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2. 반일투쟁의 전개
  • 3) 관군 및 일본군의 남하

3) 관군 및 일본군의 남하

 이미 9월 초부터 농민군이 서울로 쳐들어 온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경기도 죽산과 안성에서도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진압대책을 마련하였다. 9월 10일에는 壯衛營 領官 李斗璜과 經理廳 領官 成夏泳 등 무관들을 죽산부사와 안성군수에 임명하였고, 9월 21일에는 兩湖巡撫營을 설치하고 申正熙를 都巡撫使로 삼았다. 이어 이두황을 순무영 右先鋒, 별군관 이규태를 左先鋒으로 임명하였다.1101)≪東學亂記錄≫上, 220쪽. 또 전국 각지에 召募使와 討捕使 등을 임명하거나 파견하였다.1102)≪日省錄≫, 고종 31년 9월 25일∼29일. 충청감영으로부터 농민군 수만 명이 병영을 공격하여 감영이나 병영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9월 28일 순무영에 증원군을 파견하도록 명령하였다.1103)≪日省錄≫, 고종 31년 9월 28일. 9월 29일에는 더 이상 선무만으로는 농민군의 봉기를 진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양호선무사 직함을 없앰으로써 오로지 무력진압정책을 펴기로 결정했다.1104)≪啓草存案≫, 고종 31년 9월 29일.

 순무우선봉 이두황은 장위영 병대 4개 소대를 이끌고 9월 20일1105)≪舊韓國官報≫1(亞細亞文化社, 1973), 開國 503년 9월 19일, 520쪽. 서울을 출발, 용인을 거쳐(21일) 죽산에 도착하여(22일) 용인·죽산·이천·진천 등지의 농민군을 진압하다가 10월 9일 죽산을 출발하여 남하하였다. 음죽(9일)-음성(10일)-청안(11일)-청주 쌍교동(12일)을 거쳐 10월 13일 청주성에 입성한 이두황은 성하영의 경리청군 및 일본군 白木誠太郞 중위, 宮本竹太郞 소위와 합류하여 일본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13일부터 15일까지 경리청군, 진남영병과 함께 보은 장내리 등을 수색하던 이두황은 16일 회인에 도착하였다. 이두황은 17일 아침 충청감영으로부터 전라도 지역의 농민군이 북상하여 노성·논산 등지에 진을 치고 있으니 급히 공주로 오라는 전령을 받고 공주를 향해 떠났다. 공주 접경인 부강점(17일)-연기 봉암(18일)을 거쳐 19일 유성에 도착한 이두황은 10월 20일 청주병영으로부터 목천 세성산에 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목천으로 향하였다. 천안-廣(松)亭(20일)을 거쳐 21일 세성산에 도착한 이두황은 그 곳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과 접전하였다.

 세성산성은 감영과 병영이 있던 공주와 청주 사이에 위치한 요충지로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하하는 관군의 배후를 위협할 수도 있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이두황은 세성산이 가지는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 뿐만 아니라 세성산의 농민군을 격파함으로써 선봉진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고, 농민군의 기세를 꺽음으로써 장차 전개될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다져보자는 의도에서 공주로 급히 올라오라는 통보에도 불구하고 세성산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전투는 10월 21일 벌어졌다. 3,000여 명의 농민군은 삼면이 깍아지른 듯한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관군의 공격에 맞섰으나 결국 농민군은 대장 김복용이 체포되어 참수되는 등 17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여 달아났다. 세성산 인근의 농민군을 추적하여 진압하던 이두황은 10월 26일 세성산을 출발, 봉암을 거쳐(26일) 10월 27일 공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공주에 도착한 직후 예산·서산·태안·해미 등지의 위급함을 보고받고 10월 29일 장위영병을 이끌고 예산지역으로 출발하여, 광정(29일∼11월 2일)-온양(3일)-신창(4일)-예산(5일)-해미(6일-8일)를 거쳐 11월 9일 홍주에 도착하였다.1106)<兩湖右先鋒日記>·<巡撫先鋒陣謄錄>(≪東學亂記錄≫上);≪東學亂記錄≫下, 14∼20쪽 등에서 정리.

 이규태는 교도중대와 통위영 2개 중대를 이끌고 10월 10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교도중대는 경성에 있던 일본군 후비18대대의 히라키(白木) 중위와 미야모토(宮本) 소위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1107)≪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52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378쪽.
이들은 과천(11일)을 거쳐 수원에 도착한 뒤(12일∼17일) 17일 양지에서 일본군 서로분진대와 합류하여 진위로 갔다. 18일 진위에서 일본군은 2개의 枝隊로 나누어 하나는 안성 쪽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일본병 87명과 대관군 43명을 거느리고 평택∼아산 등지로 향발하였고, 이규태는 성환(18일)을 거쳐 천안으로 곧장 남하하여 19일 천안에서 일본군과 합류하였다. 22일까지 천안에 체류한 뒤 廣亭(23일)을 거쳐 10월 24일 공주에 도착하였다.1108)<先鋒陣日記>,<巡撫先鋒陣謄錄>(≪東學亂記錄≫上);<先鋒陣呈報牒>(≪東學亂記錄≫下)에서 정리.

 이밖에 성하영은 9월 24일 안성군수로 부임,1109)안성군수는 9월 30일 홍운섭으로 교체되었고, 성하영은 10월 11일 서산군수로 임명되었다. 그곳의 농민군을 진압한 후 경리청 영관 구상조와 함께 경리청병 3개 소대를 이끌고 청안을 거쳐 10월 10일 청주로 가서 주둔하다가, 12일 이두황군과 합류한 뒤 회인·毛老院을 거쳐 19일 공주에 도착하였다.1110)≪東學亂記錄≫上, 262·270·384·421·427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302쪽.
안성군수 홍운섭이 이끄는 경리청군 1개 소대는 10월 16일 안성을 출발 천안을 거쳐 19일 공주에 도착하였다.1111)≪東學亂記錄≫上, 419쪽. 10월 27일 현재 공주에 주둔중인 경군은 장위영 850명(領官 이하 병정 692명, 書記 이하 군무요원 158명), 경리청 560명, 통위영 250명 등 1,660여 명이었다. 이 가운데 장위영 병대는 예산·덕산·홍주·해미 등지의 농민군이 창궐하므로 내포지역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 함께 그 지역의 농민군을 초토하라는 지시를 받고 10월 29일 공주를 출발하여 홍주로 향하였다.1112)≪東學亂記錄≫上, 298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46∼247쪽.

 한편 8월 16일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의 승기를 잡은 일본은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하였으며,1113)≪駐韓日本公使館記錄≫2, 232∼233쪽. 농민군 진압에 일본군를 직접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7월 초순부터 전선파괴 등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1114)≪駐韓日本公使館記錄≫3, 333·335쪽. 8월 24일 무렵에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서 농민군이 봉기하여 서울로 침입한다는 풍설이 나돌았다. 또 8월 25일·26일에는 태봉·용궁 등에서 일본군이 공격을 당하여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이미 8월 24일 이전부터 조선정부는 힘이 없어 이들을 진압할 수 없으며, 이들 지역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이익에 방해가 되므로 일본군 1개 소대와 순사 30명을 조선정부에 빌려주어 농민군을 진압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 8월 28일 외무대신 무츠(陸奧宗光)는 부산항에 주둔중이던 일본군 1개 소대를 태봉·문경 지역으로 파견하도록 하였고, 9월 4일 이전에 부산에 주둔중이던 2개 중대가 두 차례로 나누어 파견되었다.1115)≪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72∼279쪽 ;<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 所藏文書>(≪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9), 342∼349쪽, 412·419쪽.

 그러나 농민군의 봉기가 각처에서 이어지자 9월 9일 일본공사 오오토리(大鳥圭介)는 외무대신 무츠에게 일본군을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농민군 진압 태세를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신하였다. 또 늦어도 9월 15일 이전에 조선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해 일본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일본에 공식 요청하였으며,1116)≪駐韓日本公使館記錄≫3, 353쪽. 9월 18일 일본은 일본군 약간을 파병하여 조선군을 도와 농민군을 진압하고 싶다고 하여 승낙의 뜻을 전하였다. 조선정부가 9월 18일에 있었던 일본측의 제의를 공식 수락한 것은 9월 21일이었다. 이어 9월 27일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는 9월 28일 대본영에 농민군 진압을 위한 1개대대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9월 21일 본격적인 농민군 진압계획을 세운 대본영은 10월 2일 대대장 미나미(南小四郞)의 인솔하에 일본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를 출발시켰다.1117)鄭昌烈,≪甲午農民戰爭硏究≫(延世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1), 244∼247쪽 참조.

 그러나 일본은 이보다 앞선 9월 17일 농민군 진압을 위해 일본군을 남하시키기로 결정하였고, 19일에는 2개 소대를 남하시켰다. 1개 소대는 原田 소위가 이끌고 용인·죽산을 거쳐 충주 지방으로, 1개 소대는 鈴木 特務曹長이 이끌고 수원·진위·천안을 거쳐 공주로 가도록 하고, 후자는 다시 두 개의 대로 나누어 하나는 아산·평택·홍주로 향하게 할 예정이었다.1118)≪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84∼289쪽·355∼356쪽; 5, 64쪽. 이에 따라 9월 27일 인천수비대 소속 1개 소대(49명) 병력을 原田常入 소위 인솔하에 남하시켰다.1119)≪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43∼145쪽. 이들은 인천-수원을 거쳐 10월 5일 충주에 도착하였다. 10월 6일 原田常入 소위가 2개 분대를 이끌고 괴산지역을 정찰하던 중 농민군 200여 명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인 결과 原田 소위 이하 4명이 부상하고 1명이 즉사하자,1120)≪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97쪽;6, 91쪽. 용산수비대 대대장 飯森이 1개 소대, 인천수비대 소속의 山村대위가 2개 분대를 이끌고 각기 10월 7일과 10월 9일 충주로 증파되었다.1121)≪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97쪽;1, 217쪽. 이들은 합류하여 10월 14일부터 충주·괴산·청산·보은 등을 수색한 후 山村은 10월 말 용산과 인천으로 복귀하였다.1122)≪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18∼220쪽.

 한편 10월 2일 일본에서 출발한 일본군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의 본부 및 제1, 2중대는 10월 9일, 제3중대는 13일 인천에 도착하였다.1123)≪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49쪽, 369∼373쪽. 이들은 14일 용산에 집결하였고, 10월 15일에서 17일 사이에 농민군 진압을 위해 남하하였다.1124)≪駐韓日本公使館記錄≫6, 60쪽;3, 249쪽. 10월 19일에는 용산수비대 1개 중대가 뒤따라 출발하여 동로분진대와 합류하였다.1125)≪駐韓日本公使館記錄≫3, 300∼301쪽.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미나미가 인솔한 제19대대가 인천에 도착한 10월 9일에 조선의 외무대신 金允植에게 서한을 보내 앞으로 농민군 진압에 임하는 조선군과 각 지방관에게 일본군 장교의 지휘를 따르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1126)≪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50쪽. 또 10월 13일 인천병참사령관 육군포병중좌 이토오(伊藤祐義)는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가 남하하기에 앞서 일본공사 이노우에에게 농민군 진압계획을 보고하였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충청·전라 각지 東學黨의 근거지를 剿節하라.

2. 조선정부의 요청에 의해 후비보병 제19대대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길로 分進하여 조선군과 협력, 沿道에 있는 동학당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剿滅함으로써 동학당이 다시 흥기하는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두머리로 인정되는 자는 체포하여 경성 공사관으로 보내고, 동학당 거물급 간의 왕복문서, 혹은 정부내부의 관리나 지방관, 또는 유력한 측과 동학당 간에 왕복한 문서는 힘을 다해 수집하여 함께 공사관으로 보내라. 이번 동학당을 집압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군 각 부대의 진퇴와 調達은 모두 일본군 士官의 명령에 따르게 하고, 일본군법을 지키게 하며 만일 군법을 위배하는 자가 있으면 군율에 따라 처리하기로 조선정부로부터 조선군 각 부대장에게 이미 하달되었다.

3. 보병 1개 중대는 西路, 즉 수원·천안 및 공주를 경유, 전주부 街道를 전진하여 그 진로 좌우의 驛邑을 정찰하라. 보병 1개 중대는 中路, 즉 용인·죽산·청주를 경유, 성주 가도로 전진하여 그 진로 좌의 역읍을 정찰하라. 보병 1개 중대는 東路(일본병참선로), 즉 가흥·충주·문경 및 낙동을 경유, 대구부 가도로 전진하여 그 진로 좌우의 역읍을 정찰하라. 본부 중대는 중로 분진대와 함께 행진하라.

4. 동로 分進中隊를 조금 먼저 가게 해서 匪徒를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즉 전라도방면으로 내몰도록 힘써야 한다. 만일 비도들을 강원도와 함경도 쪽, 즉 러시아 국경에 가까운 곳으로 도피케 하면 적지 않게 후환이 남을 것이므로 엄밀히 이를 예방해야 한다.1127)≪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53∼156쪽;5, 67∼68쪽.

 이노우에 공사가 직접 나서서 진두 지휘한 일본군의 농민군 진압 계획의 요체는 농민군을 서남방 전라도 해안쪽으로 몰아넣은 다음 합세하여 초멸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서·중·동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하되 동로분진대에 1개 중대를 증원하고 중로, 서로분진대보다 빨리 남하하도록 하여 강원도와 경상도의 농민군을 전라도쪽으로 내몰도록 한 것이다.1128)≪駐韓日本公使館記錄≫1, 301∼302쪽;5, 65∼66쪽.

 농민군진압에 투입된 일본군의 규모는 ①미나미少佐가 이끄는 3개 중대로 이루어진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 ②충주 방면의 원군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후비 제18대대 제1중대 ③홍주 방면의 원군으로 용산, 인천에서 온 후비 제6연대 제6중대 ④전라도 남부지방의 원군으로 부산에서 온 후비 제10연대 제4중대 등이 있고 ⑤황해도 방면에도 평양으로부터 후비 제6연대 제4중대 ⑥용산으로부터 파견된 후비 제6연대 제7중대(일부) ⑦황주에서 파견된 후비 제6연대 제8중대(일부) 등 모두 9개 중대였다. 청일전쟁 시기에 1개 중대는 221명 내지 198명으로 구성되었고, 또 일부는 결원이 있음을 감안할 때, 농민군 진압에 투입된 일본군은 약 1,900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129)趙景達,≪異端の民衆反亂:東學と甲午農民戰爭≫(岩波書店, 東京, 1998), 305쪽 참조.

 이 가운데 西路, 즉 수원·천안을 거쳐 공주로 진격하게 되어 있던 서로분진대(중대장, 森尾 대위)는 과천(17일)을 거쳐 18일 진위에서 예산지역의 농민군세력이 거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2개대로 나누어 본대(2개 소대와 2개 분대, 약 125명)는 공주로 남하하고, 枝隊는 예산으로 향하였다. 공주로 남하한 본대는 양성(18일)-직산(19일)-천안(20∼22일)-덕평(23일)을 거쳐 10월 24일 공주에 도착하였다.1130)≪駐韓日本公使館記錄≫6, 60∼68쪽. 9월 말에 1개 소대를 이끌고 서울서 출발한 스즈키(鈴木) 特務曹長은 수원·진위·천안을 거쳐 10월 8일 이전에 이미 공주감영에 도착하여 그 곳의 조선군병들을 훈련시키며 주둔하고 있었다. 스즈키는 10월 9일 이토오(伊藤) 兵站監을 통해 보은·괴산지역의 농민군을 정찰하고, 곧 파견할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임기응변하며 청주로 가서 주둔하라는 이노우에 공사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전봉준이 충청감사에게 글을 보내면서 공주지역의 정세가 긴급해진 직후인 10월 18일 공주에 남아서 방어하겠다고 요청하여 10월 28일 승낙받았다.1131)≪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69·174쪽;3, 367·382쪽.

 남하 도중 진위에서 서로분진대와 갈라져 해미지역으로 간 枝隊는 아카마쓰(赤松國封) 소위가 인솔하였으며 인원은 1개 소대와 2개 분대, 그리고 조선관군 34명이었다. 이 지대는 평택-아산(19일)-신창(21일)-예산(22일)-면천(23일)을 거쳐 24일 해미에 도착하였으며, 농민군 1만 5,000여 명과 승전곡에서 접전한 후 덕산으로 들어갔다.1132)≪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06∼208쪽;6, 63∼64쪽. 이어 25일에는 홍주로 퇴각하였으며, 농민군의 세력이 예상외로 크자 10월 27일 홍주에서 인천 병참부로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28일에는 내포지역 최대의 전투였던 홍주성전투가 28일 오후부터 29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전투에 가담한 관군 및 일본군은 2,000여 명이었다. 이때 농민군은 3만여 명이나 되었으나 크게 패하여 해미쪽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해미 등지에서 일본군 및 관군, 민보군과 수 차례 접전하였으나 패배하여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각지로 흩어지고 말았다.

 후원병인 인천 항구수비대 1개 소대와 용산주재 2개 소대는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장인 야마무라(山村) 대위의 인솔하에 11월 3일 오후 7시 인천을 출발하여 11월 5일 새벽 아산현에 상륙하였으며, 신창·신례원을 경유하여 11월 7일 오후 홍주에 도착하였다. 홍주 지역의 농민군의 세력이 약해지자, 11월 8일 후원병력만 홍주에 남고 아카마쓰 소위는 자신이 인솔하던 일본군 1개 소대와 2개 분대, 조선관군 34명을 이끌고 공주로 출발하였다.1133)≪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06∼208쪽, 211쪽, 222∼233쪽;3, 311·317쪽.

 후원병은 사이토(齋藤) 소위에게 1개 소대와 민보군 300명을 내주어 해미·서산·태안을 수색하게 하고, 11월 12일 해미를 거쳐 인천으로 귀환 예정이었다. 그러나 11월 11일 홍주목사 李承宇로부터 한산 남포 지역에 농민군 수천 명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 귀환을 연기하고 한산으로 척후를 파견하고, 사이토 소위에게는 홍주로 복귀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탐 결과 한산 남포 등지 농민군 세력이 과장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한 야마무라대위는 11월 13일 홍주로 복귀한 사이토와 함께 11월 14일 홍주를 출발, 태안(15일)·서산(16일)·덕산(17일)의 농민군 잔여세력을 진압하면서 수원을 거쳐 11월 23일 인천으로 복귀하였다.1134)≪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33∼239쪽.

 이상으로 볼 때 공주전투가 벌어질 당시 공주감영에는 서로분진대 가운데 홍주 방면으로 빠져 나간 1개 소대와 2개 분대를 제외한 제2중대 병력과 스즈키(鈴木) 소위가 이끌고 와 있던 1개 소대 등 3개 소대와 2개 분대 병력(약 175명)이 주둔해 있었다.1135)≪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46∼247쪽. 서로분진대에 앞서 공주에 도착하여 주둔하고 있던 스즈키(鈴木)는 서로분진대가 10월 24일 공주에 도착하자 곧바로 공주를 떠난 것으로 기록된 자료도 있으나(<公山剿匪>(≪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421쪽), 스즈키는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것이 확실하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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