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2. 아관파천
  • 1) 을미사변 직후 일본의 압제와 단발령

1) 을미사변 직후 일본의 압제와 단발령

 왕비시해 이후 일본에게 쏠렸던 국외의 비난 여론은 잠시 뿐, 조선 내정은 더욱 위기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 등 일본의 고위 인물과 외무성 관계자들은 민비와 대원군의 ‘중세적’ 정권다툼이 조선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선전하였다. 일본의 언론도 이에 발맞추어 일본정부를 측면에서 옹호하였다. 왕비시해는 조선의 정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본정부와는 하등 무관하다는 논지였다. 게다가 영·미·불·독 등 열국 정부도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침묵을 지켰고, 서울의 자국 외교관들에게 배일행동을 자제하라는 훈령까지 내렸다.0100)李玟源,<閔妃弑害의 背景과 構圖>(崔文衡 외,≪明成皇后弑害事件≫, 民音社, 1992), 122∼124쪽.

 이 같은 현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에 더욱 유리한 사태가 야기되었으니 춘생문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경복궁에 감금되어 신변이 위태롭던 고종을 춘생문을 통해 궁성밖으로 탈출시키려던 근왕적 기도로서, 고종의 측근 인사들 외에 구미인들까지 호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사건의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록하고 있지는 못하다. 반면 현지의 일본공사관은 일찍이 ‘모종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당초부터 실패할 것이 분명했던 이 사건은 어느 면에서는 일본이 유도 내지는 조작한 흔적도 없지는 않았다.0101)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28(東京:日本國際連合協會, 1936), 문서번호 417 韓國王露國公使館ニ行幸ノ風說報告ノ件 및 문서번호 420 韓國王露國公使館行幸ノ風說ニ關シ報告ノ件. 결과도 일본에 철저히 이용되었다.

 엉성한 시도에 그친 춘생문사건을 놓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일본은 즉각 ‘국왕 탈취사건’이라고 선전하였다. 일본의 언론은 열국 외교관이 현장에 출현한 점을 포착하여 “일본의 외교관이나 다른 나라의 외교관이나 조선에서 하는 짓은 마찬가지”라는 식의 논조를 폈다. 일본의 내각인사들과 각국 주재 일본외교관도 이 기회에 조선내 열국 외교관의 일본에 대한 비판적 언동을 저지코자 부심하였다. 요컨대 일본은 이 일을 기화로 왕비시해로 인한 국제여론의 비난을 모면하는 것은 물론, 조선내 구미 외교관들의 반일행동에 쐐기를 박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시도는 실제로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0102)中山泰昌 編,≪新聞集成明治編年史≫9(財政經濟學會, 1936), 327∼328쪽.
尹致昊,≪尹致昊日記≫4(國史編纂委員會, 1975), 1895년 12월 9일.

 상황이 반전되자 일본은 다시 조선 내각을 핍박하면서 서둘러 각종의 조치를 취하여 갔다. 태양력 채용·군제 개편·단발의 시행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상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언젠가는 취해져야 할 조치였다. 당시의 친일내각 인사뿐만 아니라 서울 사람 중에서도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이들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왕비시해의 만행이 자행된 뒤의 혼란속에서 비정상적 절차를 거쳐 이루어진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 조치 중에서도 특히 지방 유생층의 강력한 저항을 유발하여 한동안 한반도 전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게 한 것이 다름아닌 斷髮令이었다.0103)≪舊韓國官報≫214호, 건양 원년 1월 4일, 告示. 단발의 명분은 “위생에 이롭고 일하기에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고시 내용도 “朕이 髮을 斷하여 臣民에게 先하노니 爾有衆은 朕의 意을 克體하여 萬國으로 竝立하는 大業을 成케 하라”였다. 고종이 솔선하여 단발을 하고, 일반 백성에게 권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상황은 달랐다. 이때의 형편을 黃 玹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1월 15일(양력 1895년 12월 30일)…10월중 倭使가 上을 협박하여 머리를 자르라고 하자 상은 因山 이후로 미루었다. 이때에 이르러 吉濬·羲淵 등이 왜를 이끌어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머리를 자르지 않는 자는 죽인다고 하자, 상이 길게 탄식하면서 秉夏를 돌아보며 네가 내머리를 자르라고 하였다. 병하가 가위를 들고 손으로 상의 머리를 자르고, 길준이 태자의 머리를 잘랐다. 令이 내려져 곡성이 하늘을 진동하고 사람마다 분노하여 죽음을 무릅쓰고자 하니, 장차 큰 변이 날 형세였다. 왜인이 군대를 배치하여 엄히 지키고, 警務使 許璡은 순검을 인솔하여 칼을 차고 길을 막아 만나는 사람마다 곧 머리를 잘랐다. 또 인가에도 들어가 수색하여 찾아내니 깊이 숨지 않은 자는 면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 온 손들도 나가자마자 상투를 잘려 모두 이를 주머니에 넣고 통곡하며 城을 나섰다. 머리를 깍인 자들은 정연히 잘리지 않아 상투만 잘리고 머리칼은 늘어져 長髮僧 같았다(黃 玹,≪梅泉野錄≫, 國史編纂委員會, 1955, 191쪽).

 위에서 보듯이 고종 자신도 일본군이 대궐을 포위한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내각 인사를 앞세운 일본의 핍박하에 단발이 강제되고 있었다. 李道宰·金炳始 등 관직을 버리거나 낙향하는 전·현직 관리들이 속출하였고, 단발령을 통박하는 상소가 쇄도하였다. 이도재는 “진실로 나라에 이롭다면 어찌 머리카락을 아끼겠는가마는 그 같은 단발령은 억조창생을 격분시켜 이로움은 없고 해로움만 보이는 조치”라고 하였다.0104)黃 玹,≪梅泉野錄≫(國史編纂委員會, 1955), 192쪽. 과연 단발령은 전통적인 유가의 관념속에서 두발을 매우 중시해 온 국민 일반, 특히 지방민과 유생들에게는 천지개벽과 다름없었다. 倭의 칼날 아래 국모가 비극을 맞은 것이 “綱常이 끊기는 極變”이었다면, 단발령은 그야말로 “千年文物이 끊겼다”할 사건이었던 것이다.0105)朴成壽 註解,≪渚上日月≫上(서울신문사, 1993), 232∼246쪽.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정부가 단발을 시행하려 했다면, 서울에서 지방으로 점진적으로 확대하여 가는 것이 마땅했고, 어느 면에서는 자율에 맡겨도 좋을 일이었다.

 당시의 프랑스 외교관에 따르면, 서울 사람들 중 3분의 2가량이 단발령 시행 1주일만에 단발을 행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수일내에 이를 따를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지방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지방으로 갈수록 일제 단발령으로 오해될 만큼 시행 자체는 강제적이었기 때문이다. 단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던 서울의 개화된 사람들에게조차 정부의 처사가 의아하게 비쳐지고 있었으니, 지방민들에게 벼락같은 단발령이 어떻게 비쳐졌을지는 말할 나위도 없다.0106)≪尹致昊日記≫ 4, 1896년 1월 1일.

 이러한 여러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당시 조선 내정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감지된다. 일본은 우선 조선의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가자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조선 조정을 확고히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의 소요사태를 진압한다는 명분하에 일본군을 파병할 구실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멀리는 명치유신 이래의 목표였고, 가까이는 청일전쟁이래 구체화되었던 ‘조선보호국화’를 지속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 것이었다. 아울러 거기에는 일본의 상업적 이해까지 부수되고 있었다.0107)李玟源,<조선말의 단발령과 일본의 대한정략>(≪朝鮮時代의 社會와 思想≫, 朝鮮社會硏究會, 1998), 279∼294쪽.

 일례로 그해 봄 인천주재 영국부영사 윌킨슨(W. H. Wilkinson)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북경주재 영국공사 오코너(O'coner)에게 보고한 바 있다. 즉 “일본의 제안으로 조선의 의례복이나 평상복을 검은 색깔로 할 예정인 바 흰색의 영국산 면제품 판매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영국 상품을 판매하는 인천의 청국상인들은 상해에 상품 선적을 중지하도록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오코너는 “작은 문제로 보이지만 이것은 일본의 대한정책 방향을 말해준다. 조선시장에서 영국제품을 몰아내고자 한다면, 일본은 영국의 호의를 얻기 어려울 것이고, 조선내에서 일본의 활동은 영국의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이노우에 당시 주한일본공사에게 비공식적으로 통보하라”고 힐리어(Walter C. Hillier)에게 지시하였다. 복제 개정에 이 같은 의도가 있었듯이 단발령 역시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0108)李玟源,≪俄館播遷 前後의 韓露關係 1895∼1898≫(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 56∼57쪽.

 이 같은 일련의 조치는 물론 조선 내각의 이름으로 행해졌고, 내각인사들 중 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호응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기 보다는 일본공사 및 일본인 고문관의 의도와 계획하에 취해진 이들 조치가 파행적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환언하면 일본은 내정개혁의 미명하에 조선 조정을 장악하고, 정부와 일반의 관계를 이간하여 조선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나아가서는 조선정부의 요청을 명분으로 파병을 하여 한반도의 군사적 장악까지 달성하자는 것이었다.0109)李玟源, 위의 책, 281∼285쪽.

 이상에서 보듯이 단발령 등을 강행한 직접적 배후는 일본공사관측이었고, 그의 시행 자체는 을미사변 등으로 야기된 조선내의 사태 호도를 위해, 궁극적으로는 일본정부의 조선 침략정책의 일환으로서 취해진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개혁을 지향하던 趙羲淵·兪吉濬·權瀅鎭 등 친일내각 인사들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었지만, 그들은 실권을 행사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유길준·권형진 등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듯 소위 친일파로 불리운 이들에 대한 일본의 간섭은 매우 심하였다.0110)李光麟,≪開化派와 開化思想≫(一潮閣, 1989), 232∼240쪽.
柳永益,≪甲午更張硏究≫(一潮閣, 1990), 250∼254쪽.
단발령을 포함한 정부 조칙의 배후가 조선정부 각부에 배치된 일본인 고문들이었음은 열국 외교관들이 익히 간파하고 있던 바다.0111)Allen to Olney, No. 157, Seoul, Oct. 10, 1895, “Tai Won Khun Revolution”, Despatches from U. S. Ministers to Korea 1883∼1905, National Archives M. F. Record Group No. 134(이하 DUSMK로 줄여 씀).
≪尹致昊日記≫4, 1895년 10월 중순에서 1896년 2월초의 기록.

 결국 단발령 등 일련의 조치는 그 당시 조선 정황이 어떠했으며, 일본의 의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분명히 해준다. 왕비시해로 인한 열국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일본의 입지는 여전했고 일본의 압제하에 오히려 위기에 몰리게 된 것은 고종과 조선 조정이었다.

 다시 말해 왕비시해와 춘생문사건, 단발령 공포 등 일련의 사태에 이르러 조선 정황은 삼국간섭 이전에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 기도하의 상황으로 복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단발령 선포 직후의 조선은 일본의 정략에 의해 점점 절망의 늪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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