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법제도는 고문과 연좌율 등 비인도적인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일원화된 법집행기관과 공개재판제도 등의 부재로 말미암아 형조, 의금부, 포도청 그리고 중앙 및 지방의 군영, 심지어 권세있는 개인들까지도 임의로 혐의자들에게 재판을 거치지 않고 형벌을 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군국기무처는 이러한 불공평하고 비인도적인 관행들을 폐지하면서 새로운 사법행정제도를 도입하였다. 즉, “죄인 자기 이외의 연좌율을 일절 勿施할 것”이라는 의안을 채택하여 연좌법을 폐지하였으며, 각 부·각 아문·각 군문에서 함부로 체포·施刑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한 “무릇 대소 죄인은 진실로 사법관이 재판·明定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죄벌을 가하지 말 것”을 의결하여 공개재판과정을 거쳐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신식 법률을 반포하기에 앞서 무릇 법관이 대소 죄인을 심문할 때는 다만≪大典會通≫刑典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을 許하며 함부로 栲刑을 가하지 말 것”이라 하여 고문을 폐지하였고, ‘賄賂를 索取하는 자’의 법집행을 강화하였다. 나아가 죄인의 자손들도 관원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이 같은 군국기무처의 의안들은 대체로 개개인에게 공평한 재판을 받을 기회를 보장하는 개혁조치로서 한국 사법사상 획기적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한편 법무아문은 “사법·행정경찰·赦宥를 관리하며 고등법원 이하 각 지방재판을 감독”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왕명에 의해 대소 관원의 公罪를 다스리는 義禁司는 법무아문에 소속되었다.427)≪韓末近代法令資料集≫1, 11·31쪽. 그러나 “典獄은 경무청에 부하여 대소 죄인을 물론하고 모두 경무청조규에 비추어 判定을 槪行한다”는 의안을 가결시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경무청이 법무아문보다 더 큰 권한을 갖게 되었다. 다만, “죄안이 錯綜하여 考究하기 곤란한 것은 경무사가 문안을 갖추어 관원을 시켜 該犯을 법무아문으로 인도하여 訊問 決罪”하도록 되었다. 이로 미루어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행정부에서 분리된 강력하고도 독자적인 재판기구를 설치하기를 바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재판권을 행사하기를 원했던 것이다.428)Young Ick Lew, 앞의 글(1974) pp.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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