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3. 방곡령실시의 사례와 원인
  • 1) 제1기(1876∼1884)

1) 제1기(1876∼1884)

 <표 1>은 각종 사료에 산견되는 이 시기(1876∼1884) 防穀令의 사례를 정리한 것이다. 이 중 ①의 방곡으로 말미암아 충청·황해·강원 감사가 문책을 받고 있는 것과 ⑧의 경우 京畿·海西·三南地方에 방곡이 발생하여 정부가 禁飭을 내리는 것으로 미루어 ①에서 3건, ⑧의 삼남의 충청·전라·경상 각도에서 각 1건씩만 일어났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적어도 14건 이상이 발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각 지방관의 방곡으로 정부에서 논란이 된 것은 ①④⑤⑧의 경우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우선 전국적으로 흉작이었던 시기라는 점이다. 또, 방곡으로 말미암은 곡물유통의 장애로 서울의 곡가가 등귀하기 때문에 정부가 방곡의 철폐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 한 예로 ④의 1882년 정부가 지방관의 방곡을 금했던 경우를 보면

의정부에서 계를 올렸다. 경기도 내의 농작이 흉작을 면치 못해 都下의 시가가 점점 올라 작은 근심거리가 아닙니다. 근래 들으니 外道에 빈번히 防穀하는 바람에〔곡물:필자〕판매의 길이 두절된다 합니다 … 각도 관찰사에게 영을 내려 管下 각읍에 엄히 삼가하게 하고〔판매를:필자〕허가하면 유통에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 왕이 윤허했다.0352)≪日省錄≫, 고종 19년 10월 12일조;“命外道防穀嚴飭無碍流通:議政府啓言 畿內農形 未免歉荒 都下市直 漸就騰踊 誠非細憂 近聞外道輒多防穀 以致販買之路絶 … 令各該道臣 嚴飭管下各邑 許卽無碍流通 … 允之.”

라고 하여 흉작으로 서울의 곡가가 오르는데 각 지방관이 방곡을 하여 곡물의 販買之路가 막힌다고 하며 철폐를 지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각 지방관에 대한 정부의 방곡금지의 지시는 개항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의 방곡령이 국내의 곡물수급구조내에서 발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①의 경우는 대일관계에서 지방관이 방곡령을 발령했다기보다는 대부분 종래의 유통구조내에서 발령한 것으로 보인다. 즉, 1876년과 1877년은 개항직후로 일본상인의 진출이 급격하지도 않았고, 국내의 대흉작으로 말미암아 일본으로의 곡물수출이 거의 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곡물이 수입되고 있었으므로,0353)≪日省錄≫, 고종 15년 5월 27일조;“德源府使文川郡守與日本船長問答記 … 我曰 … 故昨年我國歲飢 貴國米幾萬石 自萊館出來 …”. 이 경우의 방곡령은 국내 유통구조내에서 발생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충청도 지역의 방곡은 다소 사정이 다르다고 본다. 1876년 방곡의 실시로 문책을 받던 충청감사 趙秉式은 연해의 방곡실시는 ‘潛輸之弊’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0354)≪日省錄≫, 고종 13년 10월 16일조;“疏略曰 以遏糴事 至承問備之典 臣之罪益著矣 盖沿海防穀 欲察潛輸之弊 以濟難食之患 區區愚淺 非私伊公 自有廟飭 隨帖許貿 初無防遏 之於守宰之恣意壅遏 京商之徒手空歸 以臣昏謬不能周察 不憚朝飭 闕罪何居.” 이 해에 정부가 왜선의 潛賣를 막으라고 충청도에 지시하던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0355)≪忠淸兵營關子謄錄≫1책, 丙子 9월 30일조. 조병식이 막으려던 ‘잠수지폐’에 일본으로의 곡물유출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④⑤⑧의 각 지방관의 방곡은 이미 살핀대로 이 단계에서는 부산항을 중심으로 곡물의 대일유출이 증가되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부산항 중심의 새로운 곡물유통권에 포함된 경상·전라·충청·강원 지방에서는 이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사례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①④⑤⑧의 방곡은 종래의 곡물유통권과 개항장 중심의 새로운 유통권이 대립하는 가운데 양자 모두를 대상으로 지방관이 실시했고 전자가 보다 우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번호 발생년월 발 령 자 발생지역 내 용 비 고(出典)
1876. 9∼10
1877. 2∼3
(음력)
各地方官 各地方 政府가 防穀禁飭
내림. 忠淸·黃海
江原 監司문책.
≪日省錄≫, 高宗 13年
9月 2日, 10月 6日, 10月
16日, 10月 20日, 14年
2月 20日, 3月 6日
1880. 5
(양력)
慶尙道地方官 慶尙道 釜山日本領事항의 ≪通商彙編≫, 明治 14年
釜山港之部
1881. 5∼6
(양력)
慶尙監司
各邑守令
경상도 각지 在釜山 日本領事
항의·철폐
위와 같음
1882. 10
(음력)
各 地方官 各地方 政府의 防穀禁飭 ≪日省錄≫, 高宗 19年
10月 12日
1883. 10
(음력)
各 地方官 各地方 政府의 防穀禁飭 ≪日省錄≫, 高宗 20年
10月 27日
1884. 4
(음력)
黃海道 鳳山
·長淵府使
鳳山·長淵
200石 執留
大同商會 地租
甲申 4月 23日
≪八道四都三港日記≫
1884. 7
(양력)
德源府使 元山 都賈潛賣금지·
日本公使 항의
≪日案≫, 高宗 21年
閏 5月 19·20日
1884. 9
(음력)
各 地方官 京畿·海西·三南 政府의 防穀禁飭 ≪日省錄≫, 高宗 21年
9月 19日

<표 1>1876∼1884年의 防穀令 發生事例

*비고:①④⑤⑧은 防穀의 발생으로 政府內에서 논란이 있던 年月이다.

 ⑥의 1884년 황해도 鳳山과 長淵의 방곡은 그 대상이 大同商會이다. 1883년 평안도상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동상회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근대적 기업체라고 하지만,0356)韓㳓劤, 앞의 책, 220∼223쪽. 1884년에는 거의 수출입무역에 종사하지 않았다.0357)≪通商彙編≫, 仁川港之部, 명치 18년, 351쪽. 더구나 地租 200석을 운반하다가 이 지방의 방곡령에 걸려 곡물을 운반정지 당한 것으로 미루어0358)≪八道四都三港口日記≫1冊, 甲申 4월 23일 關鳳山府·長淵府條;“… 大同商會社報稱 該商會社所貿 本郡地租二百石 現爲該地方防穀 至於執留云 ….” 이 방곡령은 곡물수출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② ③의 경상도 방곡령 때는 각 읍 수령이 境內의 방곡을 실시하고 감영에서는 관리를 보내어 東萊 부근에서 곡물을 執留했다. 1881년 부산항주재 일본영사 近藤眞鋤는 외무대신 井上馨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달(양력 1881년 5월) 중순부터 조선인이 본 항으로 수송한 米穀이 점차 감소하고 하순에 이르러 거의 穀路가 杜絶되는 양상이 나타나기에 探偵하여 보니 梁山·九浦·金海 등의 지방에 大邱官吏가 출장하여 輸穀을 差留하고 있었다. 작년도 이 때쯤 되어서 같은 폐해를 받고 자못 곤란했는데, 전철을 밟고 있다.0359)≪通商彙編≫, 明治 14년, 釜山港之部, 제56호 大丘官吏輸穀差留候義ニ付東萊府使卜照會ノ始末上申, 132쪽.

 그래서 5월 23일 일본영사는 동래부사 金善根에게 현재의 미곡유출 저지사건은 양국간에 미협정된 것이어서 관리의 독단으로 개항장으로의 곡물유통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항의했다.0360)같은 책, 別紙 甲號(近藤→金善根), 133쪽. 이에 대하여 김선근은 양식이 궁핍한 때 각영 각읍에서 백성을 위해 지방관이 방곡을 시행하는 것은 상례라고 했다.0361)같은 책, 別紙 乙號(金善根→近藤), 133쪽. 그러나 일본영사는 방곡은 바로 곡물수출을 금하는 것이라 하고 양국상민의 무역을 관리가 막을 수 없다는<丙子修好條規>제9관을 들어 반박하며 1880년 5월경(음력 4월)의 방곡에 대해 언급한 후 大邱官吏의 穀物執留를 철폐하라고 주장했다.0362)같은 책, 別紙 丙號(近藤→金善根), 133∼134쪽. 그러자 김선근은 대구관리의 執穀은 ‘세곡의 횡령을 막으려는 것(稅穀防奸)’으로 商路를 막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며,0363)같은 책, 別紙 丁號(金善根→近藤), 134쪽. 대구의 감영에서는 항의에 따라 관리들이 철수했다.0364)같은 책, 別紙 庚號(金善根→近藤), 135쪽. 이 시기 빈번하던 세곡의 潛賣를 상기하면 ②③의 방곡령에는 文面대로 세곡의 부정유출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보이며, 일본영사가 언급한대로 개항장으로의 곡물유출을 저지하려는 의도도 개재되었을 것이다.

 함경도 元山에서 발령된 1884년 ⑦의 방곡령은 ‘都賈潛商’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즉, 德源府使 鄭顯奭은 각 사(社:地方行政區域의 하나)에 낸 傳令에서 부랑무뢰가 饒戶의 돈으로 外村에서 곡물을 매점하여 利를 꾀하므로 조선인과 일본상인이 장시에서 곡물을 구입하지 못하게 되어 도고잠상을 금한다고 했다.0365)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編,≪舊韓國外交文書≫1(≪日案≫1);고종 21년 閏 5월 19일조(이하≪日案≫으로 함);“前日德源府使 傳令於各社 以米粟豆太多出於邑部元山場市 然後我民與日本商民 可以分買均利 而近或有浮浪無賴輩 多持饒戶之錢 都賈穀物於外村 輸出他境 爲專利之計 使我民與彼商不得買取於場市 都賈潛商 邦禁至嚴云云.” 그러나 日本署理公使 시마무라(嶋村久)는 이에 항의하여 10∼20석의 곡물을 구입하는 것도 都賈라고 하여 막으니 일본상인이 곡물을 매입하지 못한다고 철폐를 주장했다.0366)위와 같음. 이에 정부는 덕원부사에게 철폐를 지시하는 한편,0367)≪八道四都三港口日記≫1책, 甲申 閏 5월 22일 關德源府使;甲申 閏 5월 27일 關德源府使. 미개항장에서의 밀무역은 엄금하라 하며 이를 일본서리공사에게 통보했다.0368)≪日案≫, 고종 21년 윤 5월 19일조. 덕원부사의 傳令에는 도고잠상을 막는다고 하나 소량의 곡물매입까지 금지한 것과 일본공사가 항의한 것으로 미루어 원산항에서의 일본상인에 의한 곡물유출의 저지라는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방곡사건의 발단은 饒戶의 곡물매집이다. 요호, 즉 부농의 자금으로 부랑무뢰배, 곧 곡물상인들이 都賈행위와 무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조선 후기부터 계절적·지역적 곡가의 차이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던 지주·부농·곡물상인들이 개항장이라는 대규모의 곡물시장이 출현하면서 이를 대상으로 곡물의 상품화를 주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곡가의 등귀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이에 따른 빈농이나 무전농민의 반발은 결국 지방관의 방곡시행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이 시기의 방곡령은 크게 나누어 종래의 곡물유통구조내에서 발생된 경우와 개항장으로의 곡물반출이나 왜선의 잠매행위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실시한 것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전자가 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서도 그 대상은 조선의 곡물상인이었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876년 8월의<朝日通商章程>에 의하면 일본상인의 곡물유출을 제한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 1884년까지 일본상인의 개항장 이외 행상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산지에서 개항장에 이르는 유통과정에 직접 개입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 시기(1876∼1884)의 방곡령은 그 직접적 대상이 일본상인이 아니라 조선의 곡물상인일 수 밖에 없었다.

 실시의 원인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우선 무곡으로 부를 축적하던 부농이나 곡물상인들이 곡물을 매집 또는 유출하여 곡가등귀를 유발하고 이 때문에 지방관이 境內의 곡가안정을 위하여 실시하는, 종래의 국내 곡물유통과정에서 흔히 보는 경우로 이 시기 대개의 방곡령은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1884년 덕원부사가 곡물상인의 도고행위을 막은 것도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개항장으로의 곡물유출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1876년 충청감사 조병식의 방곡령에서 보이는 곡물의 밀무역을 막기 위한 것, 1880·1881년 경상도지역에서 개항장으로의 세곡의 부정유출을 막기 위한 것, 1884년 덕원부사의 방곡령에 내재된 원산항으로의 곡물유출을 막으려는 의도가 그러하다. 그리하여 후기로 갈수록 재래의 곡물유통권과 개항장 중심의 새로운 유통권이 대립하는 가운데 곡물의 대일유출을 저지하기 위한 방곡령의 실시도 빈번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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