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봉기
  • 1) 고부민란
  • (5) 고부민란의 농민전쟁으로의 발전

(5) 고부민란의 농민전쟁으로의 발전

 고부민란과 제1차 농민전쟁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서는 고부민란이 소강상태로 들어간 이후 신임군수의 설득으로 민란 중민이 해산하는 동안 전봉준을 위시한 지도부가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를 추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대개 군현 단위의 민란은 고립적으로 전개되다가 안핵사가 파견되어 민중을 기만적으로 설득하여 해산하면, 주모자를 색출하여 처벌함으로써 실패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전쟁 지도부는 바로 이러한 실패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성찰했을 것이다. 한 고을의 문제는 전국적인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 군의 민란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여러 고을을 묶는 조직세력이 없이 농민들의 단순한 집합만으로는 봉건정부가 기만책을 쓰는 경우에는 쉽게 해체되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전봉준은 군현 단위의 산발적인 민란을 묶어낼 조직으로 동학조직에 주목했고 이러한 조직에 기초한 봉기만이 그 시대의 폐정을 개혁할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봉준은 소강상태에 빠진 민란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인근 고을의 동지들을 설득, 규합하는 노력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자 한 것이다.≪오하기문≫에서는 “그리하여 그 일당 金箕範·孫化中·崔景善 등과 함께 화를 복으로 바꾸어 준다는 꾀로 백성들을 유혹하고 선동하여 그들을 끼고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0685)≪오하기문≫, 72쪽.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전봉준은 민란 중민이 해산하자 무장으로 잠행하여 전라도의 동학지도자 손화중·金開南·金德明·최경선 등과 모의하여 南接都所를 차려 농민전쟁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부민란이 소강상태에 빠진 2월부터 전라도 각지의 농민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음력 2월에 이르러서는 ‘保國安民倡大義’라는 큰 깃발을 펄럭이며 완전히 반항의 결심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방 이웃이 이 기세에 휩쓸려 찾아와 가담하는 자가 많았고 칭하기를 동학당이라 하였다(그 수효가 1천 2, 3백 명이라고도 하고 8, 9백 명이라고도 한다).”0686)≪주한일본공사관기록≫(번역본)1, 15쪽. 이러한 소식이 들리자 2월 22일 전라감사 김문현은 “다섯 개 진영과 금구·정읍·부안·김제·담양·무장·태인·흥덕 등 11개 고을에 군대를 점검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라”0687)≪오하기문≫, 70∼71쪽.고 할 정도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때 전봉준이 전라도 각지에 봉기를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격문을 띄운 점이다. 민중의 규모가 천 여명 정도의 세력으로 불어나자 전봉준은 그 여세를 몰아 민란을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하여 거사계획을 실천에 옮기고자 2월 20일경 ‘倡義檄文’을 날린 것이다.

백성을 지키고 길러야 할 지방관은 治民의 도를 모르고 돈벌이를 본원으로 삼는다. 여기에 더하여 전운영이 창설됨으로써 폐단이 煩劇하여 민인들이 도탄에 빠졌고 나라가 위태롭다. 우리는 비록 초야의 遺民이지만 차마 나라의 위기를 좌시할 수 없다. 원컨대 각 읍의 여러 군자들은 한 목소리로 의를 떨쳐 일어나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宗社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자.0688)≪南遊隨錄≫, 甲午 2월 20일.

 이것은 민란의 차원을 넘어서서 ‘반란’을 선동하는 격문으로 볼 수 있다. 이 격문에서 전봉준은 전운영이라는, 일개 고을의 문제를 넘어서는 문제를 제기하여 민란의 확산을 꾀하고 있으며,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할 것과 ‘宗社를 보전’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과거의 민란과는 차원이 다른 전국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봉준은 ‘사발통문’ 거사계획에서 제4항 ‘전주성을 함락하고, 京師로 직향할 사’라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사실상의 농민전쟁을 기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핵심적 내용이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나아가 중앙의 권신 제거를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제시된 근본 취지는 제1차 농민전쟁 기간 중의 각종 창의문이나 통문 등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 격문이 날아간 열흘 정도 뒤인 2월 말부터 고부 인근 고을에서 농민들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월 29일 김제의 죽산으로부터 동쪽으로 40여리 떨어진 곳(금구 원평 일대)에 동학이 둔집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0689)≪주한일본공사관기록≫1, 38쪽. 3월 11, 12일경 동학당 약 3천여 명이 금구로부터 태인을 거쳐 부안으로 가는 것이 태인에서 목격되기도 했다.0690)위의 책, 43쪽. 3월 16일 농민군 수천 명이 무장 당산에 집결하기 시작하였고, 3월 16일부터 18일까지는 사방에서 농민군 천여 명이 몰려들어 영광·법성 경계에 모였는데, 이들 가운데 수백 명이 법성 진량면 황현리 대밭에서 죽창을 만들고 민가에서 총포 등을 마련했다.0691)≪南遊隨錄≫, 甲午 3월 18일.≪오하기문≫에도 “우도 일대 10여 읍이 일시에 봉기하여 열흘 정도에 수만 명이 모여 들었고 동학과 ‘난민’이 함께 어우러진 것은 이 때부터였다. 봉준 등은 무장에서 큰 집회를 열고 그들의 생각을 민간에 알렸는데…”0692)≪오하기문≫, 72쪽.라고 하여 고부 인근 고을의 농민군들이 3월 초부터 집결하기 시작하여 무장에서 기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2월 20일 격문을 발한 이후 열흘 정도가 지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라도 각지의 농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소강상태에 있던 고부민란은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고부민란의 수습과정에서 안핵사 이용태가 저지른 만행도 작용했겠지만,0693)<전봉준공초>, 초초문목, 313쪽. 그보다도 전봉준이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인근 고을의 농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고부민란의 처음 시작은 조선 후기의 여느 민란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나라를 건지려는 뜻을 가진 전봉준 등과 같은 지도자가 결합하여 고부민란은 한 차원 높은 농민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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