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4. 사회신분제의 동요
  • 3) 양반 신분의 동향
  • (1) 양반 호구의 변화

(1) 양반 호구의 변화

 영조 26년(1750) 知敦寧府事 李宗城은 왕에게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서울이나 외방의 士庶는 큰 부자나 녹을 먹는 사람 이외에는 대체로 궁핍한 사람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양반이 가장 많고 또 가장 가난합니다. 士夫의 公卿 자손과 鄕人의 校生 이상을 통칭 양반이라고 하는데, 그 수효는 거의 모든 백성의 반절이 넘습니다.0475)≪英祖實錄≫71, 英祖 26년 6월 癸巳.

 이처럼 지배신분인 양반의 수효가 여타 신분보다 많아지는 이른바 역계층화 현상은 조선 후기 신분구조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신분제 동요 현상에 관한 주된 근거로서 흔히 설정된다. 양반 신분에 해당하는 호구의 수가 조선 후기 동안 계속 증가하였다는 사실은 호적 연구에 의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표 4>는 각 지역별 호적 연구에 의해 양반 신분으로 파악된 호구의 전체에 대한 구성비를 개관할 수 있도록 한 데 모아 정리한 것이다.

  年 度 人 口 地 域 硏 究 者 備 考
1606   13.75 山 陰 盧 鎭 英
1606 48.33 18.15 丹 城 韓 基 範
1609   2.5 蔚 山 韓 榮 國
1630   15.85 山 陰 盧 鎭 英
1663 16.6   서 울 Wagner
1672 14.2   金 化 Shin
1678   5.6 丹 城 金 泳 謨 職·準
1678 13.6   丹 城 李 俊 九
1684 5.1   蔚 山 金 泳 謨 職·準
1690 9.2 7.4 大 邱 四 方 博
1711 29.1   彦 陽 朴 容 淑 形·準
1717 19.9 12.8 丹 城 朴 容 淑
1717 19.1   丹 城 李 俊 九
1720   8.0 丹 城 金 泳 謨 職·準
1729 26.29 19.39 蔚 山 鄭 奭 鍾
(16) 1729 14.48   蔚 山 Somerville 職·鄕班
(17) 1732   10.0 丹 城 金 泳 謨 職·準
(18) 1732 18.7 14.8 大 邱 四 方 博
(19) 1738 30.1   尙 州 金 容 燮
(20) 1753 19.79   蔚 山 Somerville 職·鄕班
(21) 1759   9.7 丹 城 金 泳 謨 職·準
(22) 1759 24.4   丹 城 李 俊 九
(23) 1765 23.45   蔚 山 Somerville 職·鄕班
(24) 1765 40.98 32.11 蔚 山 鄭 奭 鍾
(25) 1771 16.4   蔚 山 金 泳 謨 職·準
(26) 1783 37.5 31.9 大 邱 四 方 博
(27) 1786 32.2 23.4 丹 城 朴 容 淑
(28) 1786   14.3 丹 城 金 泳 謨 職·準
(29) 1786 31.4   丹 城 李 俊 九
(30) 1798 68.3   彦 陽 朴 容 淑 形·準
(31) 1804 35.8   蔚 山 Somerville 職·鄕班
(32) 1804 53.47 43.67 蔚 山 鄭 奭 鍾
(33) 1825   38.6 鎭 海 武田幸男 職·準·男丁
(34) 1825   32.6 鎭 海 武田幸男 職·準·男丁 東面
(35) 1825 57.1 42.1 丹 城 井上和枝 職·準·男丁
(36) 1858 70.3 48.6 大 邱 四 方 博
(37) 1861 84.4   彦 陽 朴 容 淑 形·準
(38) 1867 65.48 67.07 蔚 山 鄭 奭 鍾
(39) 1876   36.9 鎭 海 武田幸男 職·準·男丁 東面
(40) 1882 83.4 65.8 丹 城 井上和枝 職·男丁
(41) 1885 38.6   蔚 山 金 泳 謨 職·準

<표 4>朝鮮後期 兩班身分戶口構成比의 變化:槪觀 (단위:%)

*연도, 지역 및 연구자 배열은<표 1>과 같음.<표 1>에 있는 비고란의 面地域 표시는 대개 동일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였음.
**비고란에서 ‘職’은 ‘職役表記’, ‘形’은 ‘記載形式’의 줄임이며 분류기준임. ‘準’은 ‘準兩班’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임.

 이 표의 형태는 노비 호구에 관한 앞의<표 1>과 동일하지만, 노비의 경우 그 범주의 획정이 단순하고 호적상에도 대개 분명하게 나타나므로 연구자들 간에 상위함이 거의 없음에 비해, 양반 신분에 대한 파악방식은 다양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표 4>의 비고란을 보아도 대개 짐작할 수 있듯이 호적에서 양반 신분을 판별해 내는 기준이 연구자들 간에 통일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우선 판별 기준이 기재형식인가 아니면 직역표기인가 또는 이 둘을 혼용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가 그 하나이고, 직역표기를 분류기준으로 사용할 경우 양반 직역의 범주에 관한 견해 차이가 그 둘이며, ‘준양반’을 구별되는 하나의 범주로 독립시킬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가 그 셋이다.<표 4>에 나타나 있는 통계치에는 이러한 연구자 간의 견해 차이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단적인 예로서<표 4>의 (27)(28)(29)는 동일 호적대장을 자료로 삼아 양반 호구를 추출한 것이지만 세 연구자가 적용한 기준이 상이하기 때문에 그 구성비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통계치만 가지고 시기별 추이 분석이나 지역간 비교를 정확히 행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다시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까지 감안한다면 이들 지역별 통계치를 단순 비교하여 어떤 결론을 내리기에는 난점이 있다. 그러므로<표 4>는 이를 통해 양반 호구의 추이에 관한 개략적인 정보를 얻는 정도로 그 의미가 제한된다.

 이러한 전제 아래<표 4>를 보면, ②의 경우와 한 번만 조사된 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역 사례에서 兩班戶 및 兩班人口가 시간이 갈수록 증가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증가 경향은 大邱(⑩(18)(26)(36))와 彦陽(⑪(30)(37))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구 지역의 양반호는 17세기 말의 9.2%에서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대략 50년마다 倍增하여 1858년에 이르면 전체의 70.3%를 점유하는 것으로 파악되어 있다. 언양의 양반호(준양반 포함)도 1711년과 1798년 사이에 2배 이상 구성비가 높아지고 다시 1861년에 이르면 전체의 84.4%라는 압도적인 구성비를 기록하고 있다.

 이리하여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兩班戶의 전체에 대한 구성비가 지역별로 70.3%(大邱), 84.4%(彦陽), 65.48%(蔚山 農所面), 83.4%(丹城 新等·法勿也面)에 달하고 兩班人口도 48.6%(大邱), 67.07%(蔚山 農所面), 65.8%(丹城 新等·法勿也面)에 달하고 있어서 이 사실로만 본다면 양반 신분의 소수 특권지배신분으로서의 성격은 무의미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호적 분석에 의해 파악된 양반층의 급증현상은 ‘幼學’ 직역층의 급증에 의한 것인데, 대구의 경우 幼學戶의 전체 양반호 중 점유율이 1690년의 41.4%에서 1858년의 89.8%로, 언양의 경우 1711년의 54.6%에서 1861년의 98.4%로, 단성의 경우 1678년의 41.5%에서 1825년의 98.8%로 각각 크게 증가하였다.0476)李俊九,<양반층의 증가와 분화>(≪한국사≫34, 국사편찬위원회, 1995), 16∼17쪽. 19세기 후반까지 자료가 밝혀져 있는 단성 新等面과 法勿也面의 사례를<표 5>를 통해서 보면, 1825년 이후에도 양반호 가운데 유학호의 점유율은 최저 96.7%에서 최고 99.6%까지, 양반 인구 가운데 유학 인구의 점유율은 97.0%에서 99.7%까지 매우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2개 면의 경우, 1882년의 유학호 점유율은 新等 96.7% 法勿也 99.0%, 유학 인구 점유율은 新等 97.0% 法勿也 99.3%를 각각 기록하였다.

  新 等 面 法 勿 也 面
戶 數 人 口 戶 數 人 口
幼學 全體 幼學 全體 幼學 全體 幼學 全體
1825 123
(97.6)
126 142
(97.9)
145 166
(99.4)
167 204
(99.5)
205
1846 144
(98.6)
146 148
(97.4)
152 254
(99.6)
255 324
(99.7)
325
1861 187
(97.9)
191 247
(97.2)
254 323
(99.4)
325 365
(99.5)
367
1882 147
(96.7)
152 196
(97.0)
202 301
(99.0)
304 406
(99.3)
409

<표 5>19世紀 丹城縣 新等·法勿也面 幼學戶口의 變化(男丁)

*자료:井上和枝, 위의 글, 15쪽에서 재구성. 이 표에서 ‘全體’는 兩班 全體를 말하며 準兩班으로 분류되는 것은 제외하였음. ( )안은 양반 전체에 대한 幼學 호구의 점유율(%).

 이처럼 18세기 이후부터 幼學 호구가 급증한 배경에는 유학의 자기 재생산 뿐만 아니라 忠義衛에서 유학으로의 직역 이동과 서얼 후손을 비롯한 중간신분층의 유학 호칭, 그리고 有役下層民의 冒稱幼學 등 다양한 신분층의 유학 호칭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유역 하층민의 모칭유학은 18세기를 거쳐 19세기로 오면서 유학층 증가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군역제의 동요와 함께 신분제의 동요를 가속화하였다.0477)李俊九, 위의 글, 17∼21쪽 참조. 유학은 16·17세기까지는 대개 양반의 직역에 해당하였으나, 18·19세기로 오면서 하위신분층에 의하여 모칭되었고 호적상 모칭유학의 추세는 관에서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0478)崔承熙,<朝鮮後期 幼學·學生의 身分史的 意味>(≪國史館論叢≫1, 1989), 117쪽. 그러므로 호적대장 상에 幼學 직역으로 기재된 호구의 급증 현상을 곧바로 양반 신분층의 급증으로 해석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따르며, 오히려 이를 신분과 직역 간의 불일치 현상으로 해석하고 신분직역제의 해체 문제와 관련지울 수도 있는 것이다.0479)任敏赫,<朝鮮後期의 幼學>(≪淸溪史學≫8, 1991), 158쪽 참조.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호적 분석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兩班戶口의 증가 현상은 양반 신분층의 동요 현상을 설명하는 지표로서의 가능성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다양한 신분층, 특히 유역 하층민이 19세기로 오면서 양반의 직역인 유학을 모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될수록 양반 신분층의 폐쇄성 약화 내지 권위 하강에 관한 증거도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결과는 중세적 신분질서 해체의 징후로 연결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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