미개항장간의 해운을 허용하였다. 이는 청국과 일본이 밀수무역을 자행하게 하는 보장 장치로 작용하였다.

 넷째, 당시까지 외국무역의 조선항로가 일본상선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청국은 자국의 대형 선박회사인 초상국 윤선을 상해-인천간 왕래하게 하였다.

 무역과 관련하여 이같은 불평등조항을 설정함과 아울러 청국은 영사재판권을 더욱 확대 악용하여 조선인이 피고가 된 사건일지라도 중국 상무위원이 조선관원과 공동 재판하게 함으로써 조선측의 재판권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이 체결된 1882년 7월부터 1894년 청일전쟁기까지 이러한 영사재판권이 한 번도 행사된 적이 없었다. 청국상인과 부랑아의 폭력·사기·횡포라든가, 서해안에서 자행된 청국어민의 약탈·살인·폭력, 압록강·두만강 근처 청국 비적의 약탈·방화·살인 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체포되어 재판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0258)김정기, 앞의 글, 44∼52쪽.

 이같이 심각한 불평등조항을 담고 있는 조청수륙무역장정은 다른 나라가 균점할 수 없다는 청국의 일방적 선언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만으로 그치지 않고 후술하듯이「한일무역규칙」의 개정과「조영조약」의 비준문제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침으로써 불평등조약체제의 성립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일본과의 조약 개정 교섭은 1883년 6월 시작되었는데, 조선측 교섭을 주관한 것은 조선 속방화정책의 일환으로 청국의 이홍장이 추천하여 고빙된 묄렌도르프였다. 그는 그동안 조선정부가 견지해 온 자주적 자세를 후퇴시키고 주로 일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채택하도록 함으로써 조선측 초안에 설정된 관세자주권, 수입관세 10%의 조항조차 탈락시킨 채 일본측 초안을 거의 100% 반영한 내용으로 타결시켰다.

 1883년 6월 22일 체결된「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이하「조일통상장정」으로 약칭함)에는 첫째, 조미조약에서 명시되었던 관세자주권이 부정되어 협정관세로 되었으며, 수입품은 8종으로 나누어 일본인의 생필품은 5%, 일반상품은 8∼10%, 사치품은 25∼30%, 화폐·金銀地金은 免稅로 하였고, 수출품은 면세품(화폐·금은지금)과 홍삼(15%)을 제외한 일체의 품목에 대해 5%로 하였다. 이와 아울러 조청장정과 조미조약에서 인정되었던 내지관세권이 완전히 부정되었다.

 둘째, 조미조약과 조청장정에서 부분적으로 승인되었던 연안해운권과 연안무역권이 통합 승인되었다.

 셋째, 조미조약에서 승인된 최혜국대우 조항이 삽입되었다. 이는 ‘현재 또는 장래 조선정부가 어떠한 권리 특전 및 惠政恩遇를 막론하고 타국 관민에게 제공하는 것이 있으면 일본 관민도 즉시 일체 이를 균점할 수 있다’(제42관)라고 하여 차후 조선정부가 열강에게 허용하는 어떠한 이권이 있을지라도 일본 역시 이와 유사한 이권을 양여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곡물 수출 금지조항이 포함되었으나 조미조약에서와는 달리 방곡 시행 1개월 전에 반드시 지방관이 일본영사관에 알려야 한다는 단서 조항을 두었을 뿐 아니라, 인천항에서의 곡물 수출 금지권도 폐지하였다.0259)이병천, 앞의 글, 82∼87쪽.

 일본과의 조약에서는 조미조약에서 획득하였던 조선측의 관세 자주권이 침해되었고, 조청장정에서 인정되었던 내지관세권 역시 부정되었다. 조선측이 획득한 유일한 성과는 1880년 이래 견지해 왔던 곡물 수출 금지 조항의 설정과 수출입 관세 설정이 제한된 형태로 관철된 것 뿐이었다. 일본으로서는 1876년 이래 줄곧 추구해 온 특권을 거의 대부분 획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영국은 이러한 불평등조항들을 완성된 형태로 성립시켰다. 영국은 1882년 4월 조미조약과 거의 동일한 내용의「조영수호조규」을 체결하였지만 비준을 계속 연기하고 있다가 조청장정 체결 이후 이와 대등한 조건의 조약을 요구하는 입장으로 변화하였다. 주일영국공사 파아크스(Harry. S. Parkes)는 1883년 5월경부터 조선이 체결한 조청장정과 영국이 청국·일본과 체결한 조약의 내용을 분석하고 1883년 타결된 조일통상장정까지 고려하여 영국의 이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조약 초안을 새로 작성하였다.

 교섭에 임한 조선측 대표는 영국측 초안을 거의 전적으로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0260)조약 교섭 당시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는 내지통상·연안무역·연안해운에 대해 강력한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사재판권에 대해서도 쌍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묄렌도르프 및 민씨 척족과의 대립이 격화되는 속에서 조약 체결 직전 권력 요직에서 밀려남으로써 조영조약 체결에 그들의 입장을 반영시킬 수 없었다. 1883년 10월 27일에 체결된「조영수호통상조약」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라는 파아크스의 말대로 영국측 입장에서 최선의 것인 반면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최악의 내용으로 되었다.

 첫째, 관세율은 수출세 5%, 수입세 7.5%를 기본으로 하는 협정관세로 되었고 관세 이외의 내지과세를 일체 부정하였다. 특히 수입 대종품목인 면제품은 조일통상장정의 8%에서 7.5%로 인하되었다.

 둘째, 부산·원산·인천 세 항구와 함께 조청장정에서 청국의 독점으로 규정해 놓았던 한성·양화진의 개방이 영국에도 허용되었을 뿐 아니라 거류지 밖 4km까지 외국인에 의한 토지·가옥의 임차·구매권을 규정함으로써 개항장의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셋째, 거류지에서 40km 이내를 여행권 없이 여행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는 이보다 앞서 1882년 군인폭동 이후 조선과 일본이 제물포에서 체결한「조일수호조규속약」에서 규정된 것을 균점한 것이었다. 또 수출품 구매의 경우에 대해서만 청국에 독점적으로 인정했던 내지통상권을 구매·판매에 대해 모두 인정하였다. 게다가 내지통상시 여행권의 발급권자는 영국영사이고 조선지방관은 부서 또는 날인만 하게끔 되었다.

 넷째, 조일통상장정에서 인정되었던 연안무역권과 연안해운권이 역시 균점되었다. 특히 조선정부 또는 조선상인의 명의로 영국상선을 임차하여 조선국내 미개항장에 상품이나 승객을 수송할 수 있다고 하여 미개항장으로의 침투 여지도 열어 놓았다.

 이외에도 영사재판권과 최혜국대우가 조일통상장정과 마찬가지로 규정됨으로써 위 조영수호통상조약은 불평등조약의 완결판이 되었으며, 조선이 이후 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 등 서구열강과 체결한 조약들은 모두 이 조약을 원형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미국·청국도 최혜국대우 조항에 의하여 조선이 영국에 부여한 특권을 동일하게 균점하게 되었다.0261)이병천, 앞의 글, 88∼101쪽.

 불평등조약에 의하여 자본주의 열강이 탈취한 제특권, 통상항의 개방, 거류지의 설치, 저율의 협정관세, 내지통상권, 연안무역권과 연안해운권, 관세를 제외한 일체의 내지과세·연안과세의 면제, 치외법권, 최혜국대우 등은 이제 조선을 이들 열강의 공업제품의 판매시장과 식량·원료 공급지로 재편하기 위한 기초 조건으로 되었으며 조선의 민족 산업 발전에 중대한 장애로 작용하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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