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2. 반일투쟁의 전개
  • 2) 남·북접 연합과 봉기의 확산

2) 남·북접 연합과 봉기의 확산

 전봉준의 재기포 결정이 북접과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1087)<全琫準供草>, 343쪽. 전봉준은 北接과의 연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 북접에 함께 기포할 것을 요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교단측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충청도 지역에서도 이미 1894년 3월 20일의 茂長起包를 전후한 시기부터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다. 5월, 6월에 들어 민보군의 활동과 관군의 반격, 교단지도부의 기포 금지지시 등으로 소강상태를 맞았으나, 7월 초부터는 사실상 기포단계에 들어갈 만큼 다시금 활발해졌고, 곳곳에서 교단측의 태도에 반발하는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7월부터 다시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진 데는 충청도가 조선 왕조정부의 요청을 받고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한 청나라 군대가 상륙한 곳으로 청일전쟁의 최초의 전장이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충청도 농민군은 각지에서 양반가를 공격하는 등 雪憤行爲를 하거나 일부지역에서는 농민군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활동을 시도하는 한편 ‘斥化擧義’를 주장하는 등 반일구호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7월 이후 전개된 충청지역 농민군의 활동은 중앙정국과 청일전쟁의 동향을 살피며 기본적으로는 관민상화의 질서 속에서 개혁활동을 추진하고자 하였던 전라도 지역 농민군의 활동양상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7월 9일 鄭敬源을 湖西宣撫使에 임명하여 호서지역을 순행하며 농민군을 귀화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동학교단은 충청각지의 접주급 인물을 집강으로 임명하여 교도들의 기포와 설분행위를 금단하는 등 조정의 대책에 호응하였다.1088)배항섭,<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동학교단-≪洪陽紀事≫와≪錦藩集略≫을 중심으로->(≪百濟文化≫23, 1994);<충청도지역 東學農民戰爭과 農民軍指導部의 성격>(≪동학농민전쟁과 농민군 지도부의 성격≫, 서경출판사, 1997), 44∼50쪽 참조.

 7, 8월에 걸쳐 교도들에게 官令에 복종하고 교도 가운데 侵勒하거나 掘塚, 錢財 강탈 등을 자행하는 자가 있으면 교단에 알리거나 관에 고발토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通諭文을 잇따라 내렸다.1089)<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58∼460쪽.

 교단측이 농민군의 봉기를 금압한 것은 관군으로부터 무차별적인 탄압을 받아야 했던 교도들이나 기포를 주장하는 접주들로부터 반발을 야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충청지역의 농민군이 남접에 호응하여 전면적으로 기포하는 데 커다란 제약요인이 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과 서장옥은 재기포를 결심한 뒤 북접에도 함께 기포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북접의 통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북접은 9월에도 전봉준과 徐璋玉이 “倡義를 빙자하여 평민을 침학하고 도인을 죽이는 것이 끝이 없다”고 비난하며, 남접을 토벌하라는 통유문을 돌린 바 있다.1090)<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61쪽. 또 같은 9월에 관청과 일본군병참소에까지 전봉준과 서장옥이 “북접을 끼고 때를 틈타 함께 일어나려 했지만, 북접은 스승의 훈계를 각별히 따라 굳게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라고 하며 북접을 남접과 차별화하고자 하는 글을 보냈다.1091)<侍天敎歷史>(≪東學思想資料集≫參), 625쪽.

 전봉준 등의 기포 동참요청에 대해 북접에서는 “남접을 토벌하라”는 극언까지 불사하며 반대하였으나, 이미 7월, 8월에 걸쳐 충청도와 경상도 등지에서는 교단의 지시를 무시하고 기포하는 동학교도가 점증하였고, 사실상 기포상태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북접 산하의 접주들이나 농민군들이 이미 교단의 통제 밖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측근들마저 동학교도들이 무고하게 살상당하는 참상을 보고하자, 드디어 9월 18일 崔時亨은 각포의 접주들을 청산에 불러 모으고 “교도들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하여”1092)<天道敎創建史>(≪東學思想資料集≫貳), 155쪽. “先師의 宿寃을 快伸하고 宗國의 急難에 同赴” 할 것을 지시하였다.1093)<天道敎會史草稿>, 461쪽. 함께 기포하자는 전봉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따라 북접에서도 法所와 都所를 倡義所로 개칭하였으며, “우리 접주들은 힘을 합하여 倭賊을 쳐야겠다”는 통문을 돌리고 반일항쟁에 동참하게 된다.1094)≪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73쪽. 북접은 산하 각 지역에 기포령을 내렸으며, 이 무렵부터 각지에서 농민군들이 본격적인 기포를 시작하였다.

 영동지역에서는 일본군이 대구에 들어오고, 성환전투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였다는 소문이 난 다음인 7월 12일 무렵부터 활동하고 있던 농민군이 9월 26일 정식으로 기포하였다.1095)<記聞錄>(≪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1), 554∼564쪽. 홍주·예산·서산·태안 등지에서도 이미 7월 초순부터 농민군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활동하고 있었으며,1096)<洪陽紀事>(≪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9), 96쪽. 홍주목사 이승우의 농민군 진압에 대응하여 대대적인 기포준비를 하고 있다가 9월 30일 북접으로부터 기포령이 떨어진 이후에 정식으로 기포하였다.1097)<昌山后人 曺錫憲歷史>(≪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0), 130∼132쪽.

 충청도와 마찬가지로 북접 영향하에 있던 경상도 지역에서도 지역에 따라서는 이미 3월 말부터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이 알려진 6월 말부터 활동이 격화되었다. 이어 8월에는 성주·예천 등지에서 농민군이 읍내를 공격하는 사실상의 기포가 이루어졌으며, 일본을 적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병참대의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1098)申榮祐,≪甲午農民戰爭과 嶺南保守勢力의 對應≫(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1), 59∼91쪽 및 이 글의 주 57)참조. 김산지역 역시 3월 말부터 지주양반층은 농민군들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었으며 농민군은 8월 초부터는 곳곳에 모여 반관·반부민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으나, 9월 25일 교단으로부터 기포하라는 통문이 도착하자 정식으로 기포하였다.1099)<歲藏年錄>(≪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256∼260쪽.

 이에 따라 9월 하순이 되면 義兵이라 칭하며 국왕의 명에 항거하는 농민군의 봉기가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뿐만 아니라 강원도와 경기도, 황해도 등으로 확산되었고 평안도에서도 반일투쟁 양상이 전개되었다.1100)≪日省錄≫, 고종 31년 9월 24일∼26일;<甲午實記>,≪東學亂記錄≫上, 35쪽. 각 지역별 농민군의 활동에 대한 최근의 연구로는 한국역사연구회,≪1894년 농민전쟁연구≫4, 199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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