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Ⅰ. 청일전쟁
  • 3. 전쟁의 경과
  • 1) 한반도에서의 전투와 황해 해전

1) 한반도에서의 전투와 황해 해전

청일전쟁은 1894년 7월 25일 아산만의 豊島 해전, 7월 29일 성환전투를 거쳐 9월 16일 평양전투와 17일의 황해 해전, 10월 24일 일본군의 압록강 도강, 11월 6일 랴오뚱반도 지역의 찐죠우(錦州) 점령, 11월 21일 뤼쒼구오(旅順口) 점령, 이듬해 2월 17일 샨뚱반도 지역에서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 점령, 그리고 3월 티엔쭈앙타이(田庄台)전투의 순으로 전개되어 결국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1895년 4월 17일<청일강화조약>, 즉<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 의해 일본은 거액의 배상금, 그리고 타이완과 랴오뚱반도의 할양을 청국에 강요하게 된다. 전쟁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은 황해 해전(94년 9월)과 웨이하이웨이 점령(95년 2월) 시점을 경계로 해서 몇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부근의 풍도에서 일본 해군이 청국함대에 기습 공격을 가하면서 청일전쟁은 시작되었다. 개전 당시 일본군은 육군 7개 사단, 동원병력 12만(출동병력은 17만), 신식 무라타(村田)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해군도 일본은 군함 28척에 총 5만 7천여 톤이었고 철저하게 훈련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청국군은 총 병력 35만이라고는 하나 훈련 미숙에다 편성·지휘계통·무기의 질에서 크게 떨어졌으며, 해군의 경우에도 척수·톤수에서 일본보다 다소 우세하기는 했으나 함대 편성의 불균형과 기동성에 문제가 있었다.

이 풍도 해전에서는 일본 해군의 기습에 의해 청국 군함 한 척이 좌초되었고, 나머지 한 척은 피해를 입은 채 퇴각했다. 따꾸오(大沽)에서 아산으로 병력을 수송중이던 상선 ‘까우셩호(高陞號)’도 일본함대의 어뢰 공격을 받아 격침당했다. 선상의 청군은 900명 중 사상자를 700여 명이나 냈으나 일본군은 영국 선장은 구조했다.075)풍도 해전의 전황에 관해서는<日艦擊沈高陞號實況文件三種>(≪中日戰爭文獻彙編≫6), 19∼29쪽;陣信德 譯,<東鄕平八郞擊沈高陞號日記>(≪中日戰爭文獻彙編≫ 6), 30∼35쪽 참조.

리훙장은 이 소식을 접하고도 즉각적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다. 까오셩호는 청국이 용선한 영국 배였기 때문에 영국이 “이 사건에 간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076)≪李文忠公全書≫, 電稿 16권, 32쪽.이라고 판단하여 영국의 견제를 기대했던 것이다.077)≪帝國主義與中國海關≫(北京:科學出版社, 1955), 50쪽. 그러나 일본이 신속하게 영국에 대해 까오셩호 사건에 관한 사과와 배상을 약속함으로써 청국정부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산만 기습에 의해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일본군은 7월 28일 아산 동북쪽의 成歡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 29일에 太原鎭 總兵 셰셔청(攝士成)이 이끄는 청의 주력군을 패퇴시켰다. 예치챠오(葉志超)와 셰셔청은 잔류병을 이끌고 평양으로 퇴각했고 청 조정에 대해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허위 보고했다.

치밀한 사전계획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작전 수행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조선 민중의 방해 활동 때문이었다. 특히 동학의 농민군 등은 전쟁전부터 상소와 대자보를 통하여 ‘반일’의 기치를 들어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078)姜昌一,<東學農民軍の日淸戰爭への對應>(東アジア近代史學會 編,≪日淸戰爭と東アジア世界の變容≫上, 東京:ゆまに書房), 277∼284쪽 참조. 그러나 전쟁에 임한 일본군은 아산 상륙 직후부터 지역 주민을 강제동원해서 군수물자 수송을 강요했으며, 식량과 부식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이에 대해 조선 민중은 비록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이긴 했으나 완강하게 저항했다. 조선의 지방 관아도 일본군 사령부의 지령을 기피했다. 이 무렵에는 일본이 이용하려던 대원군과 정부수반 김홍집까지도 은밀히 일본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민중의 협력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청국군은 우세한 일본군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결국 성환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8월 1일 청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같은 날 일본정부도 천황의 조서 형식으로 청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메이지 천황이 선전 조서에서 강조한 점은 전쟁의 목적이 조선의 ‘독립’ 보장과 내정개혁의 실시에 있다는 것, 또 전시 국제법을 준수하겠다는 것이었다.079)宮內廳 編,≪明治天皇紀≫8(東京:吉川弘文館, 1973), 472∼474쪽. 중국보다는 동아시아에서 청·일 대립을 놓고 간섭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서구 열강을 의식한 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이 벌이는 전쟁이 ‘정의’로운 것이며 전쟁수행의 방법도 서구 근대 국민국가의 국제법이라는 ‘문명’의 체계에 입각한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열강을 중립화시켜 간섭을 배제하는 동시에 당시 일본 외교의 최대 현안이던 열강과의 조약개정 교섭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쟁의 논리와 수사는 대내적인 국민 통합의 국면에서도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이번 전쟁이 동양에서 서구문명의 대표자인 일본과 전통적 동양문명, 즉 야만의 대표자인 청국 사이에 벌어지는 ‘문명과 야만(文野)의 전쟁’임을 강조했다.080)≪福澤諭吉全集≫14, 591쪽. 또 이후의 러일전쟁 때 철저한 ‘전쟁반대론’(非戰論)을 주장하게 되는 우치무라 칸조오(內村鑑三)도 이 당시에는 전쟁을 동양에서 ‘진보주의의 戰士’인 일본이 ‘진보의 敵’인 중국을 타도하기 위한 ‘문명의 의로운 전쟁(義戰)’이라고 자리를 매김 했다.081)≪內村鑑三著作集≫2, 23쪽.

침략전쟁으로 큰 이익을 보게 된 미츠이(三井), 미츠비시(三菱) 등 재벌은 군사 공채에 의한 전쟁 경비 모금을 위해 1894년 8월 배외주의 단체인 保國會와 奉公義會를 각각 설립했다. 또한 지금까지 의회에서 정부와 대립해왔던 정당 세력도 ‘의전론’이란 이름 아래 10월의 제7임시의회에서 1억 5천 만 엔에 달하는 방대한 임시 군사예산과 군사 공채 발행을 내용으로 한 예산안을 승인하면서 정부 이상의 대외 강경론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대중 매체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자유당의 기관지≪自由新聞≫은 이미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고 金玉均이 살해당한 시점을 전후해서부터 “조선은 조선의 조선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아시아 패권을 장악할 호기임을 강조했다. 일본군이 파견될 때에는 일본 국민으로써의 애국심 고양을 찬미했으며, 7월 22일의 사설은 “개전을 선언하라”는 제목 아래 이제 남은 유일한 방법은 무력으로 청국과 조선을 함께 분쇄하는 것이므로 속히 개전을 선포하라고 외치기도 했다.082)松岡僖一,<≪自由新聞≫の戰爭メッセージ>(大谷正·原田敬一 編,≪日淸戰爭の社會史≫, 大阪:フォーラム·A, 1994), 43∼52쪽.

신문들은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이른바 ‘軍國美談’을 제조해 내 대서특필했다. 예컨대 성환전투 직후에 유포된 대표적인 ‘미담’으로서 안성 진격 당시의 나팔수 시라카미 켄지로오(白神源次郞)가 죽어가면서도 나팔을 불었다고 하는 극적인 허구가 군가나 시의 형태로 복제되었다.083)宇野俊一,≪日淸·日露:日本の歷史≫(東京:小學館, 1976), 74쪽.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자 청 꾸앙쉬제(光緖帝)는 리훙장에게 신속히 병력을 파견하여 일본에 대해 공격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리훙장은 구체적 전략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예컨대 육군에게는 수비할 수 없으면 즉각 철수하라고 명령했으며, 해군에 대해서도 함선을 아낄 것과 大洋에서의 ‘浪戰’은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조선으로 증원된 四路군 병력이 평양에 도착한 것도 8월 상순의 일이었다.

한편 풍도전투와 성환전투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8월 26일 일본은 조선과<攻守同盟>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첫째 청국군을 조선 국경 밖으로 철퇴시켜 조선의 자주 독립을 공고히 하며 조·일 양국의 이익 증진을 도모하고, 둘째로 예상되는 청국의 공격시에 일본이 전쟁을 담당하고 조선은 일본군의 활동에 전폭적으로 협조한다는 것, 그리고 셋째로 청국과 和約이 성립되면 이 맹약을 파기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곧바로 북상하여 평양으로 진격,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평양에는 증원군이 파견된 데다 성환에서 패주해 온 예치챠오 등의 병력까지 합류하여 모두 2만여 명의 청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소장 등이 이끄는 일본군은 사방으로부터 평양으로 접근하여 9월 13일 평양성 포위를 완료한 뒤 이튿날부터 산발적인 공격에 들어갔고 15일에는 총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성환에서 일본군의 포위망에서 빠져 나온 청국군은 조선 민중의 협력을 얻어 북부 지방으로 들어오던 주력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우회해서 평양에 도착해 있었다. 평양의 청군-뻬이양(北洋) 육군은 마우제르(Mauser)형 연발 장총과 크루프(Krupp)식 후장포(後裝砲)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의 주장비는 무라타(村田) 소총과 청동포였기 때문에 육군의 장비를 따지자면 청군이 한 발 앞서 있었다.

그러나 평양의 청군은 병참 설비가 없다시피 했고 무엇보다 먼저 왜 전투를 치러야하는가 하는 전쟁에 대한 동기 부여가 없어 투지와 사기가 별로 일고있지 않았다. 여기에 일본군의 총 공격을 앞둔 사령부의 우유부단과 무능 등이 악재로 겹쳐있었다. 따라서 1만2천 명의 청군은 1만 7천 명의 일본군을 이기지 못하고 600명의 포로를 남기고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 압록강을 건너 패주했다.084)≪一億人の昭和史:日本の戰史-1:日淸·日露戰爭≫(東京:每日新聞社, 1979), 13∼15쪽.

조선 민중의 반일 감정을 이용해서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는 유격전을 벌일 수도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국군은 이러한 민심을 활용하지 못한 채 기선을 잃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국군은 규율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이르는 곳마다 노략질을 하는 등 조선인민의 이익을 침해함으로써 조선인의 기대를 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청군에 대한 우호적인 지지는 별로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청일전쟁은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이 청국에 대한 실망과 함께 공존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085)李英 主編,≪中國戰爭通鑑≫上(北京:國際文化出版, 1995), 761∼762쪽.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일본군이 공주에 도착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였다. 일본군의 전신선을 절단해 연락망을 마비시켰고, 일본군에게 식량과 말, 소 등 가축을 팔거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행위를 거부했다. 지방에 따라서는 일본군의 보급 부대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저항으로 일본군은 할 수 없이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노동자 1만 명을 일본으로부터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086)조선 인민의 저항 등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 등에 대해서는 朴宗根 著, 朴英宰 譯,≪淸日戰爭과 朝鮮:外侵과 抵抗≫(서울:一潮閣, 1989) 참조.

일본의 침략이 급속히 진전되고 청국이 군사적으로 패배하자 구미 열강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영국은 일본의 전쟁 경비를 청국이 배상할 것,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이 체결되도록 열강에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은 기본적으로 일본을 지지 격려했고, 제정 러시아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다른 열강은 영국의 제안을 지지하지 않고 있었다.

한편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9월 16일 메이지 천황은 히로시마(廣島)에 도착, 제5사단 사령부로 대본영을 이전했다. 앞서 살펴 본 대로 일본은 이미<戰時大本營條例>에 근거하여 6월 5일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전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대본영을 이전하자고 건의하여 성사시킨 이토오의 의도는 천황이 전쟁을 직접 지도한다는 것을 대내적으로 과시함으로써 국민 통합을 강화시키자는 데 있었다. 실제로 메이지 천황은 대본영 군사회의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적극적으로 전쟁을 이끌었다. 잇단 승전보에 고무된 일본 국민의 전쟁 열기는 대본영 히로시마 이전과 천황의 진두 지휘에 의해서 더 한층 증폭되었다.087)檜山幸夫,<天皇の戰爭>(大谷正 等編, 앞의 책, 77∼106쪽).

평양전투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둔 뒤인 9월 17일 황해에서는 우선 일본 연합함대의 군함 12척과 띵루창(丁汝昌) 제독이 이끄는 北洋함대 소속 군함 14척이 전투에 돌입했다. 이 황해 대해전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 해군끼리의 접전이었다.

청일전쟁에 동원된 전체 해군력을 살펴보면, 일본의 연합함대는 모두 27척으로 모두 5만 톤을 넘었다. 척 당 평균 2천 톤 이하였다. 청의 북양함대는 21척에 약 4만 톤으로, 척 당 크기는 일본과 비교해서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청의 해군함정들은 큰 배와 작은 배들의 조합이었다. 이를테면 ‘팅위엔(定遠)’ ‘쩐위엔(鎭遠)’ 두 척은 7천4백 톤 급, 이 아래로 여섯 척이 2천에서 3천 톤 급, 그 아래 4척이 천 2∼3백 톤 급, 나머지 9척은 모두 수백 톤 급의 작은 배들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 해군은 ‘하시다테(橋立)’, ‘이츠쿠시마(嚴島)’, ‘마츠시마(松島)’, ‘요시노(吉野)’ 네 척이 4천 톤을 웃도는 최대 함정이었고, 그 아래로 3천 톤 급 4척, 2천 톤 급 3척, 천 톤 급(1030∼1760톤)이 10척, 나머지 6척이 6백 톤 급이었다, 주력 함정들이 중∼대형으로 고루 섞여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천 톤 급 이상만 따진다면 청일 각각 12척 대 21척이었다.

최대 속도는 청 해군이 18노트 급이 두 척, 14∼16노트가 8척, 10노트가 10척 정도였다. 특히 7천 톤 급의 거함들은 14노트, 가장 빠른 18노트 속도의 두 척은 2300톤 급이었다. 일본은 이에 비해 ‘요시노’가 4천 150톤에 23노트, 17∼10노트 급이 8척인데 이 함정들은 쾌속과 함께 대개 크기도 컸다. 이를테면 일본 배로 가장 큰 4천 2백 톤 급의 ‘마츠시마’도 17노트가 넘었고(청의 7천 톤 급 ‘팅위엔’이나 ‘쩐위엔’은 모두 14노트) ‘하시다테’, ‘이츠쿠시마’도 18노트에 가까운 최대속도를 갖고 있었다.

무장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청군의 최대 함정들은 장비와 크기가 정비례하지 않았다. ‘팅위엔’만이 구경 30센티 크루프(Krupp) 거포 4문을 장착했을 뿐 나머지는 ‘핑위엔(平遠)’ 호에 26센티 포가 한 대 장착된 외에는 구경 10∼26센티 이상의 함포는 모두 합해 30여 문 정도가 장착되었을 뿐 나머지는 기관포 따위였다. 일본은 구경 32센티 포 4문을 필두로 10∼26센티 급이 모두 200문 이상 장착되어 있었다.088)Vladimir, The China-Japan War:Compiled from Japanese, Chinese and Foreign Sources(London:Sampson Low, Marston and Company, 1896), pp.76∼87. 저자로 밝힌 Vladimir란 이름은 물론 러시아 인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성명이 아닌 일반적인 러시아 이름이다. 이름에 덧붙여 “Lately of the diplomatic mission to Korea”라 하여 정직한 표현이라면 청일전쟁 이후 한국에 파견된 러시아 외교관으로 복무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편찬자 스스로도 “일본 자료에 치중해서 쓴 것”(‘To My Readers’)이라 했듯 전반적으로 전쟁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전황, 전투 장비 등 실증적 묘사에서는 중국측 자료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전쟁 당시 그리고 전쟁 직후에 실제로는 일본인이 편찬하고 영미인들의 이름으로 출간된 전쟁관련 서적이 적지 않다. 이 경우에는 보통 도와 준 일본인의 이름이 병기되는 경우가 많다(이를테면 위 Vladimir의 책과 같은 출판사에서 1897년에 간행된 Heroic Japan:A History of the War between China & Japan의 경우는 저자를 F. Warrington Eastlake, Ph.D, & Yamada Yoshi-Aki, LL.B로 밝혔을 뿐 아니라 머리말은 ‘천황폐하 만세’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선전 책자에 비하면 그래도 중립적 서술에 가까운 자료로 볼 수 있다. 중국 해군의 장비 등에 관한 최근에 정리된 중국측 자료로는 姜鳴 編,≪中國近代海軍史事日誌, 1860∼1911≫(北京:三聯, 1994)이 유용하고 일본측 자료로는<軍事的視點からみた日淸戰爭>(東アジア近代史學會 編,≪日淸戰爭と東アジア世界の變容≫下, 東京:ゆまに書房), 89∼101쪽이 있다.

이처럼 총 톤수나 척수만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전력 차이가 북양함대와 일본 연합함대 사이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속도와 화력 면에 있어서 청일 양군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속도에 있어 최고 30%까지 일본함대가 빨랐고 화력으로는 6대 1 이상 차이가 나 있었다. 더욱이 문제는 전술과 사기였다.

9월 17일 압록강 어구 황해에서 벌어진 청일의 황해 해전은 사상 최초의 달리는 기선 군함들끼리의 회전이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서로 맞선 해군력은 청군이 14척 총 톤 수 3만 6천여 톤, 일본군이 12척 총 톤수 약 4만 톤, 각 군의 최고 속력은 위에 살핀 그대로이고, 일본측 자료에 따르자면 화포-속사포만 따질 경우 일본군이 246문, 청군은 79문을 각각 장비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089)앞의≪一億人の昭和史:日本の戰史-1:日淸·日露戰爭≫, 21쪽.

오전 10시 30분 일본함대가 서남쪽으로부터 진항해 오는 것을 본 띵루창 휘하의 청군은 열 척의 전함을 학이 날개를 편 횡렬을 만들어 적을 맞았다. 마치 만주족의 기마전을 방불케 하는 일렬 횡대 대열이었다. 중앙에 기함 팅위엔을 두고 양쪽으로 각각 4척과 5척으로 날개를 삼고 두 척을 꼬리 뒤에 두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케 하고 그 뒤를 다시 어뢰정을 뒤따르게 한 편대였다.

일본군은 일렬 종대로 돌진해 왔다. 요시노를 선두로 멀게는 약 600미터, 가깝게는 300미터 거리를 두고 횡렬로 포진한 청군의 함대 머리들 앞으로 한 척 씩 공격하면서 지나가는 형국이었다.

12시 50분 쌍방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청국의 기함 ‘팅위엔’이 선공을 날렸고 나머지 함정들도 불을 뿜었다. 그러나 명중보다는 빗나가는 포탄이 더 많았다. 띵루창은 공교롭게도 함교에서 넘어져 부상당했다. 일본군은 한 척 한 척 다가오면서 우현의 속사포를 뿜고는 달아났다. 청군함 두 척에 먼저 명중되었다. 선두에 섰던 일본함 ‘요시노’도 한방을 맞고 불이 붙었다. 한 시간 가량의 전투 끝에 1300톤 급 청함 ‘챠오윙(超勇)’이 침몰했다. 일본 군함 세척도 중상을 입었다.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여기서 일본군함들의 빠른 속도가 위력을 내기 시작했다. 치고 되돌아온 일본군함들은 다시 횡대로 늘어선 청함을 쳤다. 북양함대의 뒤를 돌아 배후까지 노리며 덤벼들었다. 협공의 위기였다. 청함대는 혼란에 빠졌다. 대대장 떵쉬에창(鄧世昌)은 23노트의 당시 최고의 속력과 15센티 속사포 4문을 장착한, 그러나 상처를 입고있는 ‘요시노’를 특히 주목하고 자신의 함정으로 들이받아 침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먼저 어뢰를 맞고 떵쉬에창을 비롯한 250여 명의 청 장병들이 배와 함께 수장되었다.

‘찡위엔(經遠)’이 뒤를 이어 요시노를 노렸다. 그러나 요시노의 속사포는 오히려 ‘찡위엔’을 역습했다. 다시 250여 명의 장병이 수장됐다. 두 척의 침몰을 보자 ‘찌위엔(濟遠)’과 ‘광찌아(廣甲)’의 지휘자는 후퇴를 명령했다. 그러나 나머지 청함들은 전력을 다해 항전했다. ‘마츠시마’도 큰 타격을 받았다. 이제는 청함들이 일본함 주위를 돌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함 ‘마츠시마’는 기능이 마비되었다. ‘요시노’는 전투력을 상실했다. 북양함대가 기력을 되찾고 재집결하기에 이르자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오는 전장에서의 철수를 명령했다. 저녁 6시 가까운 시간이었다. 잠시 추격하던 북양함대는 뤼쑨으로 회항했다.

일본함정 5척이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6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청함은 4척이 없어지고 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산술적으로 청군의 패배였지만, 일본군의 전투 결과는 본국에 과장되어 보고된 반면 청군의 감투는 패배로 과장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아마도 리훙장의 해군 군사력을 아껴두려는 의도에서가 아닌가 한다. 실제로 그는 이 해전 이후 다시는 함대의 출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해의 제해권은 자연스레 일본의 수중으로 돌아갔다.090)李英 主編, 앞의 책, 761∼762쪽

황해 해전 이후 시타이허우(西太后)는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할 요량으로 총리아문에 위쑤(奕訢)를 기용하고 리훙장을 파견하여 러시아를 통해 화의를 청하고자 했다. 10월 12일 리훙장은 티안찐에서 러시아 사절을 접견하고 러시아가 직접 나서서 전쟁에 간섭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러시아는 전쟁 초기의 관망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러시아 공사 카시니(Arthur Pavlovitch Cassini)는 뻬이징에 있는 각국 공사들과 상의해 보겠다고 만 대답했다.091)朴英宰,<淸日戰爭과 日本外交>(≪歷史學報≫53·54합집, 1972), 161∼162쪽 참조.

당시에 영국은 전쟁 초기부터 일본에 기울어져 있었지만 중국이 영국에 보조를 맞추어 극동정책에 어느 정도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1893년 겨울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동북의 국경문제를 담판할 때도 청국정부의 협조를 요구하기도 했다.092)≪李文忠公全書≫, 電稿 15권, 5∼6·10∼13쪽. 그러나 평양과 황해 전투 이후 영국의 여론은 중국에 등을 돌렸다. 타임즈(The Times)紙는 사설에서 “이제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여전히 우리가 그들의 자존심과 교만한 심리에 대해 양보를 해가며 우의를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인식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잠재력에 관한 신화와 중국이 각성할 것이라는 몽상은 이미 이번 전쟁으로 깨졌다”고 말했다.093)≪The Times≫, 1894년 9월 30일.

여기에는 청일전쟁 이전부터 중국과는 달리 일본정부가 주력했던 해외 유력 매체에 대한 선전 공작이 주효한 바 있다. 외국 신문사와 통신원들에 대한 메이지정부의 공작은 주로 제2차 이토오 내각의 외무성과 내각 서기 관장 이토오 미요지(伊東巳代治)가 담당했다. 그러나 당시까지 아직은 국제적인 공작 경험과 기법이 일천했기 때문에 선전 공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외국인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 선전 공작에는 외국인들, 특히 영국과 미국 인사들이 다수 동원되었다.094)이상 국제 선전전에 관해서는 大谷正,<日淸戰爭期の對外宣傳活動 E. H. ハウスの活動にふれつつ>(≪年報近代日本硏究 12:近代日本と情報≫, 東京:山川出版社, 1990), 157∼181쪽을 참조할 것.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볼트(Alexander Siebold), 스티븐스(D. W. Stevens)와 하우스(E. H. House)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하우스는 외상 무츠와 오랜 동안의 개인적인 연분을 갖고 있었다. 외무성에 고용된 시볼트와 스티븐스는 각각 영국·독일과 미국에서 일본 공사와 협력하여 현지 신문의 기사와 논조를 조종하는 역할을, 뉴욕 트리뷴(New York Tribune)과 월드(The World)지의 일본 특파원이었던 하우스는 일본에게 유리한 기사를 송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먼저 영국 로이터(Reuter) 통신사에 대한 공작은 시볼트를 매개로 영국·독일 공사를 겸임하고 있던 아오키 슈우조오(靑木周藏)에 의해 추진되었다. 즉 아오키의 요청에 의해 외상 무츠가 로이터 통신에 연간 6백 파운드의 공작금을 지원하기로 결정되어, 아오키와 로이터 통신사 대표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영국의 센트럴 뉴스(Central News)사에 대해서도 아오키공사를 통해 일본 대본영의 예비금을 자금으로 일본에게 유리한 정보를 신문사에 유포하도록 했다. 예컨대 11월에 뤼쑨 학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센트럴 뉴스사는 사건을 축소 보도하여 타임즈지 등에 게재하게 한 바 있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미야오카 코오지로오(宮岡恒次郞) 임시대리공사가 스티븐스를 통해 여당인 민주당과 가까운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지에 접근하여, 종래 일본의 조선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논조를 일본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바꾸게 만들었다. 또 스티븐스는 유피(United Press) 워싱턴 지국장을 통해 저팬 메일(Japan Mail)社 사주 겸 주필인 브링클리(Captain Francis Brinkly)를 유피 일본통신원으로 해서 유리한 정보를 가맹 신문사에 게재하도록 했다. 1892년 무츠의 외상 취임 직후 일본으로 온 하우스는 무츠가 지휘하는 가운데 뉴욕 트리뷴지와 뉴욕 타임스지를 대상으로 조약개정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며 국제 선전에 종사했다.

청일전쟁에 특파원을 직접 파견했던 런던 타임즈(The Times), 월드,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사에 대한 공작은 특히 중요했다. 특히 월드지의 크릴만(James Creelman) 특파원은 뤼쑨 학살에 대한 규탄 기사처럼 일본에 불리한 정보를 송고하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월드지에서 하우스는 크릴만의 기사를 뉴욕으로 전송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크릴만의 통신 내용을 무츠에게 통보하여 일본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기사를 발송을 지연시키거나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선전전을 수행했다.

하우스는 1894년 12월부터 크릴만의 후임으로 월드지의 정식 통신원이 되었고, 이후 일본군의 뤼쑨 학살에 대한 무츠의 변명 등 일본의 입장을 변호하는 통신, 또 리훙장 저격 사건이나 명성황후 살해 사건 등에 대해 발뺌하는 기사를 내보내는 역할도 했다. 이들에게는 외무성과 내각을 통해 지원비가 할당되었으며 나중에는 메이지정부로부터 叙勳과 연금 등 혜택이 주어졌다.095)Jeffrey Dorwart, The Pigtail War:American Involvement in the Sino-Japanese War:1894∼1895(Amherst:Univ. of Mass. Press, 1975), pp.105∼1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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