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3.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
  • 1) 조세수취체제에 대하여
  • (6) 전운영에 관한 조항

(6) 전운영에 관한 조항

 폐정개혁 분류목록의 15)는 전운영에 관한 농민들의 요구조항을 열거한 것이다. 개항 이후 과거 목선에 의한 선운 대신 기선에 의한 공물 운송이 시작되었는데 이를 맡은 관청이 轉運營이었다. 전운영의 폐단으로는 우선 정부의 기선 구입에 따르는 경비로 선가미를 따로 거두어 들였기 때문에 농민의 세미 부과는 가중되었다. 또한 전운사가 선운을 관장한 이후로 田稅·大同米를 위시하여 船價米·三手米·永宗米 등 농민과 선상에게 부과되는 일체의 稅米를 督徵·수송하는 책임과 권력을 갖고, 그 밑에 監官·船主 등의 횡포와 弄奸·逋欠의 여지가 많았다.0776)한우근,<동학란 기인에 관한 연구(상)-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관련하여->(≪아세아연구≫7-3호,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64), 36쪽. 위의 목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농민군이 제시한 모든 개혁안이 전운영 혁파를 거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개혁안의 맨 앞에 나타나곤 하였던 점은 전운영에 대한 농민군의 怨聲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전운영에서의 수탈은 국가의 징세기구에 있어서의 중간수탈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전라도 전운사 趙弼永은 당시 일반적으로 자행되고 있던 중간수탈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0777)“趙弼永이… 갖은 명목을 교묘히 붙여 가렴하니 세납선여전이 100만 꿰미나 되었다. 국왕은 그를 재주있다고 여겨 3년이 되었어도 교체하지 않았다. 재물로 소론 갑부가 되었다….”≪梅泉野錄≫, 87쪽. 그래서 농민전쟁을 관찰한 한 유생은 “호남의 난(농민전쟁)은 趙弼永으로부터 시작되어 趙秉甲을 거쳐 李容兌(泰)로 끝났다.”0778)崔永年,<東徒問辨>(≪동학란기록≫상), 158쪽.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전운영 혁파의 문제는 이전의 민란 단계에서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0779)정창렬,≪갑오농민전쟁연구-전봉준의 사상과 행동을 중심으로-≫(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123∼124쪽 참조. 과거의 민란은 개별 군현 단위의 邑政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고 민란의 전개도 일개 군현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립적으로 전개되었던 반면에, 전운영의 문제는 적어도 전라도의 여러 군의 공통 관심사가 되어 농민들을 군현 단위에서 끌어내어 전국적 규모로 단결하게 한 문제로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공사관의 보고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민란의 수령은 앞서 비밀히 58주〔53주〕의 동학당에게 격문을 띄웠다. 그 목적은 다만 한 郡의 利害에 그치지 않고 먼저 전운영을 파괴하고 나아가 폐정을 개혁하려는 데 있다고 한다. 兵糧은 우선 軍倉의 稅穀을 빼앗아 이에 충당한다고 한다.”0780)巴溪生,<全羅道古阜民擾>(≪주한일본공사관기록≫1), 56쪽.

 농민군은 전운영 문제를 통해 “한 군의 利害에 그치지 않고”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1차 농민전쟁 중에 농민군은 실력으로 전운사를 공격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0781)주한일본공사관의 보고에는 “沃溝의 群山과 靈光의 法聖浦에 주둔하고 있는 동학도들이 함께 轉運船을 공격하여 모두 쫓아냈으므로 운반할 길이 끊겼다. 이 民擾는 다만 백성들만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諸邑의 吏胥들도 轉運하는 데 피폐하였으므로 죽을 힘을 다해 轉運을 폐지하려고 백성들과 함께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였다”라고 하여 농민군의 전운사 공격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1,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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