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2. 동학교조 신원운동
  • 2) 교조신원운동의 전개
  • (2) 삼례취회

(2) 삼례취회

 공주취회에서 충청감사로부터 ‘지방관들의 동학금단을 구실삼은 토색을 금한다’는 甘結을 얻어낸 동학교문은 크게 고무됐다. 공주취회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평가한 교단 지도부는 충청도와 함께 탄압이 극심했던 전라도에서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충청감영에서 얻어낸 성과들을 전라감영에서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에 최시형 등 교단 지도부는 교통이 편리한 參禮驛을 집결 장소로 택하였다.

 전라도 삼례에 집결하라는 동학 지도부의 동원령이 담긴 敬通0603)동학교단 지도부와 각 지역의 包와 接, 또는 포와 포, 접과 접끼리 중요사항을 전달하기 위하여 발했던 通文을 말한다.은 1892년 10월 27일(음력) 밤 全羅道 參禮道會所 명의로 각 포에 발송되었다. 이 경통은 ‘錦營에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니 完營에 議送單子를 내는 것 또한 天命’0604)<敬通>,≪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東學書≫, 70쪽.이라 하여 삼례집회의 목적을 밝히는 한편, ‘모임에 달려오지 않으면 별단의 조치를 마련함은 물론이요 하늘로부터 죄를 받을 것’0605)<敬通>, 위의 책, 71쪽.이라며 교도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10월 29일부터 각지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동학교도들은 11월 1일에 이르러서는 수천을 헤아리게 되었다.0606)이 때의 참여 규모를<天道敎書>는 “11월 1일 각지 두령이 포내 도인들을 솔하고 參禮驛에 赴하니 그 參會者 수천인이라”하였고,<天道敎會史草稿>는 “11월 3일에 각지 두령이 포내 도인을 솔하고 삼례역에 會集한 자 수천이라”고 전하고 있다. 11월 2일 姜時元·孫天民 등은 최시형의 재가를 받은<各道儒生議送單子>를 전라감사 李耕稙에게 제출하여 大先生0607)당시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를 존칭하여 부르던 호칭.의 원한을 풀어 주도록 간청하였다. 이 議送單子에서 동학교도들은 “최제우선생이 上帝의 명을 받아 儒佛仙 三道를 합해 하나로 만들어 한울님을 지성으로 섬기며 儒로서는 五倫을 지키며 佛로서는 심성을 다스리고 仙道로는 질병을 제거케 했다”0608)<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 위의 책, 71∼72쪽.며 동학사상의 정당성을 천명한 뒤, 대선생이 무고한 죄명으로 처형된 지 30년이 지나도록 그 寃抑을 풀어 大道를 떳떳이 세상에 彰明할 수 없었던 恨을 호소했다. 또 동학과 서학을 ‘氷炭의 관계’로 규정하고 동학을 “윤리도 없고 분별도 없는 西學과 더불어 차별없이 취급하는 것은 不可하다”고 주장하면서 ‘서학의 여파로 간주, 유독 동학에 대해서만 힘을 기울여 배척하는 행위’의 온당치 못함을 지적하였다.0609)<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 위의 책, 72쪽. 뿐만 아니라 “列邑의 수령들이 빗질하듯 잡아 가두고 재산을 討取하여 쓰러져 죽는 자가 끊이지 않고 더불어 豪民들마저 侵虐에 가담하여 道人(동학교도)들이 정처없이 떠돌며 살 길이 없게 하고 있다”0610)위의 책, 73쪽.며 동학에 대한 지방 수령과 토호들의 탄압과 이를 빙자한 토색을 고발하고, 동시에 “서양오랑캐의 學과 왜놈 우두머리의 毒이 다시 外鎭에 들어 앉아 날뛰며 제멋대로 행하고 있다”0611)위의 책, 74쪽.며 外勢의 창궐을 강하게 경고하는 내용을 담아 공주취회에서도 주장한 斥倭洋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었다. 결국 의송의 요지는 동학은 서학을 배격하는 忠君孝親·廣濟蒼生·輔國安民의 敎이므로 조정이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여러 道에 대해 간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학 포교의 자유를 공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이 제출한 의송단자에 대해 전라감영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엿새가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삼례취회 지도부는 11월 7일경 독촉 議送을 다시 보냈다. 11월 9일에야 “너희 동학은 나라에서 금하는 바이다. 사람의 심성을 갖추고서도 어찌하여 正學을 버리고 이단을 좇아 스스로 죄를 범하는 것인가. 소장의 내용인즉 동학을 널리 포교토록 허용하기를 바랐으니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곧 물러가 모두 새 사람이 되어 미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0612)<題音>, 위의 책, 75쪽.는 題音을 내렸다. 이러한 무성의한 제음은 동학교도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러자 이경직은 11월 11일자 甘結을 통해 ‘동학 禁斷을 빌미로 한 錢財의 수탈을 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0613)<甘結>, 위의 책, 77∼78쪽. 11일자 감결은 동학을 공인하지 않은 채 교도들에 대한 지방수령들의 토색질을 금한다는 내용이었다. 충청감영에서 하달된 감결과 비슷한 요지였다. 이에 따라 동학교단 지도부는 11월 12일 完營道會所 명의의 경통을 내려 ‘道는 비록 나타났으나 寃은 아직 풀지 못했다’며 삼례취회의 제한적 성과를 내세우고 ‘法軒(해월 최시형)의 지휘를 기다려 雪寃을 도모토록 고심하는 것이 도리’라고 밝히면서 ‘곧 귀가하여 길가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라’고 해산을 종용하였다.0614)<1892년 11월 12일 敬通>, 위의 책, 78∼79쪽. 12일자의 경통은 또 “첫째, 처신과 행사는 도리에 합당했으니 이제부터 더욱 도리에 힘쓰자. 둘째, 삼례취회는 대의명분에 떳떳하다. 해월 선생이 직접 지휘하지 못한 것을 달리 생각하지 마라. 셋째, 이후 무단한 탄압이 있을 경우 소장 등을 제출하며 적극 대응하라. 넷째, 도리를 어기고 기강을 어지럽히는 자는 엄히 책망하라. 다섯째, 일찍부터 대의에 참여, 살림이 어려워진 교도들을 함께 도우라”0615)위의 책, 79∼80쪽.는 다섯 가지 행동강령도 하달하였다. 이로써 10여 일에 걸친 삼례취회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고 임시로 설치됐던 완영도회소는 철수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공식 해산명령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교도들은 해산하지 않고 있었다. 11월 19일자 北接道主 명의로 나온 통문이 이를 반증한다. 즉 ‘임금께 伏閤상소할 계획을 다시 도모하려 하니 다음 조치를 기다려 달라’ ‘서로 도와 떠돌아 다니지 않도록 하여 합심해 異論이 없도록 하라’0616)위의 책, 82쪽.는 경통 내용이 그 증거이다. 19일자 경통과 함께 21일자로 하달된 전라감영의 감결 또한 일부 교도들이 21일까지도 해산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글로 번역하여 널리 게시하라’는 당부까지 곁들인 두번째 감결의 주된 내용은 ‘동학도들을 잘 타일러 편안히 살게 하며 읍속들은 토색질을 금하라’는 것이었으나 서두에서 ‘동학교도들을 安接토록 할 것’을 다시 지시하고 있어0617)위의 책, 85쪽. 이때까지 해산하지 않거나 다른 곳을 떠돌며 귀향하지 않은 교인들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곧 삼례취회가 지도부에 의해 11월 12일 공식 폐회됐다 할지라도 실질적인 해산은 21일 이후로 볼 수 있다.

 삼례취회는 당시 동학교단 교주인 최시형이 직접 주도한0618)삼례취회 무렵 최시형은 경상도 尙州 功城面 旺室에서 말을 타고 삼례로 출발하려다 낙상하여 실제 참석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삼례취회를 지도한 孫天民, 姜時元 등은 최시형의 심복 제자들로서 사실상 최시형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였다. 조직적인 신원운동이었다. 노골적이고 집단적인 대중집회를 통해 동학의 공인 및 포교의 자유획득과 같은 ‘정치적 요구’를 달성하려 했으며, 교문 자체의 문제를 넘어 당시 민족적 현안이었던 ‘斥倭洋倡義’의 실현까지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삼례취회의 역사적 의의는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삼례취회는 또 집단적인 운동을 통해 일정한 성과를 얻어낼 수 있음과 동학교단과 일반민중과의 결합 가능성, 대중집회에 대한 실험 등을 성공적으로 타진함으로써 장차 동학농민전쟁의 징검다리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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