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1. 집강소의 설치
  • 1) 휴전과 집강소의 설치(5월 8일∼6월 15일경)

1) 휴전과 집강소의 설치(5월 8일∼6월 15일경)

 5월 8일의 全州和約에서 농민군은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왕에게 啓聞하여 실시토록 한다는 약속을 정부측으로부터 받아 내었다. 전봉준 부대가 제1차 농민전쟁에서 현실적 구체적 행동에서는 탐학관리를 응징함으로써 폐정을 개혁한다는 수준에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폐정개혁안의 실시 약속을 정부측으로부터 받아 내었다는 것은 농민군의 행동의 커다란 발전이었고 따라서 농민군의 승리였다.

 홍계훈은 기왕에 각지에서 소집된 鄕兵을 돌려보내고 농민군들에게는 勿侵標를 주어 돌아가는 길의 안전을 보장하고 각 군현에 발령하여 돌아오거나 지나가는 농민군을 체포하지 않도록 조처를 취하였다.0806)<兩湖招討謄錄>, 甲午 5月(≪東學亂記錄≫上, 國史編纂委員會, 1971), 209∼218쪽. 농민군은 和約에 의하여, 그리고 위의 조처에 의하여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무장을 풀지는 않고 기왕의 조직도 대체로는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전투행위는 하지 않았다. 농민군은 폐정개혁의 실시를 구체적으로 보기 전에는 농민군의 무장과 조직을 견지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전봉준은 5월 12일 이전에 淸兵의 退去를 기다려서 재기할 것이니 대기하라고 하였지만,0807)≪駐韓日本公使館記錄≫1(國史編纂委員會, 1986), 89·400쪽. 그러나 꼭 재기하겠다는 의지이기보다는 상황의 여하에 따라서는 재기할 것이니 무장을 해제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취지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전봉준의 통문을 돌리는 자를 잡아서 알아보니, “5·6백명씩 作隊하여 각처 깊은 산에 숨어있다”0808)위와 같음.는 것이었다.

 전봉준은 또한 5월 8일 金溝에서 인솔부대에 다짐하기를 “우선 잠시 행선지에서 安身하고 결코 妄動하지 말라. 京軍과 淸軍이 비록 쫓아와 추격하더라도 결코 相戰하지 말고 기일을 기다리라”0809)≪駐韓日本公使館記錄≫1,<5月 12日 探偵者報告>(國史編纂委員會, 1986), 89∼90쪽, 400쪽.고 하였다. 무장과 조직을 해제하지 않은 채, 폐정개혁의 실시를 지켜보려는 자세의 반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앞서 4월 27일 조정에서는 전주성 함락위기의 책임을 물어 洪啓薰을 待罪行軍케 하고 새로이 李元會를 순변사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내려가서 기왕에 내려간 초토군까지 아울러 지휘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고,0810)≪日省錄≫, 고종 31년 4월 27일. 28일 순변사 이원회는 출발하였다.0811)위의 책, 고종 31년 4월 28일. 이원회는 5월 9일에 전주에 도착하였는데,0812)≪駐韓日本公使館記錄≫1,<5月初 9日 全羅監司電報>, 87·398쪽. 전봉준은 5월 11일 경에는 이원회에게 弊政 14個條의 原情을,0813)≪續陰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60), 322∼323쪽. 5월 17일경에는 弊政 24個條의 追到原情을,0814)위의 책, 323∼324쪽. 5월 18일에는 역시 이원회에게 다시 ‘井邑境東學會生等狀’0815)<營寄>≪隨錄≫(≪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5, 史芸硏究所, 1996), 234쪽.을 제출하면서 일이 所願條列(27개조 폐정개혁안-인용자)대로 되지 않으면 결코 언제까지나 해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폐정개혁안의 조속한 실시를 이원회에게 촉구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5월 20일경0816)‘長城原情’에는 5月만 밝혀져 있고 날짜는 없다. 그러나 “前湖南轉運使趙弼永·均田使金昌錫 施以竄配之典 時東學黨退據長城”이라고 하였는데, 조필영은 5월 20일에 찬배되었다(≪日省錄≫, 고종 31년 5월 20일). 따라서 東學黨의 長城退據時는 5월 20일경이 된다고 생각된다. 전봉준은 제4차 재판에서 전주화약 이후의 전라도 지역 순회경로를 金溝→金堤→泰仁→長城→淳昌으로 말했는데 井邑은 泰仁과 長城 사이에 있으므로 5월 18일에 井邑에 있었던 전봉준이 5월 20일 경에 長城에 갔을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이 ‘長城原情’도 전봉준이 제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長城에서 이번에는 전라감사 金鶴鎭에게 13個條 原情을0817)鄭喬,≪大韓季年史≫上, 고종 31년 5월(국사편찬위원회, 1971), 86쪽. 제출하였는데, 이것 역시 폐정개혁의 실시를 재촉하는 성격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농민군이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상황의 변화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라도 지방에는 농민군의 지배력이 일정하게 성립되고 있었다. “賊이 처음 봉기하였을 때에는 민간에 재물을 약탈하지 않고 다만 郡邑만 범하였기 때문에 愚民들은 賊이 장차 그네들을 살려 줄 것이라고 여겼다. 長城에서부터 전주를 함락함에 이르러서는 노략질이 헤아릴 수 없었다. 전주에서 물러나고서는 좌우도에 만연하여 마을에 있는 말, 노새, 총통, 창, 칼 등을 모두 거두고 부자집을 노략질하여 돈과 곡식을 빼앗아서 가져갔다. 따르는 자가 날로 늘어나고 똘똘 뭉쳐서 흩어지지 않았다”0818)黃玹,≪梧下記聞≫1, 甲午 5月(≪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史芸硏究所, 1996), 86쪽.는 상황이었다.

 전봉준도 제1차 재판에서 전주화약 이후 일부의 不恒之徒는 민간에 剽掠하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농민군 부대와는 관계없다고 하였다.0819)≪全琫準供草≫, 初招問目(≪東學亂記錄≫下, 國史編纂委員會, 1971), 528쪽. 또 전봉준은 5월 4일 訴志에서, 전주입성 이전에 이미 보복과 堀塚과 討財가 있었지만 그것은 ‘우리들도 엄중히 금지하는 바였다’라고 하였다.0820)≪兩湖招討謄錄≫,<賊黨訴志>(≪東學亂記錄≫上), 207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4쪽, 406∼407쪽에도 같은 현상이 지적되고 있다. 金介男은 당시 泰仁接主로서 태인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는데 그 지역에서는 劫掠이 심하였다.0821)黃玹,≪梧下記聞≫2, 甲午 6月(≪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161∼162쪽.

 농민군의 전라도 지역의 사실상의 장악과 폐정개혁 실시에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정부의 폐정개혁문제 외면 등의 사정이 착종되면서 5월 중순경에는 산발적으로 집강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5월 17일경에0822)≪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14쪽, 415쪽에 의하면 이 효유문이 金堤에는 5月 19日에 到付하고 있다. 따라서 감영에서 발포되던 시기는 5월 17일경으로 생각된다.≪梧下記聞≫2, 157쪽(≪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에 의하면 求禮에는 6월 3일에 到付하였다. 감사 金鶴鎭은 다음과 같은 要旨의 효유문을 농민군에게 발하였다.0823)金星圭,≪草亭集≫4, 卷7,<公文>. 金星圭는 당시 金鶴鎭의 從事官으로서 曉諭文을 직접 자신이 作成하였으며, 김학진의 핵심 참모였다(≪梧下記聞≫2, 157∼159쪽 참조).

 제1조에서는 너희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民에게 해를 끼치는 弊政은 작은 것은 본영에서 혁파하고 큰 것은 계문하여 그 혁파를 요청하겠다고 하였다. 제2조에서는 너희들이 사는 面里에 집강을 임명하여, 농민들의 억울한 일이 있으면, 그 집강이 감사에게 직접 訴志케 하여 公決하겠다고 하였다. 농민군이 집강을 두어서 농민의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폐정개혁사업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기에0824)신용하(<갑오농민전쟁 시기의 농민집강소의 설치>(≪한국학보≫41, 일지사, 1985;≪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175쪽)과 이이화(<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②>≪역사비평≫8, 역사비평사, 1990, 343쪽)는 기본적으로는 농민군의 주체적 의지와 주도적 행위에 의하여 이미 제1차 농민전쟁 시기에 설치되기 시작하여 1894년 5월 중에는 전라도의 대부분의 지역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반하여 노용필(<동학농민군의 집강소에 대한 일고찰>≪역사학보≫133, 1992, 103∼106쪽)은 5월 하순부터 농민군 대표가 아닌 자가 집강으로 임명되다가 6월 7일 무렵에는 농민군 대표가 집강으로 임명되었으나 기본적으로는 김학진의 주도와 허용에 의하였다고 파악하였다. 김양식(<1·2차 전주화약과 집강소 운영>≪역사연구≫2, 역사문제연구소, 1993;≪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신서원, 1996, 133쪽)은 김학진의 주도하에 6월 중순부터 집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제의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뒤에서 언급되겠지만 고을 단위로 수령의 일을 행하는 농민군의 執綱을, 그 역할이 감사에의 訴志 보고로 한정되고 감사에 의해 面里 단위로 임명되는 집강으로 격하시키려는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김윤식도 일기에서 5월 중순경,0825)이 기사에 잇따라서 李南珪가 다시 상소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남규의 재상소는 5월 20일에 있었으므로(≪高宗時代史≫3, 고종 31년 5월 20일, 國史編纂委員會, 1969, 458쪽;<甲午實記>≪東學亂記錄≫上, 11쪽) 주21)의 현상은 5월 중순의 것으로 생각된다. “湖匪는 아직도 곳곳에서 屯聚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곳에서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 民이 억울한 일이 있어 호소하면 옳고 그름을 갈라서 즉시 해결하니 오히려 민심을 얻었다”0826)≪續陰晴史≫上, 고종 31년 6월 12일, 318쪽.라고 하였는데, 위의 농민군 집강의 활동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5월 15일에 전라도 지방의 상황을 보고하라는 일본공사의 지령을 받고서 5월 16일에 전보로 보고한 高島유학생(당시 전주에 있었음-인용자)은, 그 보고에서 “어느 곳에서도 동학당의 소요가 재발될 기미가 없다. 우리들은 돌아가도 좋은가”0827)≪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9·410쪽.라고 하였듯이, 농민군은 폐정개혁의 실시를 기다리고 있는 형세였다. 황현은 5월 농민군의 상황에 대하여 “봉준 등은 비록 죽지 못해 倡亂하였지만 또한 이와 같이 潰裂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5월 이후 봉준은 列邑을 순회하면서 節制하려고 하였지만 그의 令은 오히려 시행되지 않고 농민군 부대는 각기 接을 이루어서 오로지 서로 강성하기만을 다투었다”0828)黃玹,≪梧下記聞≫1, 甲午 5月(≪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110쪽.라고 파악하였다. 전봉준의 5월 8일부터의 전라도 순회 즉 金溝(5. 8)→金堤(5. 9)→泰仁(5. 10)→扶安(5. 13경)0829)≪駐韓日本公使館記錄≫1, ‘6월 17일(음력 5월 14일-인용자)에 받은 探報者의 보고’, 70쪽. 그리고 384쪽에서는 “한편 그 全祿斗도 도피하여 살았다는 말이 있는데, 그는 현재 扶安 등지에서 횡행하고 있다 합니다”라고 되어 있다.→井邑(5. 18)0830)주11)과 같음.→長城(5. 20경)0831)위와 같음.→羅州(5. 25경)0832)≪駐韓日本公使館記錄≫3, ‘日本商人 白木彦太郞으로부터의 聞取書要點’, 216·586쪽.→淳昌(6. 6)0833)≪二六新報≫, 명치 27년 11월 21일.→潭陽(6. 10경)0834)≪續陰晴史≫上, 甲午 6月 9日, 316쪽.→南原(6. 15경)0835)≪梧下記聞≫2(≪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179쪽.에서 대체로 장성까지는 농민군 질서의 혼란을 절제하려는 것이었다고 보인다. 나주 유생 李炳壽는 “초토사는 궁한 도적은 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돌려 돌아갔다. 東徒는 초토사가 회군하고 오히려 징계하지 않고 무기를 거두어 들이는 것을 보고는 더욱 더 폭위를 떨쳐 곳곳에서 개미떼같이 둔취하였다”0836)<錦城正義錄>甲編(≪謙山遺稿≫卷 19), 3쪽.라고 하여, 5월 19일의 초토사의 회군을 경계로 한 농민군의 동태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였다. 5월 19일 이전의 농민군 동태의 상대적 安穩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5월 8일에서 5월 18일까지는 기본적으로는 휴전기였으나 그 말기에는 이미 지역에 따라서는 집강소가 설립되어 농민군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폐정을 개혁하는 사업이 시작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월 18일에는 순변사 이원회가, 그리고 5월 19일에는 초토사 홍계훈이 전주에서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갔다. 전주에는 강화영병 200명만이 남게 되었다. 전라도 지방에는 정부측의 무장력이 사실상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울러 정부에서는 계속하여 폐정개혁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제 농민군은 폐정개혁 실시의 촉구를 그만두고 곳곳에서 개미떼같이 屯聚하고 “날마다 봉기하여 列邑을 遍行하며 軍庫를 파괴하여 兵器를 모두 탈취하고, (중략) 전라도 50고을이 문득 邪匪의 소굴이 되었다. 起軍하는 것을 起包라 하였는데 大包·小包의 칭이 있었고 接魁는 接主라고 하였는데 大接·私接의 명칭이 있었으며, 큰 接은 몇 수천인을 훨씬 넘었고 작은 接도 5,6백인을 내려가지 않았다. 또 接司·省察·砲士·童蒙의 칭호가 있었”0837)위와 같음.는데 그 包·接은 대개가 집강소를 가리킨 것이었다고 보인다.

 황현은 5월 하순의 농민군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0838)≪梧下記聞≫1, 甲午 5月(≪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107∼109쪽.

이에 오랫동안 동학에 물들었으면서도 두려워하여 엎드려서 관망하던 자들이 일시에 함께 일어나서 모두 道人이라 일컫고, 僧服을 입고 두건은 쓰지 않고 염주를 목에 걸고서 부적을 붙이고 주문을 외며, 노새나 말을 가려서 타지 않고 총과 칼을 잡고 무리를 이루고 진을 결성하여 산과 들에 가득했다.

대체로 道人이라 자칭하는 자들은 그 학문을 이름하여 道라 하고, 그 무리를 包라고 하며, 그 모이는 곳을 接이라 했다. 그 괴수는 大接主라 했고, 그 다음은 首接主라 하고, 또 그 다음은 接主라 하며, 서로 존칭하여 接長이라 하고, 상대방에게 자기를 下接이라고 했다. 혹 만 명이 한 접이 되기도 하고, 혹 천 명이 한 접이 되기도 하고, 혹 백 명 혹 수십 명도 역시 스스로 한 접이라 한다. 큰 읍은 수십 접이요, 작은 읍은 3, 4접이다.

이들은 어지럽고 수가 많아서 마치 찢어진 솜에 불이 붙은 것처럼 어느 곳에서나 타지 않는 곳이 없고, 엎질러진 수은이 땅에 배듯이 틈마다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여기에 대해서 봉준 등은 역시 두루 형세를 알아서 단속하지 못하고, 다만 서로 물어서 徐布·北布니, 南接·北接으로 그 연원을 찾을 뿐이었다. 대개 南은 곧 徐요 北은 곧 法이니, 이 때에 法布라는 자는 은거해서 道를 닦는 것을 말한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난 자는 오직 徐布였는데, 그 무리들은 이미 이러한 것이었다 한다. (중략)

또 읍마다 접을 설치하여 이를 大都所라고 하고, 한 사람의 접주를 내어 太守의 일을 행하게 하고 이를 執綱이라고 했으니, 수령이 있든 없든 개의하지 않았다. 都所는 또 大義所라고 일컬었고, 도로에 있어서는 行軍義所라고 일컬었다. 그 전하는 문자를 令紙라고 일컫고, 그 법은 귀천이나 노소가 없이 모두 같은 상대로 절하고 揖한다. 포군을 일컬어 砲士接長이라 하고, 童蒙을 童蒙接長이라고 한다. 종과 주인이 모두 入道하면 또한 서로 접장이라고 불러 친구와 같이 한다.

 5월 하순에는 한 고을에 한 사람의 집강이 있는 大都所=都所=大義所=行軍義所=執綱所0839)≪梧下記聞≫2, 甲午 7月(≪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68∼69쪽에서는 都所를 執綱所, 執綱處라고도 하였다.가 전라도 지방에 보편적으로 설치되고 집강은 수령의 일을 하게 되었으며, 집강의 지시를 令紙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감영과 고을의 기존의 행정체계에 사실상 종속되는 面里執綱제도를 허용하겠다는 효유문을 6월 3일에 받아 본 농민군들은 비웃었다고 한다.0840)≪梧下記聞≫2, 甲午 5月(≪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157쪽.

 전라도 지방에서의 집강소의 보편화에는 감사 김학진의 撫局(休戰和約의 局面-인용자)을 유지하려는 농민군 대책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김학진은 4월 18일에 감사에 임명되고 4월 24일의 辭陛에서도0841)≪日省錄≫, 고종 31년 4월 24일. “便宜從事의 권한을 주셔야만 부임하겠습니다”라면서 고종에게 강청하였고 고종은 마지못해 “卿의 所爲에 일임하겠다”라고 허락하였다.0842)≪梧下記聞≫1, 甲午 4月(≪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73쪽. 이러한 농민전쟁 수습에서의 일정한 專決權을 획득하였기에 김학진은 전주화약의 성립에도 “경군과 농민군 양쪽에 사신을 보내어 조정의 명으로써 화해하게 하였다”0843)<甲午略歷>(≪東學亂記錄≫上), 65쪽.라고 하듯이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5월 하순 淳昌에는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순창군수 李聖烈은 城을 지켜 賊을 들이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적은 이미 列郡에 屯據하였고, 京軍은 차례로 北退함에 聲援은 끊어지고 김학진은 연달아 각 고을에 關文을 보내어서 撫局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하였다. 이성렬은 고립되어 대책도 없어서 吏民이 의탁하여 入道함과 都所를 설치함과 執綱을 두는 것을 허용하였다. 경내를 단속하여 다른 고을의 賊이 순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吏民이 원래 그의 정사에 복종하였고 賊도 또한 그의 聲望을 존경하였으므로 감히 세력을 믿고 침범하거나 마음대로 횡포하지는 못하여 고을 사람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성렬은 뜻대로 施政할 수 없어서 울울하고 즐겁지가 않았다. 여러번 가만히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吏民들에게 들켜서 도망가지 못하였다”0844)≪梧下記聞≫2, 甲午 5月(≪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160쪽. 이하에서는≪叢書≫로 略記한다).는 사정이었다. 농민 집강소와 기존의 행정기구가 병립되어 있었지만 농민 집강소 측의 지배력이 우세한 상태였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수령의 政事에 그 무리들(농민군-인용자)은 매일 矯非하여 수령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0845)≪金若濟日記≫, 甲午 6月 2日(≪叢書≫3), 61쪽.는 상황이었다.

 “적은 揚言하기를 ‘관리는 믿어 의뢰할 수 없고 지금 나라는 大亂하니 우리가 마땅히 代天理物하고 輔國安民해야 한다’라고 하고 드디어 砲馬를 거두어 들이고 錢粮을 나누어 주고 사방으로 내려가서 노략질하였다. 亂民이 곳곳에서 봉기하니 천리가 호응하였다. 달포사이에 3남이 들끓고 수령은 혹 도망하여 숨고 혹은 잡히어서 굴욕당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관할지역을 지키는 자가 없었다.”0846)黃 玹,≪梅泉野錄≫(국사편찬위원회, 1971), 甲午 6月, 154쪽. 이러한 수령·농민군 병립 상태하에서 농민군의 行態에 대하여 황현은 다음과 같이0847)≪梧下記聞≫1, 甲午 5月(≪叢書≫1), 109∼110쪽. 서술하였다.

한번 그 黨에 들어가면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 남의 무덤을 파고, 사사로운 債務를 받아 내고, 부자 백성을 겁탈하고, 양반을 욕하고, 官長을 조롱하고 욕하고 吏校를 결박하는 등, 천둥처럼 내닫고 바람처럼 달려서, 그 묵고 쌓인 원통하고 분한 기운을 다 풀었다.

그런 때문에 천한 자가 들어가고, 죄진 자가 들어가고, 사나운 자가 들어갔다. 부자도 혹 들어갔으나 이는 약탈당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나, 들어갔어도 마침내 면치 못했다. (중략)

그러나 당에 富戶가 있으면 또한 주뢰를 쓰기 때문에, 한 달 사이에 50州의 백성이 들 밖에 2頃의 토지가 있고 집에 百金이 있으면 주뢰를 받지 않는 자가 없어, 이에 어지러워지고 짓밟히며, 달리고 모이고 합했다가 흩어져서, 賊 같기도 한데 賊이 아니고, 백성 같기도 한데 백성이 아니며, 수천 리 땅을 반드시 장차 다 없애고 말려고 했다.

 폐정개혁을 목적으로 한 집강소의 설치였지만 그 폐정의 개혁은 ‘묵고 쌓인 원통하고 분한 기운을 다 풀어버리는’ 즉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사업 중심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곳곳에 設接되고 집강소가 설치되어0848)朴周大는 “하루에도 한 고을에서 設接됨이 몇 수십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羅岩隨錄≫(國史編纂委員會, 1980) 甲午 7月, 382쪽. 농민군의 힘이 비약적으로 증강되었으나, 증강되는 농민군은 구성면에서는 빈민·소농·빈농이었고 신분면에서는 천민들이었으며 따라서 집강소 질서의 최대의 특징은 종래의 계서적 신분제 질서의 현저한 붕괴였다.

그런 때문에 私奴·驛人·巫夫·水尺 등 모든 천인들이 가장 즐겨 여기에 따랐다.0849)≪梧下記聞≫1, 甲午 5月(≪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107∼109쪽.

 상황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김학진은 6월 초에도 다시 효유문에서0850)≪草亭集≫4, 卷 7, ‘三諭道內亂民文’, 28쪽. 내용상으로는 5월 17일경의 효유문(再諭道內亂民文-인용자)을 반복하면서 전혀 위압함이 없이 농민군의 진정을 애걸하였다. 농민군에 의한 집강소의 보편적 설립을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김학진은 6월 7일 다시 다음과 같은 효유문을 발포하였다.0851)≪草亭集≫4, 卷 7,<公文>, 29∼30쪽. 작성은 5월이지만 앞뒤 사정으로 보아 발포는 6월초로 생각된다.

四諭道內亂民文 開國 503년 甲午 6월 초7일

본 감사가 너희들을 曉諭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너희들의 訴冤도 또한 누차 있었다고 알고 있다. 너희들이 아직도 觀望하고 있음은 실은 의구하는 심정 때문임을 진실로 알겠다. 言文이 번거롭고 반복됨을 거리끼지 않은 所以는, 너희들로 하여금 聖上의 至意와 본 감사의 苦心을 洞然하게 알게 하고자 함이었다. 지금 너희들이 兵器를 반납한 것을 보고, 그리고 너희들이 몹쓸 사람들이 騷擾하는 것을 몹시 미워하고 엄금한다는 것을 보니, 너희들의 良善한 實心을 믿을 수 있다. 기왕의 너희들의 일도 窮迫에 말미암았으니 더욱 측은하다. 본 감사의 본의가 지금에야 성취될 것 같아 또한 정말 다행이다. 또 李容仁의 口伝에 의하면 너희들이 가지고 있던 各邑軍物은 각기 所在邑에 반납한다고 하는데, 각 고을 수령에게 반납무기의 소상한 기록도 반드시 제출해서, 즉시 감영에 轉報토록 할 것이며, 농민군 중의 무뢰배들이 東學을 가탁하여 그 더러움으로써 良善한 너희들을 더럽히니, 지방의 患害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너희들에게도 원수가 되는 것이다. 각 고을에서 그 자들을 탐문해서 잡을 때에 혹 선량자와 해악자를 잘못 가려 事端을 일으킬까 우려된다. 너희들이 각기 그 고을에서 謹愼하고 有義한 자를 뽑아서 執綱으로 삼아 발각되는 대로 잡아서 그 고을에 넘겨서 처리케 하고 혹 執綱이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그 해악자의 이름을 수령에게 알려서 수령이 法대로 체포하게 하되, 혹 적격이지 않은 자를 執綱으로 맡겨서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폐단을 낳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난 날 羅州에서의 刑殺은 너희들을 오해했을 때의 일이고, 오늘 이후로는 본 감사가 올바르게 처리하겠다. (하략)

 김학진은 한 고을에 한 명의 집강을 농민들이 뽑도록 하고, 원한 풀기 위주의 ‘不法’의 제어에는 집강의 專權을 인정하고 최종단계의 처벌집행은 기존의 행정체계에서 장악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농민군과의 合力으로써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인다. 이것은 농민군의 집강소 질서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이었다. 농민군의 집강소 질서의 보편적 성립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위의 효유문에는 6월 7일 이전에 농민군 중의 일부에서 무기를 고을에 반납하고, 농민군 중의 일부 과격파가 소요하고 剽掠하는 것을 금제하고 나아가서는 체포하는 움직임도 있었다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전봉준 부대의 경우였다.0852)≪梧下記聞≫2, 甲午 7月(≪叢書≫1), 182∼183쪽.
≪隨錄≫6月(≪叢書≫5), 243∼244쪽.

 이 시기 농민군 집강소의 질서는, “이 때 湖南賊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金箕範 등은 右道를 경영하였고 전봉준은 左道를 경영하였다”라거나,0853)≪梧下記聞≫2, 甲午 5月(≪叢書≫1), 157쪽. 주 49)로 미루어 보아서 左右자가 바뀌었다고 보인다. “全琫準은 수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金溝院坪에 屯據하여 全羅右道를 통솔하였고, 金開南은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南原城에 둔거하여 전라 左道를 통솔하였으며, 그 이외 金德明·孫和中·崔景善 등도 각기 한 지역에 둔거하였다”0854)<甲午略歷>(≪東學亂記錄≫上, 65쪽).라고 하였듯이, 전봉준·김개남·김덕명·손화중·최경선 등은 각기 한 지역을 장악·지배하고 있었다. 6월 이후 金仁培도 순천을 근거지로 하여 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부근 일대를 장악·지배하였다.0855)<巡撫先鋒陣謄錄>(≪東學亂記錄≫上, 680쪽). 이하에서는≪記錄≫으로 略記한다.

 제1차 농민전쟁 때에도 3월 25일의 白山 농민군대회의 경우 농민군 최상층에서의 서열만 조직화·체계화되었을 뿐, 행동은 전혀 분산적·분할적으로 행동하였고, 휴전기에서의 ‘각기 接을 이루어서 오로지 서로 강성하기만을 다툰’ 분할성이 집강소 초기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분할성에 따라서 각 지역의 집강소 질서도 상대적으로 특색이 있었는데 “탐학하고 不法하기로는 金開南이 으뜸이었다. 全琫準의 경우는 東學敎徒에 빙자하고 의뢰하여 革命을 도모하였다. 이른바 우두머리들은 각자가 大將이라 일컫고 誅求를 일로 삼아 전봉준의 단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전봉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상태로 7월이 되고 8월이 되면서 무법천지는 더욱 심해져서 부자들은 모두 고장을 떠나고 賤民들은 모두 도량하여 討財할 뿐만 아니라 宿怨을 풀기도 하였던 바, 호남 일대가 混沌世界로 되었다”0856)<甲午略歷>(≪東學亂記錄≫上, 65쪽).라고 하였듯이 ‘묵고 쌓인 원통하고 분한 기운을 다 풀어버리는’ 행태는 김개남의 장악·지배지역에서 상대적으로 현저하였다.

 이 무렵 전봉준의 장악·지배지역은 興德이남 羅州이북 일대의 지방이었다고 생각된다.0857)주 25)∼29)에서와 같이 5월 20일에서 6월 10일경까지 전봉준은 흥덕 이남 나주 이북 지역을 순행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의 집강소 질서를 정비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지역의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동학당은 지금 더욱 더 창궐하여 무장·장성·정읍 등지는 현재 동학당의 집결지로 되어 있고 지방관 같은 것은 유명무실하여 동학당에게 좌우된다”0858)≪駐韓日本公使館記錄≫3, ‘本艦 分隊長 福井大尉 聞取書始末’, 214·585쪽.라거나 “흥덕이남 나주이북 일대의 지방에서는 모든 政令이 모두 黨人의 손에서 나와 지방관은 단지 그 콧김을 살피는 형편이 된 일”0859)위의 책, 210·582쪽.이라는 보고가 있다. 6월 15일까지 恩律의 黃山에 체류하면서 전라도 지방의 농민군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돌아온 白木彦太郞은 그 보고에서 “지금 나주에 있는 全明淑(전봉준-인용자) 및 光州의 손화중 등으로 현재 5천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다”0860)위의 책, 216·586쪽.라고 하였음에서도 전봉준의 장악·지배 지역은 흥덕이남 나주이북 일대의 지방임이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손화중의 장악·지배지역은 광주 일대라고 생각된다.

 5월 하순 쌀을 매입하러 흥덕에 체재하였던 日高友四郞은 인천영사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0861)위의 책, 210·582쪽.

과연 5월 28일(7월 1일) 밤 東徒의 接主(2,000∼3,000명의 首領이라고 함) 한 사람이 그 수하인 30명 정도를 인솔하고 旅舍에 와서 사들인 쌀의 有無를 묻기에 있다고만 말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현재 이곳 근방의 米價의 폭등을 초래한 것은 해외수출이 심히 많은 데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너희들 日本人들이 이 內地까지 들어와서 米穀을 買集하면 土着民들이 졸지에 飢饉으로 죽을 지경이 된다. 따라서 금일부터 防穀을 嚴行하게 될 것이므로 勺合도 실어내지 못한다”는 뜻을 말했기 때문에, 나는 조약에 의거하여 정당한 수속을 밟고 內地에서 行商하는 자임을 내세워 抗辯하고 또 防穀令은 어느 곳에서 발포한 것인지 또 令文이 있는지 반문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懷中에서 한통의 公文같은 것을 끄집어내면서 東學黨의 首領으로부터 發令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동학당의 수령’인 전봉준은 5월 28일에 자신의 장악·지배지역 일대에 방곡령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보고에서 “東徒는 항상 富豪者로부터 財穀을 강탈하여 貧困者에게 賑恤하고 혹은 약탈한 미곡을 時價에 비하여 5, 6할 廉價로서 방매하는 등 일반 인민의 歡心을 사는데 급급한 상태였다”0862)위와 같음.라고 하였다. 그리고 위의 방곡령 공문을 본 日高友四郞이 “그래서 곧 謄書를 시작하려 하였으나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서 懷中에 넣어버렸으며 또 말하기를 ‘일본인이 조약에 의거하여 미곡을 사들였다고 말하면 지금 잠시 이것을 의논해야만 하겠지만 현재 이 都賣商 倉庫에 쌓아놓은 것이 都賣商이 사들인 물건이면 모두 다 실어내게 하라’는 말을 하였다. 현장의 실황을 살펴 보건대 도저히 이론으로써 저항하는 것은 불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서 여러 방면으로 손을 써서 중재를 신청해 당시 사들인 쌀 百石만 무사히 실어낼 수 있었다”0863)위와 같음.는 것이었다. 전봉준 부대의 경우에는 외국과의 조약은 준수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으며, 都買행위는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전봉준의 장악·지배지역에서는 ‘묵고 쌓인 원통하고 분한 기운을 다 풀어버리는’ 질서에서 벗어나서, 민생문제를 현실적·구체적으로 해결하는 집강소 질서가 구축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봉준은 6월 6일 순창에서 일본인 鈴木을 만나, 그의 질문에 당시 列邑을 순행하는 목적은 폐정을 개혁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0864)≪二六新報≫, 명치 27년 8월 11일, ‘馬嘶劍鳴錄’(≪사회와 사상≫1, 한길사, 1988, 252쪽)에 의하면 전봉준은 약 500명의 부대를 거느리고 6월 6일 순창에 체재하고 있었다. 위에서와 같은 방곡령 실시, 도고의 응징도 결국은 폐정을 개혁하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弊政의 개혁은 농민군의 일방적 자의에 의해 시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6월 7일 이전 6월초의<全琫準等再上書>에서 “우리들의 이번 거사(농민봉기-인용자)는 탐관의 剝割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우리가 거쳐가는 고을들에서 작은 폐정은 수령에게 건의하여 시정하고 큰 폐정은 감영에 제출하여 시정한다”0865)≪隨錄≫6月(≪叢書≫5), 245쪽.라고 하였듯이, 폐정개혁의 마지막 단계는 고을과 道의 행정체계 안에서 마무리하는, 그러한 合力과 協力의 틀 속에서의 농민군 주도의 폐정개혁이었다고 생각된다.

 5월 하순 염찰사 엄세영은 “봉준에게 가서 서로 깊이 結하고 전봉준의 포사 10명을 구걸하여 前導로 삼고 구례에 이르렀다”0866)≪梧下記聞≫2, 甲午 5月(≪叢書≫1), 160쪽.고 하는데, 전봉준의 장악·지배의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전봉준은 6월 9일에는 순창에서 담양으로 갔고0867)≪二六新報≫, 명치 28년 8월 11일, ‘마사검명록’ 제5회(≪사회와 사상≫1, 252쪽). 이어서 6월 15일경에는0868)≪梧下記聞≫2(≪叢書≫1), 179쪽. 남원으로 갔는데, 역시 모두 폐정을 개혁하기 위한 각지 순행의 지속이었다고 생각된다. ‘以圖革命’의 혁명은 기왕의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되고, ‘不聽約束’의 약속은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지향에서 묵고 쌓인 원통하고 분한 기운을 다 풀어버리는 ‘不法’의 형태를 단속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전봉준은 순창에서 6월 7일에 天佑俠에 보낸 회답서장에서 “심하도다, 유교의 道가 행하여지지 않는 것이”라면서 ‘民惟邦本 本固邦寧’ 이념을 재강조하고 있다.0869)≪二六新報≫, 명치 27년 8월 15일, ‘마사검명록’ 제7회(≪사회와 사상≫1, 255쪽). 이렇게 볼 때 ‘새로운 질서’란 ‘유교의 본래적인 道’가 행하여지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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