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1. 집강소의 설치
  • 3) 집강소의 공인 (7월 6일∼10월)

3) 집강소의 공인 (7월 6일∼10월)

 黃玹은≪梧下記聞≫2, 甲午 7月條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0885)≪梧下記聞≫2, 甲午 7月(≪叢書≫1), 65∼66쪽.

서울에서의 亂(6월 21일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인용자) 소식을 들은 후 김학진은 군관 宋司馬를 사신으로 삼아 편지를 가지고 남원에 있는 전봉준에게 보내었다. 宋사마는 전봉준 등을 설득해서, 동맹하여 國難(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인용자)에 함께 힘쓰고 농민군을 거느린 전봉준과 함께 전주를 지키고자 하였다. 전봉준이 농민군 일부의 소란행위를 금제하고 무기를 반납한다고 했기 때문에 김학진이 전봉준을 초청하여 그 거취를 보고자 한 것이다. 전봉준은 편지를 받고 나서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내가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고 내가 亂을 일으킨 것을 속죄하겠다”면서 수락하였다. 드디어 무리를 정돈하고 전주로 갈 계획을 세웠다. 김개남은 전봉준의 계획에 응하지 않고 부하들을 이끌고 지름길로 돌아갔다. 전봉준이 전주로 옴에, 전주에 가까워지자 무리들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많이 도망가고 다만 가까운 동지 사오십명만 함께 들어왔다. 전봉준이 선화당에서 김학진을 만났는데, 김학진이 길 양편에 무장한 군인들을 배치시켜 놓았으므로 전봉준 등이 긴장해서 얼굴색이 변하였다. 전봉준 등은 머리를 조아리고 타이르는 말을 들었으며 군사력으로 쓰여지기를 원하였다. 김학진은 전봉준을 신뢰하여 전봉준에게 “그대가 항복하면 나머지 賊들은 종이 한 장으로 부를 수 있으니 큰 공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서, 마침내 진심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속마음까지 내보이며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전라도 일대의 軍政을 모두 전봉준에게 넘겨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아있던 京軍마저 모두 돌아가니 감영의 군사력은 아주 약해졌다. 김학진은 지식인 관료로서 부하를 통솔하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전봉준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의 죄가 막중하여 용서받기가 어렵고 또한 다수의 농민군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제어할 수도 없고, 서울의 安危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호남 전체를 차지하고 정치국면 전체의 향방을 살필 수만 있어도 이 또한 견훤이 한쪽을 지배하였던 국면은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김학진을 옆에 끼는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호남을 專制하였다. 김학진의 좌우에는 모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 놓고 몰래 다른 농민군 부대를 불러들였으니 명분은 성을 지킨다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성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김학진은 마치 꼭두각시처럼 되어 기거하고 기침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다만 전봉준의 文書를 받들어 시행할 뿐이었으니 김학진을 사람들이 道人監司라고 일컬었다.

 전봉준과 김학진은 7월 6일0886)≪隨錄≫, 甲午 7月(≪叢書≫5, 275쪽);≪梧下記聞≫2, 甲午 7月(≪叢書≫1, 68∼69쪽);6월 초에 전봉준이 전주감영으로 김학진을 찾아가서 회담한 결과 일정한 합의가 도출되었다는 파악도 있다(노용필,<동학농민군의 집강소에 대한 일고찰>(≪역사학보≫133, 107쪽)). 이러한 파악은 “6월에 관찰사가 전봉준 등을 감영으로 불렀다. 이때 성을 지키는 군졸들이 각기 총과 창을 가지고 좌우에 정렬하고 있었는데 전봉준은 삼베옷에 높은 갓을 쓰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들어왔다”(<甲午略歷>,≪東學亂記錄≫上, 65쪽)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성을 지키는(하략)”의 이때는 6월과 분리해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즉≪隨錄≫과≪梧下記聞≫2의 7월 6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전주에서 회담하였다. 회담의 결과는 ‘官民相和’0887)鄭碩謨,<甲午略歷>(≪記錄≫上), 65쪽.의 원칙 하에서 ‘道人과 政府 사이에는 宿嫌을 蕩滌하고 庶政을 協力할 事’0888)吳知泳,≪東學史≫(永昌書館, 1940), 126쪽. 즉 농민군과 전라도 지방권력과의 타협과 협력에 의한 庶政의 쇄신과 전라도에서 군사적 지휘권을 전봉준이 장악한다는 것에 대한 합의였다. 여기에서 집강소 질서가 김학진에 의하여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타협과 협력에 의한 庶政의 쇄신이지만 군사적 지휘권이 농민군측에 의해 장악되었던 만큼 농민군 주도와 우세에 의한 庶政의 쇄신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전봉준의 文書를 받들어 시행할 뿐인” 김학진을 사람들이 道人監司라고 일컬었다“는 것이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사정을 公州儒生 李容珪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0889)李容珪,≪若史≫(≪叢書≫2), 235쪽.

신감사 金鶴鎭은 겁을 먹어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礪山에 이르러 한 달 가량을 체류하였다가, 전봉준이 전주성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감영에 들어갔다. 전봉준은 歸化하였다고 일컫고 단신으로 감영에 들어와 監司의 일을 맡아 하였다. 巡營의 關文 甘結은 반드시 전봉준의 결재가 있은 연후에야 列邑에서 거행하였다. 전봉준이 여러 날 행정을 실시하면서 刑殺은 없었으나 兩湖의 大禍가 釀成되었던 것이다.

 전감사 김문현의 군사마였던 崔永年은 “김학진은 (중략) 그 도임에 미쳐서는 宣化堂을 敵에게 내어주고 스스로 澄淸閣에 居하였는데 每事는 賊에 의하여 행해졌다”0890)崔永年,≪東徒問辨≫, 갑오 7월(≪記錄≫上, 160쪽).라고 하였고, 황현은 “김학진은 賊에게 동정을 구걸하고 적의 호령에 빙자하였으니 마치 奉行하여 關和하는 것 같았다”0891)≪梧下記聞≫2(≪叢書≫1), 184쪽.라고 하여, 김학진과 전봉준의 타협·합작을 비난하였고, 나아가서는 “아침에는 학진의 머리를 매달아 게시하고 저녁에는 전봉준의 시체를 찢었으면 좋겠다”0892)위의 책, 181쪽.고까지 비분강개하였다. 이렇게 전직관료나 보수적 유생이 비분강개하는 까닭은, 본격화는 되었지만 아직은 농민군에 의한 일방적인 행동이었던 집강소가 7월 6일부터는 김학진측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인정된 집강소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官民相和의 執綱所 질서에서의 양측의 合力·協力의 한 사례를 다음에서 볼 수 있다.0893)≪隨錄≫(≪叢書≫5), 275∼276쪽과≪梧下記聞≫2, 甲午 7月(≪叢書≫1), 279∼280쪽을 종합하였다.

甘結 茂朱

 (상략) 이달 초 6일에 전봉준이 그 무리들을 데리고 영문으로 와서 나와 만나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은 후 또 牢約(굳은 언약-인용자)을 정했다. 모든 고을의 執綱에 보내는 通文을 지었다기에 그 통문을 받아서 보니 말이 實心에서 나왔고 일이 모두 이치에 맞고 지성스럽고 절실하여 지극함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어, 고로 그 대개를 들어서 左에 기록하여 이에 다시 甘結을 발포하니 到付하면 언문과 한문으로 마을마다에 게시하여 대소민인으로 하여금 경계하고 삼가 거행토록 하며 (하략)

甲午 7月 初 8日

 都巡使

 後

 각읍 집강처에의 全琫準通文. 원래의 통문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들의 이번 거사는 오로지 民을 위하여 폐해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오직 저들 교묘하게 남을 속이는 부랑배들이 도량하고 날뛰며 평민을 해치고 마을을 해쳐 소소한 미움과 작은 허물이라도 까딱하면 반드시 보복하니 이는 德을 거스르고 善을 해치는 무리들이다. 각읍 집강으로 하여금 밝혀 살피고 금단할 일이다.

 後錄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一. 이미 거둔 砲槍刀馬는 이미 公納에 속한다. 각 접주에 通文을 돌려서 砲槍刀馬의 수효·소지자의 성명과 주소를 소상하게 기록하여 두 책으로 成冊하여 단장하고 종이에 싸서 감영에 제출한 후에 한 책은 감영에 두고 한 책은 각 집강소에 두어서 뒷날의 참고로 삼는다.

 一. 驛馬와 商賈馬는 각기 본주인에게 돌려준다.

 一. 지금부터 앞으로는 砲를 거두고 말을 거두는 것은 일체 금지한다. 돈과 곡식을 토색하는 자는 이름을 밝혀서 감영에 보고하여 軍律에 의해 처벌한다.

 一. 남의 묘를 파헤치고 私債를 거두는 것은 시비를 막론하고 절대로 시행해서는 안된다. 이를 어기는 자는 감영에 보고하여 律대로 시행한다.

 전봉준의 집강소에의 通文이나 지시는 김학진 휘하의 행정체계를 통하여 전달되고 있는데, 이것도 양측의 협력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전봉준은 보복 위주의 행태나 쌓인 원한을 분풀이하는 식의 행태를 지양하고 질서 속에서의 庶政쇄신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이 지향에서 양측은 대체로 합의하고 合力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봉준이 이렇게 집강소 질서를 안정화시키려는 지향에는, 당시의 국내외 정치정세에 대한 깊은 고려까지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봉준이 전주의 都所에서 7월 17일에 각 집강소에 내린 通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0894)≪隨錄≫(≪叢書≫5), 278∼279쪽.

방금 外敵이 대궐을 침범하여 君父가 욕을 당하고 있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일제히 나아가서 義에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그 외적은 바야흐로 淸兵과 敵對하여 그 기세가 심히 날카로워 지금 우리가 급하게 항쟁하면 그 화가 宗社에 미칠른지도 모른다. 물러나 몸을 감추고 시세를 관망하면서 우리의 기세를 돋구고 계책을 이루기를 힘써 만전의 책으로 삼는 것이 타당하다. 바라건대 모름지기 경내 각 접주에게 통문을 발하여 각 접주들과 직접 대면하여 상의하여 접주들은 민이 각기 생업에 안정하도록 하고, 경내의 무뢰배들을 금제하여 그들이 마을을 횡행하면서 소동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

이와 같이 거듭 훈계한 후에도 이런 폐해를 고치지 않는 무뢰배는 집강이 감영에 보고하여 엄히 처단하고 용서하지 말며 接人(집강소 소속인-인용자)이 금제를 어기면 마땅히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시행해야 할 것이다. 해이해지지 말라.

 6월의 일본군 경복궁 점령사건으로 말미암은 국내외 정치정세가 농민군의 행동에 큰 변수·조건으로서 고려되고 있었다. 전봉준은 대세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농민군의 집강소 하에서의 서정의 쇄신에 기반하여 지방질서를 안정화함으로써 새로운 행동을 위한 역량을 기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6월 하순 전봉준에게 동맹을 제의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김학진의 대외정세인식에서도 양자는 공통성이 있었고, 이에 기반하여 양자의 타협과 협력이 전라도에서 질서화될 수 있었다. 어느 일방의 결정·결재에 의하지 않고 양방의 결정·결재의 공존하에서 지방행정이 운영되고 있었다. 예컨대 金澈圭는 7월 3일에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는데0895)≪日省錄≫, 고종 31년 7월 3일. 그가 여수의 좌수영에 도임하는 데에는 전봉준의 標信과 전봉준부대 省察 4名의 護行이 있어서야 실현되었다.0896)≪梧下記聞≫2, 甲午 7月(≪叢書≫1), 184∼185쪽.

 정부에서는 6월 22일에 김학진을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장흥부사인 박제순을 전라감사에 임명하였다.0897)≪日省錄≫, 고종 31년 6월 22일. 그러나 김학진은 병조판서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박제순이 7월 8일 무렵에0898)≪日省錄≫, 고종 31년 7월 8일. 전주에 이르렀으나 김학진은 7월 10일 무렵에 “東徒들이 제가 병조판서로 나아가는 것을 말리고 있습니다. 만일 臣이 하루라도 없으면 撫局이 장차 무너지고 前功이 모두 무너지며, 후환이 악화될 것입니다”라고 계청하였다.0899)≪梧下記聞≫2(≪隨錄≫1), 180쪽. 이에 박제순은 김학진의 拒命에 분개하여 7월 17일에 김학진을 挾賊要君이라고 규탄하면서 전라감사직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0900)≪日省錄≫, 고종 31년 7월 17일;≪梧下記聞≫2(≪隨錄≫1), 180쪽. 여기에서는 김학진의 병조판서 취임도 양측의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고 있었다. 황현은 이를 가리켜 “김학진은 부름을 받은지 달포가 되었는데도 전봉준 등에게 만류당하여 출발할 수가 없었다”0901)≪梅泉野錄≫, 甲午 7月條, 157쪽.라고 하였다.

 나주목사 민종렬과 나주영장 李源佑는 7월 18일 파직되고 있다.0902)≪梧下記聞≫2, 甲午 7月條(≪隨錄≫1), 195쪽. 여기에는 파직일자가 없는데,≪日省錄≫고종 31년 7월 18일에 의하면 민종렬은 7월 18일에 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任所에 있다는 이유로 같은 날에 교체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서 파직일자를 7월 18일로 추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황현은 “전봉준이 나주에서는 道人을 많이 죽였다는 이유로서 학진을 위협하여 두 사람 (민종렬·이원우-인용자)을 論罷함으로써 道人들의 마음을 위로하였다”0903)≪梧下記聞≫2, 甲午 7月條(≪叢書≫1), 195쪽.라고 하였다. 지방수령의 임면문제도 양측의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고 있었다. 전봉준은 8월 중순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고 있는 나주에 들어가서 그 거부를 취소할 것을 권유하는0904)전봉준은 제4차 재판에서 “8월 그믐께 감사의 令을 가지고 나주에 가서 民堡軍을 해산할 것을 권하고”라고 하였다(≪全琫準供草≫, 552쪽). ‘8월 그믐께’는 8월 중순을 잘못 기억한 것으로 보인다. 감사의 지시를 제시하면서 집강소 설치를 수용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나주목사 민종렬은 끝내 거부하였고 전봉준은 14일 장성에서 나왔다. 나주에는 끝까지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았다.

 이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김학진이 전봉준 부대나 농민군 부대의 무력에 위압되어서만 농민군과의 타협, 官民合作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학진은 이미 6월 22일에 병조판서 발령을 받았으므로 전주를 떠나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다. 6월 21일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이후 조성된 국가적·민족적 위기 상황 속에서 ‘共守全州 同赴國難’ 구상을 다듬으면서 6월 28일경에는 그 구상을 전봉준·김개남에게 제의하였고, 7월 6일에는 전봉준과 회담하여 官民合作의 타협을 성립시키고 7월 10일 경에는 병조판서 임명을 취소해 줄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였다. 당시의 정치질서에서 이러한 경우는 파격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김학진은 그런 파격을 무릅쓰면서 官民合作의 집강소 질서 수립에 진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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