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3.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
  • 2) 무역·상업 문제에 대하여
  • (2) 국내상업문제에 대하여

(2) 국내상업문제에 대하여

 일본의 무역을 통한 경제적 침투는 직접적으로 조선 농민을 압박하기도 하였지만 국내상인을 매개로 하여 조선민중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폐정개혁안 분류목록 24)는 都賈혁파에 대한 농민군의 요구이다. 일반적으로 객주·여각은 도매상이라는 의미에서 널리 都賈라고도 일컬어졌다. 또한 개항후 개항장에서의 무역은 개항장 객주라는 새로운 상인층을 출현시켰다. 개항장에서 자유상인(상회)이 대두하여 전통적이고 전근대적인 객주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재정부족에 허덕이던 봉건정부로서는 특허독점적인 객주·여각의 체제를 더욱 통제하여 세입의 확보를 꾀하려 하였다.0793)한우근, 앞의 글(하), 155쪽. 객주는 그 독점적인 특권에 의하여 대소 상민을 탐학하였다. 또한 개항장에 있어서는 물론 미개항장에 있어서도 객주·여각은 일본 상인의 매매를 중간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는 중에 그들의 미곡매출을 알선하는 역할도 하고 또 그들의 상품행상인, 즉 보부상에게 연계시켜 주는 기능도 하였다. 객주·여각은 일본인의 미곡매출과 상품매각에 중간매개적 역할을 하여 결국 미곡을 유출시킴으로써 농민군의 공격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각읍 市井의 각 물건에 대한 分錢收稅와 都賈 名色은 혁파할 것’이라는 농민군의 주장은 봉건정부와 이에 결탁한 특권상인들의 分錢收稅를 철폐하고 봉건적 특권상인제도를 철폐하라는 요구로 해석된다. 봉건적 상업정책에서 소외되어 독점적 특권 상인의 지배아래 이윤을 수탈당하던 소상인과 소상품생산자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이러한 요구가 나왔던 것이다. 이는 봉건적 상업체계를 극복하고 소상인의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받으려는 것이었다.

 폐정개혁안 분류목록 25)는 市廛과 褓負商의 폐단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조항을 열거해 놓은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서울의 시전과 지방의 보부상은 상업활동의 핵심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각기 길드적인 조직을 가지고 관부에 대하여 소정의 역(납세)을 지는 대가로 상품 독점매매의 특권을 차지하여 정부와 상호 보상관계를 맺고 있었다. 개항 이후 일본을 위시한 제국주의세력의 경제적 침투로 이들 상인들은 타격을 받았지만, 봉건정부의 봉건적 특권상인체제 강화정책으로 모순이 민중에 전가되었다.

 원래 상업기구인 시전체제는 조선 후기부터 한편으로 정부가 부과하는 과다한 收稅에 시달리고 다른 한편으로 세도가의 豪奴 등에 의한 任意 亂廛 행위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게다가 개항으로 청국상인과 일본상인이 서울에 점포를 개설함으로써 더욱 약화되었다.0794)한우근,<개국후 일본인의 한국침투>(≪동아문화≫제1집,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1963) 참조. 난전이 치성하고 외국상인이 침투해 들어오자 시전상인은 소상인에 대한 분전수세를 강화하려 하였기 때문에 농민군은 ‘각 市廛이 分錢收稅하는 일을 금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보부상단은 1881년 이후로 1885년에 이르는 동안에 정부로부터 비호를 받아 특권적인 행상 길드 조직을 강화하는 동시에 정부에 대하여 일정의 납세와 충성의 의무를 져서 이를테면 완전한 어용집단이 되었다.0795)한우근, 앞의 글(하)(1964), 173쪽. 행상길드 조직으로 장시를 지배하게 된 보부상의 독점적 특권은 일반 상인의 자유로운 상거래를 배제했으며, 그들이 객주여각을 통하여 외래 상품을 구득하여 이것을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역할도 맡았다. 보부상은 특권 어용상인으로 장시를 지배하고 상리를 농단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상인-객주·여각-보부상의 루트를 통하여 외국의 경제적 침투를 가능케 하는 말단조직의 기능을 지니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보부상의 특권적 행위는 소상인과 농민의 원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보부상의 작폐를 금단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 충성하는 집단으로서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과는 원래적으로 적대관계에 서게 되었다. 실제로 농민군토벌의 巡邊使는 보부상을 조발하여 전선을 수호케 하고 정탐의 역할 등을 맡겼다.0796)≪續陰晴史≫上, 307쪽. 첫 전투인 황토현 전투에서 보부상단이 농민군의 적대 편에 섰으며, 갑오 5월에 전라도 금산군 지방의 농민군은 보부상대에 의하여 격파당하기도 하였다.0797)≪주한일본공사관기록≫1, 4쪽. 농민군 또한 보부상을 적대세력으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0798)보부상들은 대체로 동학당들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학당들이 부상들만 보면 죽이기 때문인데, 그 사이에 살상을 당한 (보부상의)수효가 수십명이라고 합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1, 5쪽). 또한 관군이 전주성을 회복할 때에도 보부상단이 정부군과 합세하였다.0799)≪주한일본공사관기록≫1,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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