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1. 개항 후의 국제무역
  • 3) 외국 상인의 침투와 조선 상인층의 대응
  • (2) 청·일 경쟁무역기(1883∼1894)

가. 청국상인의 침투

 1882년 군인폭동을 전후하여 미국·청·영국 등 여러 국가와 수교함에 따라 일본의 독점무역은 종말을 고했지만, 이들 불평등조약으로 인하여 외국상인의 조선 침투는 더욱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즉 1883년의「신조영조약」에 의하여 연안무역권과 연안해운권이 확보된 데다가 한성과 양화진이 개방되었고, 조계지 밖 사방 40km까지 활동범위가 넓어졌다. 조선정부가 발행하는 여행권을 지니고 내륙지방까지 들어가 통상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조선은 열강의 상품시장으로서 한성에서 벽촌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개방되었다. 이어서 1884년 8월 18일 일본측의 요구로 용산도 개시장으로 개방됨으로써0303)≪高宗實錄≫, 고종 21년 8월 18일. 외국상인, 그 중에서도 청·일 상인의 한성 開棧과 내지통상이 시작되었다.

 한성 개잔과 내지통상이 허용된 것은 조선 상인층에게 엄청난 위협이 되었다. 한성 개잔은 조선에서 가장 거대한 소비도시인 한성의 상권을 청·일 상인이 잠식해 들어오는 결과를 낳아 시전상인·공인 등 기존의 상인층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내지통상은 이보다 더 파괴적이었다. 위<그림 1>의 개항장객주의 개입과정을 배제하여 수출입 무역기구 지배권을 외국상인이 직접 장악할 수 있게 하였고 개항장과 내지 사이 상품 매매가격의 차이를 외국상인이 직접 흡수할 수 있게 하였다. 나아가서 개항장에 들어오는 조선상인을 상대로 해서만 상품을 매매해야 한다는 제한에서 벗어나 시장 규모를 확대시킴으로써 수입품 판매에 주력하던 외국상인에게 상권 확대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0304)이병천,<개항기 외국상인의 내지상권 침입>(≪경제사학≫제9호, 경제사학회, 1985), 296∼300쪽.

 청국은 1883년 9월 이후 치외법권이 인정된 총영사격인 總辦朝鮮商務委員으로 陳樹棠을 파견하고 인천·부산·원산 등 각 개항장에 상무위원 분서를 두고 상무관을 주재시켜 청상의 상업 지원을 하는 한편 영사 업무와 청국 단독 조계지 설정 등을 추진하였다. 1885년 10월에는 진수당을 소환하고, 조선사정에 정통한 袁世凱를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 및 외교와 상무를 감독하게 하였다.

 이후 갑신정변 때 피난갔던 청상들이 다시 도래하기 시작하였다. 1885년 10월 수십 명에 불과하던 청상이 몇 년 사이에 6백여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그들은 당시 인구 25만 명의 대소비도시 한성을 주요 목표로 그 관문인 인천항을 거점으로 경인지역 일대에 세력을 확장시켰다. 이어서 원산·부산으로 뻗쳐 나갔고, 점차 내지통상에 주력하여 농촌장시에 침투하여 상권을 확대시켜 나갔다.

 청상의 진출은 다음<표 6>과<표 7>에서 보다시피 한성과 인천을 중심으로 하여 특히 1880년대 후반 이후 급증하여 일본상인을 압도하는 추세였다.<표 6>은 상인 외에 관리나 고용인, 기타 가족들도 포함되었겠지만 절대 수치만으로 볼 때에도 한성과 인천에서 청국 거류민의 증가가 급속도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 8 9 0 년 1 8 9 1 년
부 산 원 산 인 천 한 성 합 계 부 산 원산 인 천 한 성 합 계
일 본 4,644 1,387 2,650 770 9,451 5,255   2,330 1,000 8,585
164 86 967 1,480 2,697 138   550 1,300 1,988

<표 6>1890∼1891년 일·청 양국거류민수

*출전:한우근,≪한국개항기 상업연구≫, 58쪽.

  한 성 인 천 원 산 부 산 합 계
상인 상점 상인 상점 상인 상점 상인 상점 상인 상점
1883 99 19 54 8 10   20   183 27
1884 352 48 235   13   10 3 610 51
1885 111 25 50   13 13     174 38
1886   14 205   12 12 28   245 26
1887                    
1888                    
1889 600 80             600 80
1890 625 100             625 100
1891 751   563       138   1,452  
1892 957   637   63   148   1,805  
1893 1,254 142 711   75 10 142   2,182 152

<표 7>청국 상인의 개항장·개시장 진출상황

*출전:김정기,<1890년 서울상인의 철시동맹파업과 시위투쟁>(≪한국사연구≫67, 한국사연구회, 1989), 86쪽.

 청상은 막강한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고 월등한 자금력과 상거래방식, 특유의 단결력과 근검절약, 전신을 이용한 신속한 정보망 등을 바탕으로 수입품의 판매권을 장악해 가고 일본 잡화도 취급하여 일본상인을 압도하고 조선상인의 상권을 침탈하였다. 인천항의 廣東 상인 同順泰와 山東 상인 瑞盛泰, 雙盛泰 등의 무역상은 모두 수 명에서 수십 명의 상인이 합자한 상업조직이었다. 가장 규모가 큰 동순태는 200∼300만 냥의 대자본을 소유하고 그밖의 소상인 조직도 5∼6만 냥 이상의 자본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 풍부한 자본으로 수입면제품을 영국이나 상해에서 다량으로 값싸게 구입할 뿐 아니라 여러 지역에 회관을 설치하고 내외 각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함으로써 상호 금융 및 상품 운반의 편의를 도모하고 판매가격을 담합하여 상호경쟁을 피하였다.0305)나애자,<개항후 외국상인의 침투와 조선상인의 대응>(≪1894년농민전쟁연구≫1, 역사비평사, 1991), 193쪽.

 급속한 속도로 증가한 청상은 일상과 함께 한성 육의전의 판매 독점권을 붕괴시켰고, 부수적으로 인천 개항장객주의 한성 진출을 차단시켜 버렸다. 특히 개항 이전부터 금건과 한냉사 등 영국제 면포를 독점판매하고 있었던 白木廛이나 청국제 견직물을 독점하고 있던 立廛이 그 지위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육의전 외에도 한성 전역 장터에서 노점상을 펼쳐 1891년 12월 현재 청국 노점상이 100여 개를 헤아릴 정도로 늘어났다. 아울러 한성 내외 주민에게 일용품을 공급하는 일일시장으로 남대문과 동대문에서 열리는 朝市에까지 침투하여 한성 소상인들의 생계를 위협하기까지 하였다.0306)김정기, 앞의 글, 91∼93쪽.

 또 청상은 연안해운권을 근거로 자국 선박으로 개항장간을 다니며 연안무역에 종사하였고, 조선인의 명의를 빌어 자신들의 선박에 조선국기를 매달고 개항되지 않은 포구로 침투하는 경우도 많았다.0307)나애자, 앞의 글, 188쪽. 특히 평안·황해도 연안의 미개항지에서 청상의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청상의 배를 통한 밀무역에는 또한 약탈과 폭거가 수반되게 마련이었다. 1885년 11월 木花·雜物·鉛塊 등을 싣고 황해도 長連에서 甕津으로 가던 조선상인이 해적으로 보이는 청인들에게 약탈당한 것이나, 심지어는 인천 해관에서도 화물 검사를 거부하고 巡監을 구타하며 해관에 난입하여 집기를 파괴하는 일까지 있었다. 청상은 綿布·白木·銀子·甘藷 등을 수입해 와서 조선의 우피·인삼·쌀·콩·어물 등을 수출해 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0308)한우근, 앞의 책, 68∼75쪽.

 청상은 한성에서의 개잔, 밀무역 외에도 내지통상을 통해 조선 상인층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청상의 내지통상은 다음<표 8>에서 보듯이 1889년부터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원세개는 1890년 조선정부에 여행권을 수시로 청구 발급받는 것이 불편하다고 한꺼번에 2백 장을 발급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는 이 요청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이후 여행권을 20장씩 ‘空名護照’ 형식으로 발급해 주었다.

  청 상 일 상
  한성 인천 원산 불명 합계 한성 인천 부산 원산 합계
1884 5 2   20 27(15)          
1885 2 3   19 24(21)   1     1
1886         (12)   9     9
1887     5   5(29)   69(59)   29 98
1888       20 20(51)   76   88 164
1889 58 10   11 79   102   119 221
1890 71 14 5   90(11)   101   126 227
1891 31 30 10 20 91 30 46   71 147
1892 40 20     60 43 39   44 126
1893 33 40     73 81 88   67 236
1894 40       40 50 93 72(52) 34 249

<표 8>연도별 청·일 양국상인 내지여행권 발급 추이

*출전:이병천,<개항기 외국상인의 내지상권 침입>(≪경제사학≫제9호, 경제사학회, 1985), 301, 307쪽.
*주:청상의 경우 1889년과 1891년의 ‘불명’수치는 한성과 인천 양 지역을 모두 포함하는 수치이다. 또, 1892∼1894년간 여행권 발급 숫자가 1889∼1891년보다 적게 나타난 것은 통계자료상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그런데 청상 내지통상자를 위의 여행권 발급 숫자에 의해서만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 외에도 여행권을 소지하지 않은 불법행상자가 상당히 많았다. 이들은 주로 배를 통해 황해도·평안도에 들어온 밀입국자로서 여행권 소지자와 마찬가지로 조선 내륙 어디에서든 자유로이 활동하였다. 1889년 개성에서 활동하고 있던 청상 43명에 대한 조사 결과 여행권 없는 불법 행상자가 25명이나 되었던 사실이나, 竹山 白巖里 場市에서 조선상인들을 칼로 난자한 청상 3명이 모두 불법행상자였다는 사실 등이 이를 말해 준다.

 청상은 이처럼 유리한 조건에서 한성 시장에서 수입품의 상권을 장악하고 적극적으로 내지행상을 확대하여 1893년 말에 이르면 다음과 같이 경기·충청·전라지역 상업 중심지에서 조선상인의 상권을 위협하였고 불법적인 내지 定住상업도 전개하였다.

 어떠한 벽촌이더라도 장날에 청상이 오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다. 공주·강경·예산 등의 시장에는 어느 곳이든지 20∼30인의 來住者가 있다. 대부분은 장날을 순회하는 賤商이지만 공주·강경·예산 등에는 상당한 상인이 들어와 있어 아주 큰 거래를 한다고 한다. … 종래 안성시에는 수원 상인이 대체로 외국품을 인천에서 구입 판매하였다. 이들 상인이 백 명이나 있었지만 근래 청상이 다수 장날에 오기 때문에 상권을 점차 탈취당해 최근 폐업하는 자가 많다는 것으로도 그 일면을 알 수 있다. 공주·강경은 모두 가옥을 소유하고 점포를 열었으며 전라도 전주는 30인 정도의 청상이 들어가 각지의 장날에는 이들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다.0309)≪通商彙纂≫第1號,<京畿道及忠淸道地方商況幷ニ農況視察報告>(京城, 명치 26년 10월 21일)(여강출판사 영인본), 61∼62쪽.

 청상은 조선산 상품을 살 때 물건값과 운송비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거나 무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조선 행상의 물건이나 좌판 등을 약탈하려다가 저항을 받으면 칼을 휘둘러 위협하는 등의 횡포를 저지르곤 하였다. 또 내륙지방을 떼지어 다니면서 조선 행상을 구타하고 이를 단속하는 조선 관리들을 욕보이고 관의 명령을 무시하여 조선인의 반감을 샀다.

 그러나 한성 이남의 경기 및 충청 지방에 비해 한성 이북의 중부 지방은 개성상인의 유통지배권이 강고하였기 때문에 청상이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하였다. 또한 청상이 내륙지방의 상업 중심지에 침투하였다고 하더라도, 포구나 장시 어느 곳에서나 현지 객주의 중개를 통하지 않고는 상품 매매를 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청상(일본상인도 마찬가지)의 내지활동이 객주의 중개에 의존하는 동안은 적어도 위탁매매에 관한 한 청상의 내지통상은 현지 객주의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0310)이병천, 앞의 글, 303∼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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