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봉기
  • 2) 전봉준의 기병과 격문
  • (3) 백산대회

(3) 백산대회

 무장 당산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고부읍을 점령하여 대강의 폐정을 개혁하고 대오를 강화한 다음, 3월 25일에는 백산으로 이동하여 진을 쳤다. 백산은 광활한 호남평야 가운데 조그마하지만 우뚝 솟은 전술적 요충지였다. 이곳에 올라서면 사방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전봉준 등 지휘부는 농민군을 확대개편하고 이른바 대진군을 위한 전열체계를 갖추었다. 전봉준 등 지도부가 고부읍에서 백산으로 본진을 옮겼을 때 무장기포의 창의문과 통문을 보고 백산으로 몰려든 농민군들의 행렬은 줄줄이 이어졌다. 부안·태인·금구·원평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달려온 농민들은 이제 8천여 명에 이르렀고 지도부는 연합농민군을 재편성했다. 비로소 한 군 단위의 국지성을 벗어나 지방단위별로 본격적인 농민군이 조직된 것이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이 통솔하는 농민군이 무장 당산에서 기포하여 고부로 전진할 때 그 숫자는 4천여 명이었다. 여기에 전라도 각지에서 봉기하여 모인 농민군 부대와 태인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경선이 이끄는 농민군 3백여 명, 말목장터에서 대기중이던 고부 농민 1천여 명이 합류하여 농민군의 병력은 8천여 명에 달했다.

 확대개편된 농민군의 간부는 다음과 같다.

大將  全琫準

總管領 孫化中·金開男

總參謀 金德明·吳時泳

領率長 崔景善

秘書  宋熹玉·鄭伯賢

 백산에서 농민군 지도부 구성은 무장에서 봉기할 때의 지도부체제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지만, 고부읍을 점령할 즈음 합류한 접주급 지도자들을 지도부에 흡수하여 조직을 확대, 직위를 배분함으로써 농민군의 지휘체계를 확대 강화해 본격적인 진군체제를 갖춘 것이다.

 농민군 지도부는 백산에 ‘湖南倡義大將所’를 설치하고 대장기에 무장기포 때의 동도대장 이외에 ‘保國安民’이란 네 글자를 크게 써 넣었으며, 격문을 공포해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에 띄워 백성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檄  文0702)≪東學史≫, 112쪽.

 우리가 義를 들어 此에 至함은 그 本意가 斷斷 他에 있지 아니하고 蒼生을 塗炭의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磐石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는 貪虐한 관리의 머리를 버히고 밖으로는 橫暴한 强敵의 무리를 驅逐하자 함이다. 兩班과 富豪의 앞에 苦痛을 받는 民衆들과 方伯과 守令의 밑에 屈辱을 받는 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寃恨이 깊은 者라. 조금도 躊躇치 말고 이 時刻으로 일어서라. 萬一 期會를 잃으면 後悔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甲午  月  日

湖南倡義大將所 在白山

 무장기포의 창의문에서는 봉기가 국왕에 대한 반역이 아님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에 급급하여 봉기의 본 뜻을 충분히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유교의 용어로 분식한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고부 점령에 성공하고 백산에서 1만여 명의 농민군을 편성하는 데 성공한 농민군 지도부는 위의 격문에서 거리낄 것 없는 자유로운 조건 위에서 대담하고 솔직하게 봉기의 목표를 밝히고 있다.

 이 격문은 농민혁명 선언문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제1차 농민전쟁의 민족주의의 반제 반봉건 투쟁의 목적을 극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즉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버히고”, “창생을 도탄의 중에서 건지고”는 반봉건 투쟁의 목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라”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목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격문은 봉기의 주체세력을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임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 봉기의 적대관계를 양반·부호 대 민중, 방백·수령 대 小吏의 대립관계로 파악하고 있으며, 民과 三政운영에서 대립, 갈등관계에 있는 아전층까지 동맹군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농민군의 역량을 증대시켜 나가려는 전략이 담겨 있다.

 농민군 봉기의 목표는 농민군이 백산에 집결하여 간부를 확대 개편한 후에 공포한 四大名義에서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형태로 선언되었다.

四大名義0703)鄭喬,≪大韓季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71), 74쪽.

 ①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파괴하지 않는다(不殺人不殺物).

 ②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忠孝雙全 濟世安民).

 ③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어 없애고 왕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逐滅倭夷 澄淸聖道).

 ④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驅兵入京 盡滅權貴).

 농민군이 발표한 4대명의는 농민군의 일종의 강령으로서, 여기서 전봉준이 오랫동안 소망해 오던 민비수구파정권의 타도와 일본침략세력의 추방 및 새로운 정치의 실현이 봉기의 목표로 공개리에 선포되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①과 ②는 휴머니즘과 충효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농민군 봉기의 보편적 목표를 선언한 것이라고 한다면, ③은 개항후 국내에 침투한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쫓아내려는 선명한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언이며, ④는 구체제의 골간인 민씨정권과 양반귀족을 타도하겠다는 반봉건 혁명의 선언이라고 해석된다.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반제·반봉건의 근대민족주의 농민혁명이 선명하게 공포되고 있는 것이다.0704)신용하, 앞의 글(1987), 71쪽.

 또한 농민군은 3월 29일에서 4월 4일 사이의 무렵에 행군의 ‘4개 약속’과 행동지침으로서 ‘12개조 기율’을 마련하였다.

4개 약속0705)金允植,≪續陰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71), 311쪽.
<東匪討錄>(≪韓國學報≫3), 244쪽.

 1) 적을 대할 때는 언제나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가장 큰 공으로 삼는다.

 2) 비록 부득이 싸우더라도 절대로 인명을 상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3) 행군할 때에는 언제나 절대로 남의 물건을 해쳐서는 안된다.

 4) 효제충신한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으면, 그 주위 10리 안에는 주둔하지 않는다.

 농민군 지도부는 또한 농민군이 지켜야 할 기율로서 다음과 같은 ‘농민군 12개조 기율’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0706)≪주한일본공사관기록≫(번역본) 1, 19∼29쪽.

1. 항복하는 자는 사랑으로 대한다(降者愛待).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困者救濟).

3.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貪者逐之).

4. 순종하는 자에게는 경복한다(順者敬服).

5. 도주하는 자는 쫒지 않는다(走者勿追).

6. 굶주린 자는 먹인다(飢者饋之).

7.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奸猾息之).

8. 빈한한 자는 진휼한다(貧者賑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不忠除之).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逆者曉諭).

11. 병든 자는 진찰하여 약을 준다(病者診藥).

12. 불효한 자는 형벌을 가한다(不孝刑之).

 12개조의 기율은 충효제신 등 유교윤리적 덕목에 기초한 행동지침이었다. 이러한 농민군 기율은 농민군이 엄정한 규율과 기강을 갖고 행동하는 군대로 편성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진군 당시에 농민군들은 실제로 이러한 규율을 지켜 김윤식의≪續陰晴史≫에서도 “匪徒(농민군:필자)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오히려 추호도 민을 범하지 않았고 관민들은 궤향을 즐겁게 제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백산대회에서 만들어진 격문, 행동강령, 기율 등을 종합해 볼 때 농민군은 이를 통해 혁명적 목적과 의지를 처음으로 명백하게, 또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대의적 명분을 스스로 확인하고 천명했다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전쟁의 제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반제·반봉건의 과제를 명확히 제시했다. 농민군은 이전의 민란 시기의 자연발생적이고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 넘어 조직적인 투쟁의 대오를 갖추고 명확한 슬로건을 제시했다.

 전봉준이 남접도소를 설치하여 농민전쟁의 총본부로 삼고 무장에서 창의문을 선포함으로써 이제 과거의 민란 형태의 자연발생성과 지역적 한계성을 극복하고 지속적이고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의 비약이 가능하였다. 민란 단계의 농민봉기가 일회성으로 끝나고 끊임없는 반복으로 일관하였다면, 이제는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조직적 기반을 갖추고 뚜렷한 투쟁목표를 제시할 수 있는 조직적 형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고부민란을 포함한 종래의 민란과 농민전쟁을 결정적으로 구분지우는 것이다. 즉 이제 농민군은 지방관리들의 학정에 대한 수동적인 저항의 차원을 벗어나 국가권력을 투쟁의 대상으로 하고 나아가 국가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할 수 있는 조직적 형태를 꾸려나가는 과정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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