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3.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 3) 국가·민족·국민

3) 국가·민족·국민

 제1차 농민전쟁의 단계에서 농민군은 민씨척족정권의 제거와 대원군정권의 성립을 기대하였다. 1894년 3월 25일의 四個名義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가 權貴를 모두 없앤다”고 하였는데, 권귀란 4월 4일 법성포 吏鄕에게 보낸 통문1272)≪東匪討錄≫,<4月 初4日 東徒通文法聖吏鄕>(≪韓國學報≫3, 1976), 244쪽.
≪朝鮮交涉資料≫中,<東學黨彙報>, 332쪽.
에서 “민폐의 근본은 吏逋에 말미암고 이포의 근본은 탐관에 말미암고 탐관의 범행은 탐학·부정한 집권층에 말미암는다”고 한 탐학·부정의 집권층을 의미하며, 또 박은식이 “동도가 창궐한 초기에 그들은 장차 서울로 북상하여 왕 측근의 惡을 쓸어버리겠다고 부르짖었다”1273)朴殷植,≪韓國痛史≫(≪朴殷植全書≫上), 111쪽.고 한 ‘왕 측근의 악’을 의미하며, 4월 28일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고서 전주 남문에 게시한 방문1274)鄭 喬,≪大韓季年史≫上 권 2, 고종 31년 4월, 75쪽.에서 “대저 나라의 형세로 말하면 집권대신은 모두 외척으로서 밤이 지새도록 경영하는 것은 다만 일신·일파의 사리뿐이고 자기네 일당을 각 고을에 깔아놓아 백성해치기로써 일을 삼는다”고 한 외척 즉 민씨척족정권이었다. 전봉준은 또 제1차 법정재판 직전에 독립 제19대대장 南小四郞에게 낸 구공서에서도 “원래 우리들이 기병한 것은 閔族을 무너뜨려서 폐정을 개혁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1275)≪東京朝日新聞≫, 명치 28년 3월 5일(≪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사운연구소, 1996), 509쪽.라고 하였다. 전주화약의 27개 조목에서 “왕의 총명을 막아 가리고 매관매작하며 國權을 조종·농간하는 자들을 일제히 축출할 것”이라고 하고 5월 20일 무렵 장성에서의 폐정개혁요구1276)鄭 喬,≪大韓季年史≫上, 고종 31년 5월, 86쪽.에서 “간신이 권력을 농간하여 나라일이 날로 그릇된다. 그 매관매직을 처벌할 것”이라고 한 것도 민비척족정권의 축출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민씨척족정권에 대한 부정은 다른 정권의 성립에 대한 기대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농민군은 4월 20일 무렵 초토사에게 보낸 湖南儒生原情書1277)<湖南儒生原情于招討使文>,≪東匪討錄≫(≪韓國學報≫3,<새자료>), 259∼260쪽.에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른즉 억조창생이 마음을 같이 하고 8도의 백성이 뜻을 모아 위로는 國太公(大院君-인용자)을 받들어 섭정을 맡겨 부자의 인륜과 군신의 義를 온전히 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함으로써 종묘·사직을 다시금 보존할 것을 죽기를 맹서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전주에서 화약교섭중이었던 5월 4일에 초토사에게 보낸 訴志1278)≪兩湖招討謄錄≫, 갑오 5월 4일(≪東學亂記錄≫上), 207쪽.에서는 “太公을 받들어 섭정을 맡기자는 것은 그 이치가 심히 당연하거늘 어찌하여 반역이라 일컫고 살해하는가”라고 하여 대원군정권 성립의 요구를 명백히 나타내었다. 이러한 요구는 5월 20일 무렵 장성에서의 폐정개혁 요구에서도 “국태공이 국정에 참여하면 민심에 거의 희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재확인되고 있다. 대원군 정권 성립에의 이러한 기대는 동학의 8자주문에도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었다.1279)‘卽以今知 院位大監’ 韓國敎會史硏究所 Mutel 文書(韓㳓劤,<東學思想의 本質>(≪東方學志≫10, 1969), 55쪽 주 33)에서 재인용.

 민비척족정권에 대한 농민군의 부정이 당시의 권력관계에서 그것의 대극점에 위치하고 있었던 대원군의 섭정에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농민군의 권력구상이 기존의 권력관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봉건적 억압과 외래 자본주의 침략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발전을 지향하였던 농민군이 사회적 해방의 권력의 이미지는 대원군의 섭정에서 끝막음하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군의 국가구상은 재래의 유교적인 국가의식, 민본 이데올로기 즉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진다”는 ‘輔國安民’ 의식에서 머물고 있었다.1280)<茂長東學輩布告文>(≪東學亂記錄≫上), 142∼143쪽.
<倡義文>(≪東學史≫), 108∼109쪽.
물론 ‘보국’의 방법으로서의 ‘안민’의 실체적 내용에 새로운 성격이 담겨 있음은 앞의 경제적 지향에서 이미 본 바와 같다.

 실제로 농민들에게는 오랜 동안의 恭順과 忍從의 생활에서 습성화된 권력공포증세가 있었다. 예컨대 1894년 1월에 농민군들이 白山으로 옮긴 뒤에 전봉준이 고부민란 중민들에게 ‘함열 조창에로 나아가 전운영을 치고 전운사 조필영을 징치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군중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것은 民擾가 越境을 하면 반란의 칭을 받는다는 이유”였고,1281)張奉善,<全琫準實記>(≪井邑郡志≫, 1937), 353쪽. 민란 중민들은 해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농민군은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주체로서의 자기의 정치적 위치를 조정 즉 정부에 직접 건의한다는 차원에조차 두지 못하였다. 1895년 2월 11일의 제2차 법정신문에서 전봉준의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1282)<全琫準供草>, ‘再招問目’(≪東學亂記錄≫下), 538쪽.

문:그렇다면 訴狀을 내어서 호소하지 않았는가?

답:감영과 고을에 수없이 소장을 제출하였다.

문:그렇다면 조정에도 또한 소장을 내어 호소하였는가?

답:소장을 낼 길이 없어 홍계훈 대장이 전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이러한 사정을 소장으로 호소하였다.

 소장을 낼 길이 없었다는 것은 당시의 제도에도 말미암았겠지만 조정에의 직접 건의라는 발상, 즉 조정 대 농민군이라는 위치설정의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농민군은 스스로를 홍계훈의 대극점에 두는 데서 그치고 있었다.

 그러나 홍계훈 관군의 대극점에의 위치설정도 사실은 제1차 농민전쟁 말기에 쟁취된 것이었다. 초토사 홍계훈의 보고에 의하면 1894년 4월 22일 경군이 “함평에 도착하여 농민군 수천명과 맞닥뜨려 장차 교전하려 함에 농민군이 산에 올라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 군대는 主上의 명을 받들어 내려온 것이다. 탐관(지방관-인용자)의 군대와는 질이 다르니 결코 대항하지 않겠다. 만약 항전하면 우리는 逆徒의 죄를 벗을 수 없다고 하였다. 경군이 동쪽으로 향하면 그들은 서쪽으로 도주하고 경군이 서쪽으로 향하면 그들은 동쪽으로 달아나 접전하기가 불가능한 형세이다. 심히 답답하다”1283)<東學黨에 관한 彙報>(≪朝鮮交涉資料≫中), 339쪽.고 하였다. 4월 22일자 전라감사의 전보에 의하면 “동도가 전주 남문 밖에 투서하였는데 그것을 펴보니 경군에는 대항하지 않고 지방군은 반드시 격파하여 탐관을 축출하고 부정한 아전을 소멸하겠다. 이것이 우리들의 보국안민의 본뜻이다. 비록 백년이 지나도 결코 물러서 해산하지 않겠다”1284)위의 책, 340쪽.고 하였다. 4월 23일의 장성전투에서의 경군에 대한 승리 이후에 농민군은 경군과도 대적할 자세를 확립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집강소 단계에서의 농민군의 국가구상도 제1차 농민전쟁 단계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보인다. 이 단계에서의 사회적 해방의 권력의 이미지는 官民相和를 전제로 한 지역적 권력의 성립으로서 표출되었다. 즉 봉건적 신분제의 철폐, 봉건적 지주전호제도의 개혁을 집강소라는 좁은 범위의 지역권력으로써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좁은 지평에서나마 농민층의 권력의 이미지가 현실화되었다는 것은 한국역사상 초유의 일이었고 획기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짧은 기간, 좁은 범위의 지역권력의 체험은 다음 단계에서의 새로운 권력구상으로 발전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집강소의 권력의 이미지도 민본 이데올로기 울타리 안에서의 것이었다. 농민군은 전주화약 27개 조목의 실시에 대한 기대에서 6월 무렵까지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1895년 2월 11일의 제2차 법정재판에서 “절목(27개 조목-인용자)을 제출한 이후에 탐관을 제거하는 성과가 있었는가?”라는 법관의 물음에 전봉준은 “별 성과가 없었다”고 하였고 “그렇다면 홍계훈 대장이 백성을 속인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렇다면 백성이 어찌 다시 호소하지 않았는가” “그 후 홍계훈 대장은 서울에 가버렸으니 다시 어찌 호소하리오”1285)<全琫準供草>, ‘再招問目’(≪동학란기록≫하), 538쪽.라고 하였고 제3차 법정재판에서 “9월 봉기 이전 조정의 효유문은 하나 둘이 아니었으나 끝내 실시되지 않았다”1286)<全琫準供草>, ‘3次問目’, 547쪽.고 하였듯이 27개 조목 폐정개혁 실시에의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고 또 농민군 스스로를 조정의 대극점에 위치설정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 기대를 포기하지 않은 데에는 정부의 일정한 대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6월 11일 정부에서는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을 고침으로써 大更張·大懲創하기 위하여 校正廳을 설치하고 6월 16일에는 12개 항목의 개혁항목을 공표하였다.1287)金允植,≪續陰晴史≫上, 고종 31년 6월 24일, 325∼326쪽. 이 항목들은 “모두 동학당의 原情(폐정개혁 요구-인용자)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점진적으로 자주개혁함으로써 일인들의 요구를 막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변통으로 미봉하는 것이어서 여전히 형식일 뿐이었다. 어찌 이것으로써 농민란을 처리할 수 있으리오”1288)위의 책, 320쪽.라고 김윤식은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로 6월까지의 상황이었고, 집강소 폐정개혁 12개조가 개별 시차적으로, 지역적으로도 들쑥날쑥하게 형성되어가던 6월말부터는, 농민군의 지방행정기관으로서의 집강소는 국가의 지방행정권력기구와 병존하면서 자신의 지방지배권을 사실상 관철시켜 나아갔다. 이러한 집강소의 경험으로 농민군들은 자신들이 지배권력에 일방적으로 恭順하고 順從하는 객체적인 被治物만은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9월의 제2차 농민전쟁도 보국안민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보국안민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가 발견된다. 첫째 백성 즉 농민군의 뜻을 직접 왕에게 상세히 펼치겠다는 것이었다. 전봉준은 제3차 법정재판에서 “下情(백성의 사정과 뜻-인용자)은 왕에게 알려지지 않고 上澤(왕의 덕정의 혜택-인용자)은 백성에게 미치지 않았다. 고로 일차 서울에 올라가 기어이 백성의 생각을 상세히 펼치려고 하였다”1289)<全琫準供草>, ‘3次問目’(≪동학란기록≫하), 547쪽.고 말하였다. 즉 농민군 스스로를 홍계훈의 대극점, 조정의 대극점에서 뛰어넘어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對面의 위치에 설정하고 있었다. 백성의 사정과 뜻을 직접 왕에게 전달하겠다는 의식은 농민의식의 민주주의적 발전의 단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 위의 필연적 귀결로서 대원군 섭정에의 기대를 전적으로 포기하였다는 사실이다. 제1차 농민전쟁 단계에서는 농민군의 대원군 섭정에의 기대가 전혀 일방적 희망일 뿐이었고 9월의 단계에서는 대원군으로부터의 구체적 결탁 제의가 있었고, 농민군도 그 제의에 호응하여 결탁하려는 움직임도 현실적·구체적으로 있었지만, 그것은 대원군 정권수립의 기대에서가 아니라 농민군의 정치적·군사적 행위에서의 정략적·전략적 세력연합의 차원에서였다. 즉 대원군정권 수립의 기대에서 정략적·전략적 이용의 대상으로의 변환이었다.

 셋째 9월 재봉기의 목적은 일본세력을 몰아내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포위 점령하여 민씨척족정권을 타도하고 이어 한국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국권을 장악하였다. 6월 23일에는 수원부의 楓島 앞바다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6월 25일에는 군국기무처를 신설하여 친일 개화당 정권을 성립시키고 7월 20일에는 잠정합동조관을, 7월 26일에는 한일공수동맹을 체결함으로써 개화당 정권을 손안에 장악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행동을 전봉준은 7월 말 8월 초에 남원에서 듣고1290)<전봉준공초>, ‘3차문목’(≪동학란기록≫하), 548쪽;‘4차문목’, 552쪽. 이것은 한국의 국토를 침략하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1291)<전봉준공초>, ‘재초문목’(≪동학란기록≫하), 538쪽. “우리들 臣民된 자들로서는 일각도 안심할 수 없어 이해(거사의 성패-인용자)가 어찌될 것인가는 생각지 않고”1292)위의 책, 541쪽. “忠義之士는 같이 창의하자는 뜻으로 방문을 내걸고 또는 각처에 이 봉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不忠無道한 사람이라는 통문을 돌려”1293)위의 책, ‘초초문목’, 530쪽. 재차 봉기하게 되었다. 즉 “피고는 일본군대가 대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필시 일본군이 我國을 병탄코자 하는 것인줄 알고 일본병을 물리치고 그 거류민을 국외로 구축할 마음으로 다시 기병을 도모”하였다.1294)<전봉준판결선고서>(≪동학관련판결문집≫, 총무처정부기록보존소, 1994), 30쪽. 일본에의 병탄을 막고 일본인을 축출하는 것이 9월 재봉기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농민군 재봉기가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 그리고 한일공수동맹 등이 있은 직후 즉 8월에 결정되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전봉준이 때마침 신병이 있었고 많은 사람을 일시에 움직이기도 어렵고 아직 새쌀이 나오지 않은 농번기”1295)<전봉준공초>, ‘3차문목’(≪동학란기록≫하), 548쪽.였다는 사정, 그리고 북접의 소극적인 태도라는 사정도 있었겠지만 신분제도를 폐지하는 등의 갑오경장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고 보인다.

 1894년 7월 10일에는 일체의 상납을 金納으로 할 것을 결정하고1296)≪한말근대법령자료집≫1, 1894년 7월 10일,<의안>, 26쪽. 8월 22일에는 그것을 재확인하고 구체적으로 結價를 정하기로 결정하였다.1297)위의 책, 1894년 8월 22일,<의안>, 95쪽. 이에 대한 농민층의 반응은 “새 政令이 한번 반포되자 백성은 모두 발을 구르며 좋아하여 洋을 따랐는지 倭를 따랐는지는 묻지 않고 모두 기뻐하여 재생의 기색이 있었”1298)黃 玹,≪梅泉野錄≫, 고종 31년 12월, 168쪽.으며 “稅米를 代錢으로 하는 頒令이 있고부터 民情은 흡연하여 앞을 다투어 바쳤다”1299)위의 책, 178쪽.고 한다. 농민전쟁 때 전봉준과 상의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가 정부를 전복하고 國憲을 일신하려고 하였다는1300)정인보,<해학이공묘지명>(≪해학유서≫, 국사편찬위원회, 1956), 9쪽. 李沂도 “작년부터 전세는 돈으로 걷는데 농민에게는 倉費가 없어지고 국가에는 漕弊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실로 만세에 고쳐서는 안될 법이다”1301)위의 책,<전제망언>, 8쪽.라고 평가하였다. 실제 1894년 12월에 결가를 1결에 30냥으로 정할 때 1결의 현물세를 쌀 19두 6승 2홉으로 잡고 당시의 쌀값으로 환산한 것이니까1302)金容燮,<光武年間의 量田·地契事業>(≪韓國近代農業史硏究≫下, 일조각, 1988), 472쪽. 농민층에 대한 개화당 정부의 조세면에서의 상당한 양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보아서 갑오경장에 대한 농민군의 일정한 기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고 보인다.

 1894년 9월 18일 일본은 자기네가 농민군을 진압하겠다고 나섰고 21일 개화당 정권은 이를 수락하였다.1303)≪日案≫3, (고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67), 94∼95·98쪽. 농민군 토벌을 위한 개화당 정권-일본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무렵에 전라도 농민군의 재봉기가 확정되었으니 “匪徒는 호남으로부터 공주 등지에 이르기까지 길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1304)≪日案≫3, 99쪽. 아직까지는 적대적이지 않았던 개화당 정권과 농민전쟁의 모순, 지주적 토지소유 발전의 코스와 농민적 토지소유 발전의 코스의 모순이 이제 일본 자본주의 침략세력의 개입에 의하여 적대적인 성격의 모순으로 전화되었다.

 일본에의 한국병탄을 저지하고 일본인들을 이 땅에서 축출하겠다는 9월 재봉기의 목적의 바탕에는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않게 하는”1305)<告示. 京軍與營兵而敎示民>(≪東學亂記錄≫下), 379쪽. 의식 즉 ‘倭國化’를 반대하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농민군들의 경우 ‘왜국화’의 내용은 “금년 유월에 개화간당이 왜국을 체결하여 승야 입경하여 君父를 핍박하고 국권을 擅恣하며 우황 방백수령이 다 개화 소속으로 인민을 무휼하지 아니코 살륙을 좋아하며 생령을 도탄함에”1306)위와 같음.라고 하였듯이 일본군과 개화파세력에 의한 ‘국왕과 國權의 허구화’였다.

 이 이전 대원군 섭정에의 기대도 민씨척족정권에 의하여 허구화된 국왕에 국왕으로서의 실체를 부여하기 위한 방법에서였다. 농민군이 갖고 있었던 유교적인 정치의식에 의하여서도 국왕·국권에 실체가 부여되지 않고는 그 정치의식 자체가 존립될 수 없었기 때문에 9월 재봉기의 단계에서도 실체부여의 방법은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사람끼리야 道俗은 다르나 斥倭와 斥化는 그 義가 일반이라 두어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기 돌려보고 忠君憂國之心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오면 상의하여 같이 斥倭斥化하여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아니케 하고”1307)위와 같음.라고 하였듯이 실체 부여의 방법은 ‘척왜·척화를 원칙으로 한 한국주민의 결집’이었다.

 9월 재봉기 이전의 단계에서는 농민군의 사회적 해방의 이미지가 대원군 정권의 성립이라는 권력의 이미지로 나타났는데 9월 재봉기의 단계에서는 농민군의 사회적 해방의 이미지가 ‘척왜·척화를 성취하는 주체로서의 한국주민의 결집’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유교적 정치이론의 멍에에서 벗어나서 민족으로서의 결집에로 나아가는 의식의 단서가 마련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1894년 10월 13일 청주 부근에서 농민군과 대치한 장위영 부영관 李斗璜은 효유문에서 “또 너희들이 말하는 바 道, 德을 따져보자. 너희들은 덕을 일컬으면서 敬天이라고 하고 輔國이라고 하며 安民이라고 하는데 모두가 우리 道의 지류를 몰래 도적질하여 따로이 한 기치를 세운 것이다. 만일 너희들이 이것에만 일삼고 다른 패악한 행동이 없다면 조정에서 어찌 금지하는 영을 내리겠는가(중략) 지금 너희들의 행동을 너희들의 말과 비교해보면 말은 가공의 것이고 행동은 匪類이니 이는 하늘을 업수이 여기는 것이다”1308)<양호우선봉일기>, 갑오 10월 13일(≪동학란기록≫상), 272∼273쪽.라고 하였는데 특히 9월 단계의 농민군의 의식·행동의 발전에 적합한 표현이었다.

 위의 결집에는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동시에, 백성의 사정과 뜻을 직접 왕에게 전달하겠다는 의식이 동반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결집의 구조는 反侵略·反封建을 전제로 하고,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발전의 지향을 중심으로 하며, 그것의 反植民地化·反開化에로의 확대·발전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당시의 역사적 조건에서는 ‘근대민족으로서의 결집·형성’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발전은 농민군의 구성에서도 반영되었다. 9월 이전 단계의 농민군은 전라도의 농민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지방적 제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제1차 재판에서 “전주에 들어갈 때 (삼례에서 재봉기하여 전주로 입성할 때-인용자) 군사를 불러 모음에 전라도의 온 인민을 몽땅 끌어 모았는가?” “각도의 인민이 상당히 많았다” “공주로 나아갈 때에도 또한 각도의 인민이 상당히 많았는가?” “그때도 그랬다”라고 하였듯이1309)<전봉준공초>, ‘초초문목’(≪동학란기록≫하), 529∼530쪽. 9월 재봉기의 농민군은 남한 일대의 농민으로 구성되었다.

 다시 말하면 국왕·국권의 절대성을 자명의 전제로 하는 유교적 정치의식의 궤도를 충실하게 따라감으로써 그것에의 실체부여가 요구되었고, 그 요구가 개화와 침략일본과의 결탁에 의하여 촉발됨으로써 근대민족으로서의 결집이 요청되었고, 여기에서 농민군의 정치의식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 유교적 정치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와 같이 9월 재봉기의 단계에서 농민의 정치의식은 민주주의적 발전의 단서가 열리고 유교적 정치의식에서 벗어나 자립화하며, 민족으로서의 결집에 눈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의식은 국권이 허구화하거나 소멸하더라도 그것에 의하여 굴절되지 않고 자기의 독자적인 발전의 길, 민족과 민주주의에의 전망을 넓혀갈 수 있는 토대를 이미 쟁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동체적 제관계가 완전히 청산됨으로써 계급으로서의 결집이 객관적으로 가능하고도 필연화되는 단계가 되면 위의 정치의식은 민족해방의 이데올로기로서 다시 한번 비약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끝내 국권주의·국가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따라서 민족해방의 이데올로기로 비약할 수 없었던 개화사상의 정치의식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아울러 농민군의 의식에서 새로운 변화의 싹이 보이고 있다. 전봉준은 농민군 재봉기의 이유에 대해 “다른 외국인들은 단지 통상만 할 뿐인데 일본인은 군대를 거느리고 京城에 주둔함으로 우리나라 境土를 침략하는 것으로 의심되었기 때문이다”1310)<전봉준공초>, ‘재초문목’(≪동학란기록≫하), 538쪽.라고 하였고, “피고(전봉준-인용자)는 일본군대가 대궐로 들어갔단 말 듣고 필시 일본인이 我國을 倂呑코자 하는 뜻인줄 알고”1311)<전봉준판결선고서>(≪동학관련판결문집≫, 총무처정부기록보존소, 1994), 30쪽. 재봉기하였다고 한다.

告示·京軍與營兵 而敎示民

無他라 일본과 조선이 開國 이후로 비록 隣邦이나 累代 敵國이더니 聖上의 仁厚하심을 힘입어 三港을 許開하사 通商以後 갑신십월의 四凶이 挾敵하야 君父의 危殆함이 朝夕에 있더니 宗社의 洪福으로 奸黨을 消滅하고 금년 유월에 開化奸黨이 倭國을 締結하여 乘夜入京하여 군부를 逼迫하고 國權을 擅恣하며 우황 方伯守令이 다 개화중 소속으로 인민을 撫恤하지 아니코 殺戮을 좋아하며 生靈을 塗炭함에 이제 우리 동도가 의병을 드러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를 제어하며 朝廷을 淸平하고 社稷을 안보할새 (하략)1312)<선유방문 병동도상서소지등서>(≪동학란기록≫하), 379쪽.

 11월 12일의 창의 고시에서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조선 국왕이 핍박당하고 사직의 안보가 위태로우며 國權이 擅恣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동경일일신문≫은 제2차 농민군 봉기에서의 ‘擧兵의 名義’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1313)≪동경일일신문≫, 명치 27년 8월 5일(≪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사운연구소, 1996), 509쪽.

우리들은 전에 폐정을 釐革할 목적으로 일어났으나 詔諭가 있어서 초토사와 화약을 맺고(중략) 일본은 大兵을 파견하여 我國家를 呑하려고 하여, 日兵은 大擧 境土를 제압하고 이미 京城에 들어왔는데, 이에 국가가 위급하고 존망이 갈리었다. 진실로 國을 생각하는 者는 창을 들고 일어나 방어해야할 때이다. 宮中의 일은 물을 겨를 조차 없으므로 우리가 먼저 일어나 日兵을 방어해야 한다. (하략)

 농민군은 일본군의 침략을 ‘我國家를 呑하려는 것’, 한국의 ‘境土를 제압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농민군은 제2차 농민전쟁의 단계에서 國家와 國權과 境土를 유기적으로 일체화시켜서 인식하고 있었다. 일정한 經界 안에서 효력을 가지는 國權이 있는 것을 國家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國家와 자신의 운명을 일체화시켜서, 자신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영역국가에 헌신하려고 하는 농민군은 국민의 일보직전의 상태에 자신을 갖다놓았다고 생각된다.

원래 우리들이 병을 일으킨 것은 閔族을 타도하고 폐정을 개혁할 목적이었지만, 閔族은 우리들의 입경에 앞서 타도되었기 때문에 일단 병을 해산했다. 그런데 그후 7월 일본군이 경성에 들어가 왕궁을 포위했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 동지를 모아서 이를 쳐없애려고 다시 병을 일으켰다. 단 나의 종국의 목적은, 첫째 閔族을 무너뜨리고 한패인 간신을 물리쳐서 폐정을 개혁하는 데 있고, 또한 轉運使를 폐지하고 田制·山林制를 개정하고 私利를 취하는 小吏를 엄중히 처단할 것을 원할 뿐이다.1314)≪동경조일신문≫, 명치 28년 3월 5일(≪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369쪽.

 전봉준은 12월 초순 南小四郞에의 口供에서 농민전쟁의 목적을 위에서와 같이 田制를 개정하고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내정혁신이라고 하였다. “적어도 전봉준이 있는 한은 적어도 순수동학당(농민군-인용자) 만큼은 일본 배격 때문에 그들의 內政更革의 本願을 버려버리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1315)≪二六新報≫, 명치 27년 11월 11일(≪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149쪽. 보도에서처럼, 농민군의 기본목적은 내정개혁이었고, 항일전쟁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위에서와 같은 국민의식에로의 접근 역시 내정개혁을 위한 농민군의 투쟁, 특히 집강소의 역사적 경험의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의식에서의 전진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권력구상1316)≪동경조일신문≫, 명치 28년 3월 6일<동학수령과 합의정치>(≪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372쪽.으로 결실되고 있었다.

일본군을 몰아내고 惡奸의 吏를 쫓아내어 임금 곁을 깨끗이 한 후에는 몇 사람 柱石의 士를 내세워서 정치를 하게 하고 우리들은 곧장 농촌에 돌아가 常職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國事를 들어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가 協合하여 合議法에 의하여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

 1895년 1월 말 일본영사관에서의 일본인 경부의 “너는 경성에 공격해 들어온 후에 누구를 추대하려고 생각하였는가”라는 질문에 전봉준은 위와 같이 대답하면서, 폐정개혁·내정개혁을 담보하는 새로운 권력구조로서 몇 사람의 名望家의 合議法에 의한 정치운영의 권력구조 구상을 나타내었다. 전봉준은 한 사람의 세력가가 정치를 담당하는 민씨척족정권의 권력구조 형태와 대원군 권력구조 형태를 모두 비판하였다. 전봉준은 “원래 우리나라의 정치를 그르친 것은 모두 대원군이기 때문에, 인민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1317)≪동경조일신문≫, 명치 28년 3월 5일<동학당 대두목과 그 자백>(≪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369쪽.라고 하였다. 전봉준은 이제 대원군에의 기대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斥洋과 斥倭에서는 일치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1318)≪동학사≫, 158쪽. 전봉준이 말하는 ‘몇 사람 柱石의 士’에는 대원군 세력도 포함되는 것이리라고 짐작된다. 항일 연합전선의 대상인 척사위정의 보수유림세력도 또한 포함되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전봉준은 제2차 농민전쟁의 단계에서는 내정혁신을 위한 방법으로서 항일의 연합전선과 연합정권까지 구상하였다. 농민군 세력도 연합정권의 일각에 자리시켰을 가능성도 농후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곧장 농촌에 돌아가 상직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고 하듯이 농민군 스스로를 국권의 담당주체로 인식하는 정치의식은 성립되지 못하였다. 농민군은 영역국가에서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여 국가가 정치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으로서의 國權 즉 主權을 의식함으로써, 영역국가와 主權을 국가정치의 원칙으로서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國權·主權의 담당자로서의 국민은 인식되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농민군은 근대적 내셔널리즘 일보 전의 단계에는 도달하였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농민전쟁은 객관적으로는 농민층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길에 의한 국민국가 형성의 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농민전쟁은 기본적으로는 일본군의 무력탄압으로 말미암아, 즉 농민군을 ‘살륙’함으로써 농민군 세력을 한반도로부터 ‘剿滅’하려고 한1319)井上勝生,<甲午農民戰爭(東學農民戰爭)과 日本軍>(≪近代日本의 內와 外≫田中彰 編, 吉川弘文舘, 1999), 272쪽. 일본의 군사력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1894∼1895년의 갑오경장으로 한국은 淸에의 번속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형식상 모든 단위국가의 대등성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국제질서에서 독립국가로 정립되었으나,1320)졸고,<근대국민국가인식과 내셔널리즘의 성립과정>(≪한국사 11, 근대민족의 형성 1≫, 한길사, 1994), 70쪽. 농민전쟁의 좌절로 말미암아 半식민지로서의 성격을 심화시켜 나아갔다. 淸은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말미암아 瓜分의 위기에 처함으로써 종속국에로의 길로 들어섰음에 반하여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타민족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에로의 길로 명백히 들어서게 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3국의 양극분해를1321)梶村秀樹,<東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제국주의 체제에의 이행>(≪발전도상경제의 연구≫, 세계서원, 1981;≪梶村秀樹著作集 2-朝鮮史의 方法-≫, 명석서점, 1993 재수록), 292∼299쪽. 촉진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체제가 확립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은 그 이후 한국에서의 모든 민족·민주 변혁운동에서 끊임없이 역사적 기억과 사회적 傳記로서 소생함으로써 그 운동들의 동력으로서 거듭 부활하였다.

<鄭昌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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