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2. 동학교조 신원운동
  • 1) 동학교단의 조직과 운영

1) 동학교단의 조직과 운영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는 데 있어 우선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중의 하나가 그 전단계의 투쟁 양상을 밝혀내는 일이다. 이른바 조선 후기에 들어 빈발하던 民亂과 동학교단측에 의해 주도된 敎祖伸寃運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학농민전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교조신원운동은 대체로 동학교단이 주도한 단순한 종교운동으로 파악함으로써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전국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를 규명하는 데 소홀했음이 지배적인 연구 경향이었다.0587)敎祖伸寃運動에 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연도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李光淳,<崔海月과 非暴力運動>(≪韓國思想≫1·2, 1957).
金義煥,<1892∼1893년의 東學農民運動과 그 性格-參禮聚會·伏閤上訴·報恩集會를 中心으로->(≪韓國史硏究≫5, 1970).
韓㳓劤,<東學의 性格과 東學敎徒의 運動>(≪한국사 17:동학농민봉기와 갑오개혁≫, 국사편찬위원회, 1973).
趙景達,<東學農民運動과 甲午農民戰爭의 歷史的 性格>(≪朝鮮史硏究會論文集≫19, 1982).
鄭昌烈,<東學敎門과 全琫準의 關係-敎祖伸寃運動과 古阜民亂을 中心으로->(≪19世紀 韓國傳統社會의 變貌와 民衆意識≫,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2).
―――,<古阜民亂 硏究>上·下(≪韓國史硏究≫48·49, 1985).
張泳敏,<東學의 大先生伸寃運動에 관한 一考察>(≪白山朴成壽敎授華甲紀念論叢 韓國獨立運動史의 認識≫, 1991).
申榮祐,<報恩과 東學集會>(≪外俗離 書院溪谷 文化遺蹟≫, 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 1992).
―――,<장안 마을 東學 大都所와 돌성 築造의 의미>(≪報恩 帳內里 東學遺蹟≫, 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 1993).
박찬승,<1892, 1893년 동학교도들의 ‘신원’운동과 ‘척왜양’운동>(≪1894년 농민전쟁연구≫3, 역사비평사, 1993).
배항섭,<1890년대 초반 민중의 동향과 고부민란>(≪1894년 농민전쟁연구≫4, 1995).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 투쟁으로서 동학농민전쟁을 趨動해 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교조신원운동에 대한 연구는 동학농민전쟁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바탕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학계의 쟁점이 되고 있는 東學과 동학농민전쟁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연구 과제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지배체제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민란이 빈발하고 있을 무렵, 1860년 4월 5일 慶尙道 慶州에서 몰락양반의 庶子나 다름 없던 崔濟愚(1824∼1864)0588)최제우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庶子가 아니라 再嫁한 寡婦의 아들이다.에 의해 창시된 東學은 지속되는 정치의 부패, 조세수탈의 가중, 계급적 모순의 심화, 흉년과 질병으로 인해 불안과 고통속에서 삶을 지탱해 가던 조선사회의 기층민들에게 큰 호소력으로 파고 들었다. 기존의 부패한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적인 미래를 제시하면서 민중들에게 포교된 동학은 사회개혁을 바라던 일부 지식인층과 민중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동학은 이단시되었고, 일부 지식층과 기층 민중을 중심으로 한 동학 교세의 급격한 증가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1863년 12월 체포된 최제우는 ‘左道로 백성들을 미혹시켰다’는 죄명으로 이듬해 3월 10일 처형되었다. 최제우의 처형 이후 동학교세는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나 그의 제자 崔時亨(1827∼1898)의 노력으로 1870년대 후반에는 지도체제가 확립되었고, 동학의 기본경전인≪동경대전≫과≪용담유사≫의 集成이 이루어졌으며, 주요 종교의식이 확립되어 교세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에는 丹陽·槐山·淸風·忠州·淸州·沃川·報恩·公州·木川·禮山 등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교세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증가되는 동학의 교세는 당시 지배층에게 만만치않은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그에 따라 지방 수령들은 지속적으로 동학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1880년대 이후 지방 수령들에 의한 동학 탄압은 邪學을 금단한다는 명분 아래 동학교도의 재산을 수탈하거나 잡아 가두는 등의 형태로 이어졌으며 동학교도들은 피신과 도망, 석방금을 내고 풀려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교문을 지켜 나갔다.0589)1880년대에 지방 수령들에 의해 자행된 동학 탄압사례는 필자의 다음 논문에 잘 밝혀져 있다.
朴孟洙,≪崔時亨硏究-主要 活動과 思想을 中心으로-≫(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6),<표 12>참조.

 그러나 1890년대 초에 들어와 동학교단은 ‘敎祖伸寃運動’0590)1864년 3월 10일에 ‘左道惑民之律’에 의해 처형당한 동학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伸寃하려는 운동으로서, 교조의 신원은 곧 東學의 公認과 布敎의 자유를 허락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라는 합법적 청원운동을 통해 동학을 공인받고자 하였다.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伸寃함으로써 동학의 공인과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고자 했던 교조신원운동은 經國大典에 보장된 伸訴제도를 통해 조정의 공인을 받기 위한 집단적 시위운동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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