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봉기
  • 1) 고부민란
  • (2) ‘사발통문’ 거사계획

(2) ‘사발통문’ 거사계획

 고부민란을 동학농민전쟁의 전주곡으로 규정짓기 위해서는 민란이 농민전쟁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는 고부민란을 이끌고 그것을 농민전쟁으로 전화시킨 전봉준이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세상을 건지기 위해’ 동학에 가담한 전봉준은 보은집회·삼례집회 등의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적 폐정을 개혁하려는 정치운동을 일찌기 구상하고 있었다. 1893년 보은취회 당시 금구취당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활동한 것이나 서울에서의 방문 게시 활동과 같은 것이 그러한 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0660)정창렬,<고부민란의 연구(상)>(≪한국사연구≫48집, 한국사연구회, 1985) 참조. 고부민란과 관련하여 전봉준의 이러한 활동의 단면을 보여 주는 자료가 ‘沙鉢通文’이라고 생각된다.

 1968년에 고부 송후섭씨 집 마루 밑에 묻혀 있던 족보 속에서 발견되어 처음 공개된 사발통문에 대해서는 그간 학계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우선 ‘사발통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계사십일월 일

 (가) 癸巳十一月 日

   이이집 좌하

   各里里執綱 座下

  

   우  여  격문  방  비전   물논  성비    일

 (나) 右와 如히 檄文을 四方에 飛傳니 物論이 昇飛얏다. 每日亂亡을

   구   민중   처처             이

   謳歌던 民衆드른 處處에 모여서 말되 ‘낫네 낫서 亂離 낫서’

                     백성

  ‘에이 참 되얏지 그양 이로 지서야 百姓이 사이 어

           기일

  머 잇겟’ 며 期日이 오기 기다리더

  

       도인   선후책  토의결정   위   고부 서부면 죽이

 (다) 이에 道人드른 先後策을 討議決定기 爲야 古阜 西部面 竹山里

   송두호  도소  정 고 일 운집   서  결정    결의

   宋斗浩家에 都所를 定고 每日 雲集야 次序를 決定니 그 決議된

   내용  좌  여

   內容은 左와 如

  

   고부성 격   군수 조병갑  효수  

 一. 古阜城을 擊破고 郡守 趙秉甲을 梟首 事.

   군기 화약고  점영  

 一. 軍器倉과 火藥庫를 占領 事.

   군수  유   인민  침어  이  격징  

 一. 郡守의게 阿諛야 人民을 侵漁 貪吏를 擊懲 事.

   전주영 고 경  직  

 一. 全州營을 陷落고 京師로 直向 事.

  

 우  여  결의       군략  능   서  민활  영도

 右와 如히 決議 되고 서 軍略에 能고 庶事에 敏活 領導者될

 장

 將 … (이하 판독 불능) (가, 나, 다 번호는 필자가 첨부한 것임)

 이 자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 왔으나, 현재로서는 이 자료가 1893년 11월 당시의 사발통문 원문 자체는 아니며, 사발통문에 참가한 어떤 동학교도의 후일의 간단한 회고록의 극히 일부를 필사한 것이라는 해석이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다.0661)신용하,<고부민란의 사발통문>(≪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참조. 다만 (가)-(다)항이 어떤 시점의 사실을 기록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3개 항의 내용이 모두 1893년 11월의 정소운동을 위한 사발통문과 직결되는 사건이며 시간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11월 말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발령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고,0662)정창렬,<고부민란의 연구(하)>(≪한국사연구≫49집, 1985), 101∼105쪽. 1893년 11월에서 1894년 3월 무장기포 시기까지 4∼5개월에 걸쳐 이루어진 사실들을 엮어 놓은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0663)신용하, 앞의 책, 124∼127쪽.

 우선 (가)는 1893년 11월에 고부읍의 각 리 집강들에게 돌린 사발통문의 일부임이 명백하다. 정작 통문의 내용이 있어야 하는 데 문서가 잘려 나가서 1893년 11월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결의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서명자 명단만이 실려 있다. (나)는 사발통문이 돌고 난 이후의 어느 시점에 민심의 동향을 기록한 것으로서 (가) 이후의 일을 쓴 것인데 그 시기는 명확하지가 않다. 여기에 대해서는 1893년 11월에 돌린 (가)의 사발통문에 대한 민중의 반응을 적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0664)정창렬, 앞의 글(하), 101쪽. 이 문서가 원본이 아니라 훗날 씌어진 점을 고려하여 1893년 11월부터 1894년 무장기포가 일어나기 까지의 기간 중에 어떤 격문이 있었고, 그 격문에 대한 민중의 반응을 적은 것이라는 해석0665)배항섭,<1890년대 초반 민중의 동향과 고부민란>(≪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57쪽.도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 부분, 특히 4개항의 결의사항이다. 이 결의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밝히는 일은 고부민란이 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에 대해 정창렬은 사발통문을 돌린 직후인 11월 말경에 전봉준 등이 결의한 것으로 본 반면에,0666)정창렬, 앞의 글(하), 99쪽. 신용하는 결의사항 중의 2항과 4항은 고부민란에서 전혀 실행되지 않은 것인 만큼 고부민란 단계가 아니라 전봉준이 무장에 남접도소를 차린 3월 중순경에 결의된 것으로 추정하였다.0667)신용하, 앞의 책, 124∼126쪽. 그런데 고부민란과 농민전쟁의 연속성을 밝히려는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다)의 ‘봉기계획’을 마련한 시점은 11월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등장을 올린 다음이 아니라 전주감영에까지 정소한 다음인 12월에서 1894년 1월 11일 고부민란 발발 사이의 어느 시점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0668)배항섭, 앞의 글, 59쪽. 전봉준 등 동학의 개혁세력은 교조신원운동 단계에서부터 중앙권력의 교체를 목표로 운동을 전개해 온 연속선상에서 중앙권력을 목표로 한 봉기계획이 구상되고 있었는데, 이 문건에서 그러한 계획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결의사항 중의 제4항이 고부민란에서 당장 기도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중앙권력을 목표로 한 전국적 항쟁은 이 단계에서 이미 구상되어 있었으며, 고부민란은 그러한 구상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0669)위의 글, 60쪽. 이러한 주장은 고부민란의 전개과정에서 전봉준을 비롯한 ‘사발통문’ 거사계획에 참여한 지도부가 보인 움직임을 보면 다소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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