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1. 집강소의 설치
  • 2) 집강소 설치의 전면화(6월 15일경∼7월 5일)

2) 집강소 설치의 전면화(6월 15일경∼7월 5일)

 황현은≪梧下記聞≫2의 7월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0870)≪梧下記聞≫2, 甲午 7月(≪叢書≫1), 179쪽.

이달 보름 무렵에 全琫準 金開南 등이 南原에서 大會를 하였는데 무리가 수만명이었다. 전봉준이 各邑의 布에 令을 傳하여, 邑에 都所를 설치하고 그 親黨(농민군-인용자)에서 執綱을 두어서 守令의 일을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道內의 軍馬錢糧이 모두 賊(농민군-인용자)의 것으로 되었다. 사람들이 逆謀가 이미 이루어져 그칠 수 없고 亂民이 되었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金鶴鎭은 농민군이 休戰과 타협에 응함을 믿고 의뢰해 대응태도를 확정치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우선 ‘是月’이 집강소 발전의 시기 획정에서 중요한 관건이 된다. 7월조의 부분에서 是月이라고 하였으니까 7월로 파악할 수도 있다.0871)이이화,<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②>(≪역사비평≫8, 1990), 344쪽;김양식,<1·2차 전주화약과 집강소 운영>(≪역사연구≫2, 역사문제연구소, 1993);≪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신서원, 1996), 148쪽. 그러나 ‘是月望間의 南原大會’ 이후 김학진과 전봉준 사이에 일련의 교섭이 있었고 그 뒤 7월 6일에 김학진과 전봉준이 전주감영에서 만나서 새로운 질서의 집강소에 합의하였으므로 是月은 6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0872)신용하,<갑오농민전쟁 시기의 농민집강소의 설치>(≪한국학보≫41, 일지사, 1985);≪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일조각, 1993), 182쪽 참조.

 6월 15일 무렵 전봉준과 김개남은 남원에서 농민군 대회를 열고 각 고을에 都所(執綱所-인용자)를 설치하고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두어 수령의 일을 행하도록 각 고을의 농민군에 令을 내렸다. 농민군에 의한 집강소가 본격적으로 설치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집강소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결과 집강소는 軍馬와 公錢 그리고 公穀을 관리하는 지방행정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지방행정기관으로서의 집강소가 羅州를 제외한 전라도의 모든 지역 52개 고을(당시 전라도에는 56개 고을이 있었는데, 제주도의 제주·대정·정의고을이 제외됨)에 설치되었다.0873)李炳壽,≪錦城正義錄≫甲篇(≪叢書≫7), 10∼11쪽. 전봉준과 김개남이 ‘묵고 쌓인 원통하고 분한 기운을 다 풀어버리는’ 행태에서 ‘새로운 질서수립’ 위주의 행태에로 집강소 질서를 전환시키는 데에 합의하였기 때문에, 행정기관으로서의 성격이 보다 더 강화되는 집강소를 본격화시키는 이러한 새로운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농민군 집강소의 본격적 전개에 대하여 김학진은 대책을 결정하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김학진은 7월 1일 무렵에0874)7월 6일의 전봉준과 김학진의 전주회담에 선행되는 것으로 보여, 7월 1일 무렵으로 생각된다. 전라도의 고을들에 甘結을 보내었는데 그 속에서, 농민군이 낸 原情을 보니 “지금 이 革旧自新의 때에 하늘이 내린 떳떳한 良心이 있음을 알겠다. 지금 이후에는 모두가 개과한 平民이니 지난 허물을 절대로 지목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그들의 말이나 출입에 털끝만큼이라도 거리낌이나 막힘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중략) 무뢰배로서 빙자해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는 농민군 중에서 執綱을 정하여 잡히는 대로 본 고을에 넘겨야 할 것이다. (중략) 탐사해서 잡아들임에 혹 소홀함이 있어 부득불 지방관에게서 힘을 빌려야 할 경우에는 고을 수령은 농민군 집강의 來告대로 校差를 보내어서 농민군과 합력하여 체포하도록 해야할 것이다”0875)≪草亭集≫4, 卷 7,<公文>, ‘甘結53州’, 31쪽.라고 말하고 있다. 소란을 일삼지 않는 농민군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 농민군 집강의 현실적 권한의 자율성을 폭넓게 인정하는 점 등으로 보아 집강소 질서의 확대화·강화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인다.

 남원대회를 전후하여 농민군의 숫자는 더욱 불어나 “列邑에는 모두 接主가 있고 大接은 수만여 인이었고 小接도 수천 인이나 되었다”0876)金在洪,≪嶺上日記≫, 甲午 6月 25日(≪叢書≫2), 285쪽.고 한다. 公州에서도 공주 한 고을 안에 接이 수십여 개이고 그 중 大接은 1천여 인이며, 小接도 300∼400인을 내려가지 않았다고 한다.0877)李丹石,≪時聞記≫, 甲午(≪叢書≫2), 177쪽.

 이 시기의 이러한 농민군의 증가도 형태상으로는 동학교회의 형식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황현은 입도하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전에는 입도절차에서 요구되었던 주문외우기도 생략한 채 입도식이 거행되었다고0878)≪梧下記聞≫1(≪叢書≫1), 109쪽. 하였고, 오지영도 “布德에 대하여 무더기로 式을 행하였었다. 한 마당에서 10인이나 100인 이상의 다수가 입도를 하였다”0879)≪東學史≫, 152쪽.라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외형상의 형태는 동학교문의 接이었지만 실체는 농민군이었기 때문에 李圭泰도 “지금 匪類들은 무리마다 接들이 있는데 接主는 곧 그 接의 괴수이다”0880)<李圭泰往復書幷墓誌銘>(≪記錄≫下), 503∼504쪽.라고 하여 接을 농민군 부대, 接主를 농민군 부대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농민군의 압도에 따른 단위 교문으로서의 接의 팽창에 따라 接의 내부조직이 敎政과 軍政으로 분화되어 나가고 있었다고 보인다. 예컨대 황현은 “그 접주 이외에 또 都接·接師·講師·講長·敎場·敎師·敎授 등의 명목이 있으니 이는 모두 포덕때 쓰는 것이요, 省察·檢察·糾察·周察·通察·統領·公事長·騎砲 등의 명목은 모두 起布때에 쓰는 것이다”0881)≪梧下記聞≫1(≪叢書≫1), 104쪽.라고 하였는데, 布德조직에는 都接이하 敎授까지가, 起布(=起包-인용자) 조직에는 省察 이하 騎砲까지가 있었고, 이 양자를 총괄하는 것이 接主였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布德(敎政)과 起包(軍政)로 接의 내부조직이 분화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接主는 “領率之稱”0882)≪全琫準供草≫(≪記錄≫下), 535쪽.이며 “領率徒衆者”0883)≪甲午略歷≫(≪記錄≫上), 67쪽.였다.

 이 시기의 집강소는 이전에 비하여 행정기관화의 경향을 증대시키면서 堀塚이나 討財 등의 행위는 규제되고 있었으나 富民에의 討財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討財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부자를 협박하여 金穀을 빼앗아와 이를 빈민에게 (값싸게) 나누어주고 (중략) 빈부를 고르도록 하여 소수인으로 하여금 부를 오로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데 있다”0884)≪東京日日新聞≫, 명치 27년 8월 5일(음력 7월 5일-인용자). (박종근,≪청일전쟁과 조선≫209쪽에서 재인용). 음력 7월 5일의 보도이니까 6월 20일경의 상황이었다고 생각된다.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전봉준의 장악·지배지역에서의 농민군 행태의 지속으로 생각된다. 전봉준이 장악한 지역의 집강소에서는 均産主義的 이념이 농민군의 행동에서 현실화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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