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2. 제2차 개혁
  • 3) 제2차 개혁의 내용
  • (5) 경제제도의 개혁

(5) 경제제도의 개혁

갑오경장 초기에 군국기무처는 국가의 재정을 확충하고 재정의 일원화와 은본위제도의 실현 등을 통해 근대적 경제제도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제대로 발효되지 않자 국왕은<홍범 14조>를 통해 그 실시를 재강조하였다. 즉,<홍범 14조>중 제6조는 인민의 세금납부를 법령에 따라 정해야 된다는 조세법정주의를, 제7조는 탁지부가 조세의 징수 및 경비의 지출을 관할하는 재정의 일원화를, 제9조는 왕실비와 정부비용의 매년 예산을 정하는 예산제도의 확립을, 그 외에 제8조는 왕실비용을 솔선수범하여 절감한다는 경비절약의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우선 탁지부에 의한 재정의 일원화는 1895년 4월 19일에 발포된<탁지부관제>에서 재강조되었다. 이에 따르면, “탁지부대신은 정부의 재정을 總轄하며 회계·출납·조세·국채·화폐·은행 등에 관한 모든 사무를 掌理하고 각 지방의 財務를 감독”하도록 규정함으로써 탁지부는 국가의 세출입을 총괄할 뿐만 아니라 화폐와 은행에 대한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1차 개혁과는 달리 왕실재정은 탁지부에서 분리되어 궁내부 회계원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이는 왕실재정을 독립시킴으로써 개혁에 대한 왕실의 반발을 무마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493)≪高宗實錄≫, 고종 32년 3월 25일.

<탁지부관제>가 반포된 다음날 재정의 일원화를 도모하려는 기구 정비의 일환으로 조세를 비롯한 각종 세입의 징수사무를 전담할 기구설치를 위해<管稅司及徵稅署官制>가 공포되었다. 이에 의하면, 전국에 관세사 9개와 징세서 220개를 설치하되, 모두 탁지부대신의 관할 하에 두었다. 또한 관세사는 관내 징세서의 징세사무를 감독함과 아울러 군현의 세무를 감사하며, 징세서는 收入調定官이 발부하는 징세 명령 혹은 납세고지에 의거하여 조세 및 기타 세입을 징수하는 업무를 각각 맡았다. 그 결과 종전에 각 군현이 담당하였던 징세사무는 탁지대신이 관리하는 관세사와 징세서로 이관되었던 것이다.494)≪高宗實錄≫, 고종 32년 3월 26일.

한편 1895년 4월 24일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예산제도와 조세법정주의 등을 규정한<會計法>이 발포되었다.<회계법> 총칙 제1조에는 조세의 신설과 세율의 변경을 모두 법률로 정하고, 그 외에는 조세의 감면과 延納을 허용치 않는다는 조세법정주의를 명시하였다. 이어 구체적인 후속조치로 법률 또는 칙령 및 기타 규정이 없는 조세·賦金·상납물·情費·잡비를 비롯하여 徭役 및 기타 力役을 부과·징수하지 못하며, 정부는 정당한 징세명령 또는 납액고지서를 발부하지 않은 조세와 기타 세입은 징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납세자 역시 이를 거부할 수 있다는 조항이 설정되었다. 이러한 조세법정주의의 채택은 그 동안 임의적으로 과징되어 온 규정외의 잡세를 혁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준 점에서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495)金玉根,≪朝鮮王朝財政史硏究≫(一潮閣, 1984), 399∼400쪽.

아울러<회계법> 제3조에서는 “정부의 세입·세출은 매년 예산을 정하여 經理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예산제도가 비로소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회계연도는 매년 1월 1일부터 12월 말일로 하되 회계연도에 속하는 세출입의 출납관련사무는 다음해 8월 말일까지 완결되도록 하였다. 각부대신은 매년 9월말까지 탁지부대신에게 다음 년도 예산조서를 작성하여 송부하면, 탁지부대신은 매년 10월말 이내에 다음 년도의 세입예산을 조사하여 각부의 예산조서와 대조·査定한 다음 세입·세출 총예산안을 편성하고, 이를 각의에 회부하여 심의를 거쳐 국왕의 재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예산은 경상과 임시로 대별하되 豫算 各 款 금액을 유용할 수 없고, 관 밑의 각 항의 유용시에는 반드시 탁지부대신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예산의 부족 혹은 예산외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예비금 조항을 두었다.

또 결산은 각부대신이 예산조서와 동일한 양식으로 경비결산 보고서를 탁지부대신에게 제출하면, 탁지부대신이 이를 검사·확정하여 세출입 총결산서를 작성한 다음 내각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이 밖에 잉여금이 있을 경우 다음 년도 세입에 편입하는 이월제도가 채택되었다.

이<회계법>은 처음에 각 도·영·읍 등 지방행정기관을 제외하고 중앙정부기관에 대해서만 적용되다가 지방제도의 개편과 아울러 6월 23일부터 전국적으로 실시되기에 이르렀다.496)≪高宗實錄≫, 고종 32년 3월 30일·5월 26일. 그러나 예산절차는 그 당시 근대적인 의회제도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회의 의결 내지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내각회의의 심의만 받도록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독립기관에 의한 회계검사 절차도 없었으며, 예산의 편성 및 집행상의 규정도 구체적으로 마련되지 않은 한계를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회계법>에 의거하여 1896년도부터 근대적인 형식을 갖춘 정부예산이 편성·집행된 사실은 우리 나라 재정근대화에 획기적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497)金雲泰,≪朝鮮王朝行政史:近代篇(全訂新版)≫(一潮閣, 1984), 317∼318쪽.

한편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조치로서 내부·탁지부·궁내부로 하여금 宮房田을 조사토록 하고 인삼전매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砂金開採條例>를 제정하여 일반인들의 사금 채광을 허가하고 광세징수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는 德大에게 징세사무를 분관시키고 營邑 등 지방관청의 방해를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광산에 대해 체계적인 징세를 부과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각종 폐단을 일으켰던 六矣廛과 貢納制度도 폐지되었다.498)≪高宗實錄≫, 고종 32년 3월 29일·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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